|
12. 산골짜기를 울리는 한밤중의 총소리들
삼팔선 부근으로 이동될 것 같던 심재모의 중대가 대기명령을 받은 것은 이십칠일이었다. 모든 전선이 후퇴를 하고 있는 전황 속에서 부대 이동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불안한 닷새가 지나갔다. 모든 전선에서 밀리다보니 날이 바뀔 때마다 위도에 맞춰 도시를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었다. 서부,중부,동부의 전선에 따라 의정부,춘천,강릉,서울,원주,삼척 하는 식이었다. 그런 한심스런 전황을 확인해가며 부대에서 토끼잠을 자고 있는 심재모는 낮시간을 잠깐씩 이용해서 하숙집에 발걸음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보면 순덕이는 그대로 있었고, 이제 떠났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가보면 순덕이는 또 그대로 있었다. 전쟁이 터졌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녀의 입장을 위해 부모에게 편지를 썼고, 노자도 넉넉하게 마련했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도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비죽거리던 그녀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이 쏟으며 목메어 말했다. "지가 그리 싫으시다면이야 못 보는 것잉께요. 그려도 너무 허시는구만요. 지가 빙신이 아닌디, 여자 맘얼 워찌 그리도 모지락시럽고 야박허게 대허는지, 똑 죽고 잡은 맘뿐이구만요.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겄고, 거짓꼴로라도 한분만이라도 지 맘얼 받어주셨으먼 그 표시로 평상 혼자서도 살아졌을 것인디, 너무 허시느마요. 대장님이 여그뜨시는 것 보고 뜰 것잉게, 나 겉은 년 인자 알은 척 마시씨요." 부대에 즉각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잠시의 짬도 없이 부하들을 수습해서 이동이 시작되었다. 심재모는 마음 한자락을 순덕이에게 남겨놓은채 이동 아닌 후퇴의 발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꼴로라도 것인디..." 그녀의 울음 섞인 말이 어디가지고 따라오고 있었다. 이 순박하기만 한 여자야, 나라고 왜 그대를 갖고 싶지가 않았겠어. 그대 말마따나 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니라 젊은 남자야. 허나, 난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고, 그러면서 그대같이 순박한 여자를 장난삼아 무책임하게 손댈 수 없었던 거야. 어느 날 저녁밥상을 놓고 일어서는 순간 끼쳐오던 그대의 냄새를 맡을 때, 이부자리를 깔아놓고 나가는 그대의 뒤꿈치를 보았을 때, 목욕을 하고 아직 물기에 젖어 윤나고 있는 그대의 머리칼을 보았을 때, 그대를 갖고 싶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참아냈다. 나는 그런 사내다. 나를 속이면서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내 곁에 있으면서 아주 큰 일을 해냈다.
그대는 내 병을 고쳐준 것이다. 여자의 거기는 시궁창보다도 더 더럽다는, 내가 전쟁터에서 얻은 그 병을 그대는 서서히 치료해준 것이다. 내 마음에서 그대를 갖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이 그 증거 아니냐. 그대의 거기는 그대의 마음처럼 깨끗하리란 생각이 든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 그때 그대하고 하리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 있거라. 그때는 내가 그대를 찾아가리라, 그 벌교라는 이상스럽게 정겨운 땅으로.
부대는 영주를 거쳐 촌에서 후퇴를 중지했다. 전방부대와 교체될거라고도 했고, 다시 후퇴할 거라는 말이 엇갈리는 속에서 사나흘이 흘렀다. 부대는 다시 후퇴를 시작했다. "이거왜 자꾸 후퇴만 합니까. 우리 부대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후퇴부댄 겁니까?" 상사가 투덜거렸다. "염려 마시오, 윤 상사. 세상살이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오. 특히 군대에서는 더 그렇소. 군인이란 작전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고, 작전이란 피눈물 없이 냉정한 기계조작이오. 편할 때 후회없이 푹 쉬어두시오. 우릴 이렇게 후퇴부대로 두는 건 우리가 이뻐서가 아니오. 다 작전수행에 따른 거요. 무찌를 가능성이 없는 막강한 적 앞에 우리를 내보내봤자 병력손실만 커지니까 어차피 후퇴작전을 하고 있는 처지에, 전방부대를 받치게 하면서 병력손실을 막자는 것이오. 우린 지금 반격을 가할 어느 지점인가를 향해 후퇴하고 있는 것이고, 이러다가 전방부대 어디에 구멍이 뚫리면 언제 전방으로 투입될는지도 모르오. 우릴 놀린 만큼 써먹게 될 테니 염려 말고 기운이나 모아두시오."
심재모의 말은 일종의 하사관 교육이었고, 상사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부대는 상주를 거쳐 구미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에 국군이 유엔군에 편입되는 조처가 취해졌다는 소식이 들렸고, 다음날인 팔일에는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심재모는 국군이 유엔군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국군은 대한민국의 군대고, 유엔군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돕겠다고 온 여러 나라의 잡동사니 군대였다.
그런데 어째서 대한민국 군대가 그 잡동사니 군대에 '편입'이 된단 말인가. 주인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군이고, 유엔군은 분명 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주인이 객 밑으로 들어가다니, 이거야말로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는 주객전도가 아닌가. 제대로 되자면 유엔군이 국군에 편입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지 못할 바에는 서로 독립된 상태로 작전 협조를 해야할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우리 형편이 다급하니까? 어차피 원조를 받아서 싸워야 할 처지니까?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느 것도 납득이되지 않았다. 자기 나라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이 다른 나라들의 군대에 속해 명령을 받아야 하다니, 그럼 우리 나라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군대란 무엇인가. 한 주권국가의 영토와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하는 집단 아니던가. 그러므로 그 집단은 한 국가의 주권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 집단이 의무수행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해 다른 나라들의 군대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주권해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없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도대체 대통령이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심재모는 누구에게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속만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런 말을 내놓고 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장교도 주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김범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속시원한 답이 나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내 십이일에 이르러 국군의 통수권을 미군에게 이양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심재모는 무릎이 꺾이는 절망을 느꼈다. 헌법에 따라 국군의 통수권은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행사하는 절대적이고 고유한 권한이었다. 그 권한을 미군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국권의 포기이고, 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그 영감이 노망을 하는 것인가. 그 영감은 그렇다 하더라도 통수권을 받아가는 미군의 속셈은 또 무엇인가. 이제 실질적인 통치자는 맥아더가 아닌가. 심재모는 참담함으로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이런 꼴을 보자고 학병에 끌려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것이 아니었고, 해방된 나라의 군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해답을 주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남쪽이 이 지경이 된 건 미국 군인들이 강압적으로 세워놓은 군사정권이기 때문입니다." 이학송의 말이었다. 아, 이학송이나 김범우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심재모는 끝모를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아직 감정정리를 하지 못한 심재모가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연대에서 호출이 내려왔다. "심 중위도 아다시피 지난 팔일에 전국적으로 대한학도의용대가 결성되었소. 이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 대한의 운명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들끓는 애국충정으로 구국전선에 나서기 위하여 열혈 애국청년학도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것이오. 청년학도들의 애국심이 이러한데 나라에서는 그 고결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소. 하여, 우리 군에서는 학도의용병을 받아들이기 위해 각 지역별로 병력을 급파하게 되었소. 이에 따라 심중위는 근무경험이 있는 전남서남지방으로 파견결정이 내려졌소. 활동의 세부사항은 참모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아무쪼록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오." 연대장의 말이었다.
참모실로 가며 심재모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휘황한 문자들로 꾸며진 연대장의 말 자체도 전혀 실감이 가지 않았고, 더구나 연대장 같은 경력의 소유자가 그런 과장된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연대장은 바로 일본 만군 출신이었고, 그 경력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때의 경험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랑처럼 입에 올리는 위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수뇌부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만군시절부터의 관계를 강조해 자기과시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저런 것들이 장교의 칠 할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심재모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참모실 문을 열었다.
보도연맹원 소집은 해가 지기 전에 완료되었다. 그들은 경찰서를 거쳐 동척 쌀창고에 갇혔다. 창고 안에 어둠이 들어차고 있었다. 창문이라고는 없이 높게 바람구멍만 네 군데 뚫려있는 창고는 바깥보다 빨리 어두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득하게 차 있어서 더위도 한결 심했다. 남자들은 홑것인 삼베저고리마저 열어젖혔고, 여자들은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손부채를 부쳤다. 그러나 그건 더위를 면해보려는 부질없는 몸짓들일 뿐이었다. 창문이 없는데다 양철지붕이 내뿜는 열기는 창고 안을 찜통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위를 타박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어두워지기 전까지였다. 창고 안에 어둠이 켜를 이루며 쌓여가자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국도 시국인데다가 전에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워쩔라고 요리 오래 가둬두는고?" "금메, 쓰다 달다 무신 말 한마디 웂이 말이시." "워째 기분이 요상시럽덜않으요?" "글씨, 워째 맴이 좋덜 않구마." 여자들 사이에서 소곤거림이시작되었다. "요것 참 요상허시? 원제꺼정 요리 처박아두자는 것이제?" "우리가 복날 개도 아니겄고, 요런 더운 디다 몰아때레놓고 워째 찍소리가 웂어." "워째 눈치가 요상허지 않는감?" "금메말이시, 워째 냉기가 싸르르 도는 것이 영 안존디." "행에 워찌 혀뿔라는 것 아니까?" "워쩌!" 남자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말이었다. "위원장, 위원장!" 어느 남자가 소리질렀다. "워째 그러요. 나 여깄소." 문기수가 뭉기적거리며 일어섰다. "우리럴 워째 요리 가둬두고 이러요?" "나도 잘 모르겄소." "위원장이 워째 고런 것도 몰르요? 은제나 풀어줄것 겉소?"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고것도 잘 모르겄소." "워째 위원장이 몰르는 것 천지요. 행에 우리럴 워째뿔자는 것이야 아니겄제라?" "워째뿔다니! 고것이 무신 소리요?" 문기수가 화들짝 놀라며 갈라지는 소리를 질렀다. 창고 안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시절이 요리 위태위태헌디다가, 우리만 피 뽑디끼 쪼로록 몰아서 부지하세월로 가둬둔께 고런 겁이 생긴것이요." "아니요, 아녀. 자수허고 전행허기만 허먼 과거 잘못 깨끔허니 용서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평등하게 살게 혀주겄다는 것이야 나라가 헌 약조요, 나라가. 개인이 사사로이 헌 약조도 아니고 나라가 만천하에 대고 헌 약존디 워찌 식은 죽 묵디끼 헐 수가 있겄소. 고런 약조 깼다가는 나라 위신이고 신용이고 다 항꾼에 깨져뿔고, 그래서야 누가 나라럴 믿고 딸컸소. 무담씨 쓰잘디웂는 소리 혀서 사람덜 간떨어지게 맹글지 마씨요." 문기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아랫배에 힘을 넣어가며 큰소리로 말을 했다. 그건 위원장으로서 연맹원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달라붙는 공포감을 떼쳐내기 위해서였다. "그리만 되먼이야 을매나 좋겄소. 꼭 그리 돼야제라." "하먼, 나라가 헌 약존디 비문헐랍디여." "그렇겄제, 그래야 되제." "나라럴 못 믿으먼 누구럴 믿겄는가." "항, 나라야 하늘이제." 남자와 여자의 구별 없이 서로 말이 뒤섞이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얼굴들이 되었다.
권 서장은 보도연맹원 명단을 훑어내렸다. 이지숙과 무당, 둘만 빠져 있었다. 그의 매운 눈길은 전 원장의 이름에 박혀 있었다. 전 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신경만 소모될 뿐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권 서장님,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오. 이번 일은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돼선 안되는 국가적인 중대사요. 내가 보기에 권 서장님은 마음이 너무 좋다고 할까, 대가 좀 약하다고 할까, 어쨌든 좀 염려가 안되는 바 아니오." 남인태의 말이었다. "그리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일을 가능하면 경우에 맞게, 한편으로 쏠리지 않게 공평하도록 처리하자는 게 제 근무정신인데, 그러다보니 그렇게 보인 모양입니다. 저도 명색이 서장입니다. 경우에 맞지 않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단호하고 철처합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두고 보세요." 권 서장은 남인태의 주제넘음을 정면으로 받아쳐버렸다. "아 뭐,기분 나쁘게 생각할 건 없소. 그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소." 남인태는 헛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 권 서장이 남인태에게 한 말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한 말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의 마음에 든 생각 그대로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공산주의나 좌익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못이 박혀 있었다.
이지숙과 도래등 무당이 자취를 감춘 것을 안 것은 정기소집을 하고 나서였다. 형사부장이나 염상구의 말이 아니더라도 권 서장의 직감은 이지숙에게로 날아갔다. 이지숙은 세포였고, 무당은 포섭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는 그 동안 뚫린 허점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정세포의 암약을 포착하지 못한 것도 그랬고, 엉뚱하게 무당이 포섭당했다는것도 그랬고, 포섭당한 입산자의 아내가 보도연맹 가입에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랬고, 일단 한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까지 받은 고정세포가 야학의 선생으로 위장한 것이 방치된 점이 그랬고, 이지숙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세포를 부식시켰을까를 생각하면 그랬다.
허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나간 것은 다 덮는다 하더라도 이지숙이 뿌린 조직만은 캐내야 했다. 그러나, 그러자면 읍내를 발칵 뒤집어야 하는 소란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리한 전시상황 속에서 그건 말할 것 없는 긁어부스럼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자살행위였다. 이미 떠나버린 두 계엄사령관에게 책임전가가 될 일이 아니었다. 계엄하에서도 경찰의 임무는 엄연히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건을 밀봉하는 한편 그 범위를 축소시켰다. 그래서 첫 번째 조사대상에 올린 것이 서민영이었다. "말씀드린 대로 이지숙은 고정세포였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권 서장은 서민영의 취조를 직접 나섰다. "지금 뭘 묻는 거요? 이 선생의 정체를 알고 있었느냐를 묻는 거요, 아니면 나와 이 선생과의 사상적 내통 여부를 묻는 거요?" "죄송하지만, 두 가지 답니다." "둘 다 나하곤 상관이 없소." "선생님,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여자는 선생님의 야학에서 일 년이 넘게 암약해왔습니다. 선생님한테도 그 책임의 일단이 있습니다." "나는 야학을 경영하는 사람이지 경찰이나 수사관이 아니오. 어느 쪽 책임인지 한계를 분명히 하시오." 권 서장은 오히려 책임추궁을당하는 자신의 꼴에 어이가 없었다. "그 여자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건 아셨지요?" "알았지요." "그런데 왜 종적을 감췄는데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이 선생이 그냥 없어져버렸다면 사상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무슨 사고가 났나 걱정이 돼서 내가 먼저 경찰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오. 그런데 이 선생은, 난리가 났으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떠났소." 서민영의 취조는 더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서민영이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또 기독교인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보면 그 회색적인 면이 의심을 갖게 하고, 혼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다룰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현직의원 최익승을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그의 저력이었다.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꼬리를 남겨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권 서장은 그 다음에 전 원장에게 손을 뻗쳤다. "이지숙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젭니까?" 권 서장은 기습을 하고 들었다. "이지숙 선생 말인가요? 만난 일이 없는데요." 전 원장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지숙이 자취를 감출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경찰에서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전 원장은 여유있게 기습을 피했다. 지난 사건으로 수사를 당하고 재판까지 받아본 전 원장은 무조건 솔직함이 자기보호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이지숙이 자신을 찾아오긴 했지만 자신이 이지숙의 피신권유를 듣지 않은 이상 만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괜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아무 연관도 없는 그녀의 사건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재판을 받았고, 그 사건으로 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것을 다 알고 있는 처지에 이지숙이가 도주를 하면서 원장님한테 아무 연락도 안했을 리가 없는데요." "글쎄요, 경찰에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선생은 재판을 받고 나온 뒤로는 나한테 미안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한 번도 찾아온 일이 없었어요." 전 원장은 자신의 능청에 기묘한 쾌감까지 느끼며 말하고 있었다. "일 년이 넘게 한 번 아프지도 않았단 말인가요?" "그거야 젊은 나이에 예사 아닌가요? 서장님은 여기 부임하신 후에 아파서 병원 찾아오신 일 있습니까?" 전 원장은 자신의 말주변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원장님은 함께 재판을 받으면서 이지숙의 사상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까?" "나야 의사 노릇이나 제대로 해내려고 할뿐이지 원래 사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경찰 수사에서 좌익이 아니라고 한 이 선생을 의심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지요." 권 서장은 다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그도 역시 함부로 다룰 존재가 아니었다. 내통한 의심은 버릴 수 없지만 어떤 구체적인 근거 없이 수사만을 빙자해서 유치장에 가둘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민영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해서 전 원장도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이지숙의 도주는 완전히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야학부터 시작해서 수사를 본격적으로 벌일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서 쌀창고에 감금하며 전 원장은 따로 구분해 유치장에 넣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전 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는 읍내에 하나뿐인 의사였고, 신망도 두터웠다. 그의 처리문제는 두 가지 우려를 안고 있었다. 원칙대로 처리해 버리면 읍민 전체의 원성을 살 염려가 있었고, 그 혼자한테만 혜택을 주었다가는 원칙을 어긴 피해를 입을 염려가 있었다. 두 가지 다 자신의 신상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의논할 상대도 없이 권 서장은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서장님, 삼십 분 남았습니다." 형사부장이 고개를 디밀고 말했다. 권 서장은 시계를 보았다. 열시반이었다. "병력은 어찌 됐소?" "창고 앞에 집결시켰습니다." "됐소, 실시하시오." "알겄습니다." "잠깐!" 사라졌던 형사부장의 머리가 다시 나타났다. "유치장에 있는 전 원장도 끌어가시오." "알겄구만요." 커다란 창고문이 삐그덕거리는 마찰음을 어둠 속에 뿌리며 느리게 열렸다. 창고 안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시끄럿! 입 닥치고 다들 일어낫!" 살벌한 외침과 함께 전지불빛이 번쩍하며 창고 안의 어둠을 갈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일어나는 분주한 몸놀림 소리만 들렸다. 그 사이 서너 개가 더 늘어난 전지불빛들이 어지럽게 엇갈리며 사람들의 몸을 핥아대고 있었다. "아까 지시헌 대로 앞뒤로 열씩 묶어라!" 두번째의 외침이 섬뜩하게 창고 안을 울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사람들을 향해 몰아닥쳤다. "워메에, 우리럴 죽일라고 허네에!" 어떤 여자의 외침이 비명처럼 날카롭게 찢어졌다. "워떤 년이냐, 아가리럴 찢어뿌러라!" 같은 목소리의 세 번째 외침이었다. 여자의 외침을 따라 일어날 듯 싶었던 동요가 이내 스러지고 말았다. 남자든 여자든 순한 짐승들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는 사람들은 묶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 명씩 묶인 여덟 줄의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 세워졌다. 그리고 발 밑만 비추는 전짓불빛을 따라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총을 멘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지난지 오래되어 인적이라곤 없는 거리에 그들의 발소리들만 둔중하게 퍼지고 있었다.
얼마를 걷다가 행렬은 철길을 건넜다. 사람들은 말이 없는 속에서 자기들이 뱀골재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철길은 읍내 안쪽에는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칠동쪽 들녘에서 볏잎 냄새와 함께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켜켜이 쌓인 어둠은 까마귀 날개처럼 검게 장막을 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길바닥에 박힌 돌에 채여 비척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잡기도 했다. 그가 곤두박히는 것을 면한 것은 앞뒤로 묶여 있어서였다. 발소리뿐인 그들의 행렬은 비스듬하게 경사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기네가 뱀골재를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갯길을 세 굽이째인가 돌았을 때 행렬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경사가 급한 산이 시작되었다. 길을 벗어나 산을 밟는 순간 사람들은 아뜩한 현기증과 부딪쳤다. 그건 어둠보다 더 진한 죽음의 공포였고, 절망이었다. 뱀골재 골짜기가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북향음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행렬은 풀숲을 헤쳐 등성이를 넘었다. 검정고무신이며 짚신을 신은 발들은 이슬에 젖어 축축해졌고, 발길에 놀란 풀벌레들이 가느다란 울음소리들을 흘리며 어둠 속을 튀었다.
행렬은 골짜기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쥐어짜는 듯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끄럿!" 후려치듯 차고 매운 소리였다. 울음소리가 그쳤다. 여러 개의 전짓불빛은 여전히 사람들의 발 밑을 빠르게 기고 있었다.
대열은 골짜기의 약간 평평한 곳에 멈추었다. "한 줄씩 실시!" 메마른 소리가 어둠 속에서들렸다. "알겄습니다." 대답도 어둠 속에서 들렸다. 그때였다. "서장님, 서장님, 나만은 살려줘야제라. 그간에 공얼 생각혀서라도 나만은 살려줘야제라. 장 부장님, 장 부장님, 말 잠 혀줏씨요." 남자의 울부짖음이 터졌다. "어떤 새끼야!" 전짓불빛이 소리나는 쪽으로 뻗어갔다.
불빛에 드러난 것은 눈물범벅인 문기수의 얼굴이었다. "서장님, 나만은 살려줘야제라아!" 불빛 속에서 문기수가 통곡했다. "저 줄부터 실시하시오." "옛!" 대답에 이어 지시가 떨어졌다.
"전대원 들어라. 죄인덜얼 꿇어 앉혀라. 제일조, 저 줄부텀 실시한다. 끌어내라!" 그때까지 전짓불빛은 문기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열 명이 뒤돌려 한 줄로 세워졌다. 그들의 윗몸을 여러 개의 전짓 불빛들이 일제히 비추었다. "발사!" 총소리가 서로 뒤엉키며 어둠을 깨고 찢었고, 손들을 뒤로 묶인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완료했습니다." "수고들 했소. 갑시다" 권 서장은 긴숨을 소리없이 어둠 속에다 내쉬었다. 열 명씩인 그 어느 줄에서 한 명이 모자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간 것이었다. 예비검속은 보성군 각 읍면단위로 비슷비슷한 시간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 군데, 율어면에서만은 아무런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이튿날 마을마다 통곡이 물굽이를 이루며 퍼져나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장례를 치르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시체를 찾아오지 못해서 그 통곡들은 더 진하고 질기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들이 눈 부릅뜨고 오락가락하는 속에서 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갔다는 소식이 퍼졌다.
송경희는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다. 두려움에 쫓기는 마음으로 날마다 더위 속을 허덕이다보니 체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거기다가 돈을 아끼느라고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해 몸은 더욱 휘둘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걸어도 하루에 오십리 걷기가 어려웠다. 이틀 만에 발이 부르터 물집이 생겼고, 장딴지는 부어오르면 알이 뱄고, 무릎은 시큰거려 자꾸만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런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동행이 없는 길걷기의 팍팍함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쉽진 않은 일이겠지만, 좌익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생각지 않도록 노력해보시오. 달라진 시대가. 송 양은 너무 젊고, 배운 사람이오. 부친을 잃은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사적 감정만으로 세상을 보지 않도록 노력해보시오. 내가 송 양을 이렇게 강을 건네준 건 같은 고향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오. 염상진이란 사람 대신 사과하는 뜻도 있고, 송 양이 세상을 바르게 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서요." 키가 큰 김범우 선생은 어둠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싫어요, 선생님 싫어요. 부자나 지주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무조건 죽어야 하나요. 그런 좌익을 저는 죽어도 용서할 수가없어요." "알았소, 더 긴 말 할 시간이 없소, 한 가지만 말하겠는데, 혹시 『임꺽정』이란 소설을 쓴 홍명희 선생을 아시오?" 자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범우 선생은 말을 이었다. "그분은 그야말로 뼈대있는 양반에다가 지주였는데, 벌써 일정시대에 자기 농토를 소작인들한테 나눠주었고, 누구한테나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존댓말을 썼소. 먼 길 조심 해서 가시오." 김범우 선생은 돌아섰다. 그리고 강을 향하여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가 남자의 무게가 아니라 산의 무게로 자신의 가슴에 젖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속살 깊이 파고드는 남성을 받아들이며 '아아 어쩔 수 없어!' 하고 느낀 본능적 항복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부끄러움이 앞을 가로막아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다시 매달렸다가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힘으로 내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최초로 느낀 부끄러움은, 신분은 같으면서 생각은 다른 데서 오는 거리감이기도 했다. 정작 정하섭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점이었다.
송경희는 김범우와의 기억을 길동무삼아 고역스럽고 한정없는 길을 그나마 걸을 수 있었다. 김범우 선생을 그리고 손승호 선생을 되짚어 생각해보고는 했다. 그들은 좌익활동은 하지 않으면서도 분명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좌익에 동조하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진짜 좌익인데 위장을 해오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만으로 동조한다고 해도 이렇게 전쟁이 터진 판국에 그들이 좌익을 편드는 결과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 아닌가.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임꺽정』을 쓴 홍명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양반 족보도 버리고, 땅도 버리고, 상것들한테 존대를 쓰다니, 그런 얼빠진 인간때문에 김범우 선생도 손승호 선생도 본받는 것 아닌가. 인간은 과연 평등할 수 있는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피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품격이 다른데 어찌 양반과 상것들이 평등할 수 있다는 것인가. 김범우 선생은 상것인 여자와 피를 섞을 수 있고, 당장 농사를 지어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김범우 선생은 결혼을 했으니까 그만두고, 정하섭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니야... 호강하면서 공부할 수있는 것 다 걷어치우고, 잡히면 죽을 것 뻔히 알면서도 정하섭은 좌익활동을 하고 있지 않나. 김범우 선생은 어쩌고. 기껏 건너온 한강을 괴뢰군들이 드글거리는 서울을 향해 되건너가지 않았나. 그게 도대체 다 뭐야. 염상진,안창민,김범우,손승호,정하섭... 읍내에서 똑똑하다고 손꼽는 사람들이 왜 다 이 모양이야. 우익이라는 건 정말 틀려먹은 것일까. 우익전인 사고라는건 정말이지 비인간적이고 반역사적인 것일까. 아니야, 아니냐, 난 싫어. 아버지를 죽인 좌익은 싫어, 빨갱이는 싫어.
송경희는 더위 탓만이 아닌 진땀을 흘리며 그런 생각을 털어내고는 했다. 도저히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그 고통스러운 생각을 그녀는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김범우 선생을 생각하다보면 어느덧 그 생각으로 빨려들어가 있고는 했다. 하기 싫은 그 생각이라고 해서 꼭 마음만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그 생각에나마 빠져 걷다보면 한숨 나오도록 멀리 보이던 산이 가까이 다가와 있고는 했다.
송경희는 한사코 김범우와의 정사 기억만을 붙들려고 애썼다. 그 기억은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황홀하면서도 명료해 걸음걸이를 한결 가볍고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난처한 점이 있었다. 얄궂게도 그 기억은 눈을 감고 서야만 환하게 재생되었고, 그 감각의 황홀함도 살아올랐다. 그 행위 자체가 눈을 감기게 하는 것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눈을 감고 걷노라면 그때의 안개밭 같기도 한 혼미함이, 꽃밭 같기도 한 현란함이, 별밭 같기도 한 찬란함이, 파도떼 같은 격렬함이, 여름 모래밭 같은 뜨거움이 남자의 숨결과 체취와 동작에 뒤섞여 휘돌고 맴돌고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누가 성을 추하다고 했는가. 누가 성을 죄악시했는가. 성만큼 깨끗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순수한 작업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진지한 몰두가 어디 있는가. 증류수가 제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성에 몰입되었을 때의 영혼을 당할 수가 있을까. 성에 몰입되었을 때는 육체만 있지 영혼은 없다고? 바보천치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육체가 일으키는 그 온갖 미묘하고 야릇하나 감각의 맛을 느끼고 식별하는 것이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냐. 인간을 놓고 정신과 육체를 따로따로 떼서 말하려 하고, 특히 사랑을 말하면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고 아둔인가. 정신과 육체는 공존하면서 서로 자극해서 사랑을 키우는 비료 역할을 하고, 서로 충동해서 사랑을 불붙이는 연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나 그것이 좋다고 떠들거나 깨끗한 척하는 것들은 모두 성불구자가 아니면 위선자들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결혼이라는 것과는 마땅히 구분해야 하지만 사랑에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다. 그 현명하고 똑똑한 서양사람들이 어찌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랑을 느끼는 남자와의 성행위,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진실이 이 세상에 또 있을 수있을까. 사랑을 느끼는 남자의 성기가 나로 하여금 발기하는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수수께끼. 그리고 발기한 성기의 그 당당하고 굳센 모습 앞에서 허물어지고 주눅드는 마음. 마침내 그 모습만큼이나 거침없이 속살을 파고들 때 주저없이 백기를 들어올리게 되는 통쾌하고도 행복한 항복. 굴욕이나 모멸이 아닌 항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신의 존재. 그러나 신은 야속하다. 그 아름다운 성의 희열을 임신과 출산으로 갚게 하다니.
송경희는 김범우 선생과의 관계가 단 한 번뿐인 것이 아쉽고 아까웠다. 여러 기억들이 있었더라면 길을 걷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그 기억을 음미하고 또 음미해가며 눈을 감고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했고, 발걸음이 빗나가 길 옆 개울로 구르기도 했다. 그럴때면 그대로 자리잡고 앉아 다리쉼을 했다. 김범우 선생과의 관계를 생각하다보면 꼭 그 사이를 비집고 드는 얼굴이 있었다. 애인이라고 마음 정하고 자신의 처녀를 내준 최인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꼴도 보기 싫은 존재였다. 다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봐 마음이 쓰였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김범우 선생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최인석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최인석은 결국 자신과 동생 성일이를 떼놓고 떠나고 말았다. "치워라! 우리 식구도 다 못 떠날 판인데 둘씩이나 따라붙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지껄이지도 말아라." 최익승이 조카 최인석에게 내지른 고함이었다. "미안해, 경희. 큰아부지가 저러시니 난들 어쩔 수가 없잖아." 기가 죽은 최인석의 어눌한 말이었다. 그의 큰아버지가 그렇듯 냉정하게 내쳤다면 최인석은 자신과 함께 뒤에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사랑한다며 몸까지 차지했던 최인석은 자신을 버리고 큰아버지를 따라가고 말았다. 그 배신감은 당장 증오와 복수심으로 바뀌었다.
내가 네놈의 눈앞에 내 모습을 기어코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그녀는 복수심으로 이를 갈아붙였다. 그 복수심 또한 길걷기의 고역을 이겨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녀는 한발 앞세워 동생을 떠나보낸 것을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김범우 선생이 그리 쉽게 강을 건네줄 줄 알았더라면 앞세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김범우 선생을 찾아가면서 마음은 완전히 반신반의였다. 그분이 이미 서울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떠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지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동생을 먼저 보낸 후회가 날이갈수록 커지는 것은 그만큼 걷기가 힘들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뒤쫓아오던 인민군들을 직접 대면하고나자 그 생각은 부쩍 심해졌다.
적들보다 앞서서 집에까지 가려고 했던 그녀의 몸부림은 평택 근방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인민군을 보는 순간 '괴뢰군에게 잡히고 말았다'고 낙망했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절망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민간인들에게도 거의 무관심에 가깝도록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무슨 조사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젊은 여자라고 해서 희롱 같은 것을 하는 일도 없었고, 어쩌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젊은 병사들은 전혀 악의라고는 찾을수 없는 순한 웃음을 오히려 부끄러운 듯 짓고는 했다. 그런 현상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였고, 놀라움이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엿이나 참외 같은 것을 꼬박꼬박 돈을 치르고 사먹었고, 우물가에서 물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도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차렸다. 그녀는 그들의 일거일동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유심히 살피며 자신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던 적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이 차츰차츰 가셔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반복해댄 '불법남침을 감행한 괴뢰군', 그래서 포악하고 잔인할 거라는 인상이 박혀버린 군대가 아닌 그들의 말마따나 '인민해방을 위한 인민의 군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쟁과 군인하면 살인,방하,약탈,강간 같은 것이 한꾸러미에 엮어져 의식에 박혀 있는데 그들은 그런 짓을 전혀 저지르지 않고 자신을 앞질러 남쪽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의식의 혼란을 일으키며 앞서 보낸 동생을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군인인 줄 알았으면 이런 고생 하지 말고 서울에 그대로 있을 걸그랬다는 마음도 생겨났다. 그들은 억양만 다를 뿐인,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생김을 하고, 같은 예절을 갖추는 동포였고, 경우 바르고 순한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왜 방송에서는 '괴뢰군'이란 말을 수 없이 반복해서 공포감을 키우고 나쁜 인상을 갖게 했을까. 아니다,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는 생각을 하고 이러는가. 그들은 분명 공산주의의 군대다. 공산주의는 지주나 부자들을 무조건 착취계급이라고 몰아 죄인 취급하지 않던가. 그리고 바로 그 군인들이 지주나 부자들을 상대해서는 염상진처럼 포악하고 잔인하게 변할 것이다. 그들에게 모든 재산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되어 삼팔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서울에는 얼마나많던가. 염상진은 아버지를 죽였고, 이제 그들은 우리 재산을 뺏으려고 남쪽으로 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안된다, 그건 안된다. 공산주의는 어차피 나의 적이고, 내가 믿을 건 부자나 지주들을 우대해주고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군대는 다 어디로 갔는가. 적들이 나를 앞질러 가버렸으니 나는 적지에 있는 것 아닌가. 고향까지 적들이 밀고 내려가 버리면 우리 집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재산을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되어 농사를 짓고 살아야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
"쉽진 않은 일이겠지만, 좌익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해보시오." 김범우 선생도 넋빠진 사람이다. 어떻게 좌익을 좋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의식의 혼란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강가에 몰려들었던 그 많은 피난민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날이 바뀔수록 피난을 떠나는 사람의 모습은 드물어져갔다. 농부들은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평스럽게 농사일을 하고 있거나, 논두렁에 편안히 앉아 밥을 먹고 있기도 했다.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서 그들은 그렇듯 편안하고 태평스러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렇다면 그 농민들도 자신의 적이었던 것이다. 그럼 내편은 누구이고, 몇이나 되는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새로운 두려움을 느꼈다. 적들이 앞질러가버린 고향까지의 길이 끝없이 멀게만 느껴져 다리는 더 팍팍해졌다.
심재모는 광주에 닷새를 머물면서 현지경찰과 협조해서 학도병을 모았다. 말로만 자원이었을 뿐 그건 징집이었고, 각 학교마다 이미 편성되어 있었던 학도호국단을 바로 군대편제로 바꾸는 일이었다. 대학생과 고등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주 대상이었다. 학생들은 학교별로 소집을 했는데 벌써 적잖이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이유는 두 가지로 파악되었다. 첫째는 좌익사상을 가진 학생들의 잠적이었고, 둘째는 우익쪽 학생들의 고의적인 기피였다. 가까운 군단위 학생들까지 수습해서 열차편으로 여수로 보냈다. 그는 순천으로 가는 길에 보성군과 고흥군을 목표로 해서 벌교에 잠깐 들렀다. 이미 지역마다 경찰조직을 통해서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아짐씨, 아짐씨, 기시오 으쩌요!" 형사부장 장길춘이 송성일의 집으로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송성일이 문을 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안방문도 열렸다. "장 부장님, 어여 오시씨요. 무신 일로 그리 급허다요?" 송성일의 어머니가 낭자머리를 매만지며 대청마루로 나섰다. 송성일은 무거운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열사흘이 걸려 집에 도착했지만 뒤따라 오겠다던 누나의 소식은 날이 가도 감감한데다가 학도병 문제까지 겹쳐 마음에는 먹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와부렀소, 첨에 계엄사령관 혔던 심 사령관이 학도병 델꼬 갈라고 왔단 말이요. 워찌 헐란지 싸게싸게 결정봇씨요." 장길춘은 송성일과 그의 어머니를 번갈아 보며 서둘러댔다. "은제 뜬답디여?" "저 학생만 빠지고 다 모아논 것잉께, 담 기차로 뜬답디다." "아이고메, 그리 다급헌디 물으나마나 아니겄소. 우리 성일이넌 빼줘야제라." 송성일의 어머니는 말을 하며 안방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엄니, 나 그냥 학도병으로 나갈라요." 송성일의 분명한 말이었다. "머시여? 나 미쳤냐! 장 부장님이 빼주겄다는디 니 발로 쌈터로 끌려 나가겄다는 것이 무신 소리다냐!" 송성일의 어머니는 몸을 되돌려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번에 피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닝께 그렇제라. 징집은 계속헐 것이고, 괴뢰군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면 그때는 군대에 나간 것만 못허게 된다니께요." "아, 시끄럽다! 좌익놈들 손에 아부지 하나 쥑였으먼 됐제 니꺼정 또 죽일 성불르냐. 나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넌 시상웂어도 그리는 안돼야. 이 엠씨가 열질 굴을 파든, 바다 밑창에 구녕을 뚫든, 니 목심 보존 기엉코 해낼 팅께 그리 알어." "엄니, 지가 허는 말은..." "금메 시끄럽당께로 워째 자꼬 그래쌓냐. 니가 정 군대에 나갈라먼 이 엠씨 죽이고 떠나그라. 니럴 막는 것은 이 엠씨 뜻이 아니고 아부지 뜻이여, 아부지 뜻." 송성일은 입을 다물며 하늘로 먼 눈길을 보냈다. 허겁지겁 한강을 건너고, 천리길을 허덕거리며 쫓겨 내려오면서 오로지 생각한 것은 이번 전쟁에 대해서였다. 좌익이 아버지를 죽인 원한을 자신이 하판석 영감을 죽인 것으로 상쇄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전세가 자꾸만 불리해져가고 있는데 어차피 군대에 나가야 되리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며 집에 당도했었다.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을 돈을 주고 피해야 될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이, 자네 바깥에는 얼씬도 허덜 말어. 자네넌 벌교에 웂는 사람잉께." 돈다발을 몸 어딘가에 감춘 형사부장은 태연한 척 대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송성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먹물 붓을 붙여 놓은 것처럼 짙은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을 뿐이다. 갑자기 심재모를 만나게 된 권 서장은 너무나 반가워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함께 근무하는 동안 감정 한 오라기 다치지 않은 사이었는데다가, 백남식을 겪게 되면서 멀리 있는 그를 자주 생각하고는 했던 것이다. "혹시 진급을 하셨나했는데 역시 그대로시군요." 권 서장은 이 말을 피할까 생각했으나 모르는 척 넘기는 것이 오히려 정 없는 짓 같았고, 진급이 안된 이유가 그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이쪽도 알고 있음을 나타내 그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 군인이 진급과 훈장에 관심이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전 당분간 열중쉬어 해얄 겁니다. 앞으로야 죽을 기회도 많지만 진급할 기회도 많으니까 두고 봐야죠." 심재모는 구김살없이 말을 받으며 웃음지었다. "다음 기차로 떠나셔야 한다니, 일정이 그리 급하십니까?" 권 서장은 하룻밤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에서 말했다. "예, 대전이 적에게 떨어지고 정부가 대구로 이전한 상황에서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정부의 대구 이전은 전라도 지방의 포기로 보아야 합니다." 심재모는 자기네 연대의 무작정 후퇴가 정부 이전에 대비한 외곽방어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어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전라도 지방의 포기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한민국은 경상도하고 제주도밖에 더 남습니까?" 권 서장은 금방 얼굴빛이 달라질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예측에 불과한 거지만, 학도병들을 여수로 집결시켜 배로 부산 쪽으로 이동시키는 걸로 보아 전라도 지방의 포기는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전라도 지방의 방어계획이 있다면야 단기교육으로 실전투입이 가능한 학도병들을 굳이 배편으로 이동시킬 이유가 없는거지요." "상황이 그리도 급한가요. 작전권까지 가져간 미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미군이 참전을 하긴 했지만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니까 제대로 능력발휘를 못하는 상태로 봐야겠지요. 병력이나 화력 준비도 그렇고, 지리도 서툴고, 모든 게 초기단계니까요." "참 큰일이군요. 이제 우리가 믿을 건 미군밖에 없는데요." 권 서장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이었다. "김범우 선생은 어찌 됐습니까? 내려와 있습니까?" 심재모는 미군타령이 귀에 거슬려 말을 바꾸어버렸다. 군인 장교들이나 경찰 간부들이나, 오나가나 그저 미군타령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처럼 내보이는 지나친 의존성이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는 한국군의 통수권이 미군에게 넘어간 것이 근본적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내려오지않았습니다." "그래요오?" 심재모는 놀라며 윗몸을 세웠다. 으레 김범우가 내려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오지 못했으면 내려오기 어렵겠지요?" "글쎄요... 무슨일인지 모르겠군요." 심재모는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물론 손승호 선생도 안 내려왔겠지요?" 권 서장을 쳐다보았다. "손승호 선생이라니요?" 반문을 하면서 권 서장은, 손승호가 김범우와 서울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김범우가 백남식의 추궁을 일부러 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꿰어맞추었다. "두 분이 함께 하숙을 했는데, 모르셨나요?" "예, 방금 알았습니다." 그의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이 곧 나오려 했지만 권 서장은 눌러 참았다. 그는 예비검속을 용케도 피했구나. 권 서장은 그가 서울로 도망간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지난번 처형에서 그도 전 원장처럼 거북스럽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빼돌린 전 원장은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집안에 깊이 박혀 있었다. 난리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전 원장을 빼돌린 것은 그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를 죽이고서는 자신이 괴로워 살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전쟁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이 자신에게 돌아올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 참,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서울을 빠져나올 여유가 그렇게 없었을까." 심재모는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는 김범우,손승호,이학송과 함께 했던 술자리의 모습들이 떠올라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어찌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심재모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어섰다. "어디 가시게요?" 권 서장도 따라 일어났다.
"예, 좀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경찰서를 나선 심재모는 지름길을 찾아 곧장 '본정통'으로 나갔다. 책방과 대각선을 이루고 있는 순덕이네 가게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가게를 확인하자 심재모는 가슴에 묘한 느낌의 물결이 이는 것을 느꼈다. 두근거림도 아니고, 긴장감도 아니고, 여자를 놓고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은 무슨 냄새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무슨 색깔이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썩 기분이 괜찮았다. 순덕이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대할 것인가 하는 상상도 그 묘한 감정을 부추기는 한몫을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순덕 씨 집이죠?" 심재모는 큰 키를 구부리며 가게를 보고 있는 여자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한눈에 순덕이의 어머니라는 걸 알수 있었다. "근디요, 아니, 요것이 누구다요? 그전 때 대장님 아니시다요?" 순덕이의 어머니 나주댁은 심재모를 금방 알아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순덕씨 어머니신가요?" "그렇구만이라." 나주댁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심재모를 찬찬히 바라보며 미심쩍게 대답했다. "순덕 씨돌아왔습니까?" 순덕이 어머니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 심재모는 "순덕씨 집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려던 말을 직감적으로 바꾸었다. "아닌디요, 순덕이 안 왔는디요. 근디, 우리 순덕이 집 나간 것을 대장님이 워쩌크름 아신당가요?" 입 언저리에다 금방 울음이 잡힌 나주댁은 눈을 빛내면서 심재모 앞으로 다가들었다. "아니, 아직까지 안 돌아오다니... 이게 그럼..." 심재모는 굳어진 얼굴로 혼잣말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돌아와 있으리라고 믿었고, 돌아와 있어야 했다. 자신이 떠나온 뒤에 그곳은 곧바로 적지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심재모는 순덕이의 어머니를 의식하며 참담한 심정이 되고 있었다. "우리 순덕이가 워디 있는지 아시는갑는디, 워쩌크름 된 일인지 싸게 싸게 말 잠 혀보시씨요." 나주댁은 애가 타고 있었다.
심재모는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한 가지 후회가 심한 갈증처럼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몸을 합했더라면 그녀는 자신의 말을 곱게 듣고 집으로 돌아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 싸게 말 잠 혀보랑께라." "예, 순덕 씨는 저를 찾아 집을 떠난 겁니다." "머시라고라? 지가 대장님허고 워찌워찌 혀보고 잡아서라? 워메 문딩이, 쎄는 짤라도 춤언 질게 뱉을 작정혔구만. 기도 안 차시. 그려서라?" "수원 저희 집을 거쳐 단양까지 찾아왔는데..." 심재모는 어떤 책임감과 함께 그 동안의 이야기를 간추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따라 순덕이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떠오르며 슬픈 감정이 안개발로 가슴에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