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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월협 남문에 있는 촉도문화박물관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가면 그곳에 촉도문화진열관(蜀道文化陈列馆)이란 박물관이 보인다.
▶ 고촉도 전도
▶ 고촉도에 설치된 역참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먼저 삼국지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검문촉도의 역참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진 그림이 보인다. 청두에서 한중까지 오르내리며 말을 갈아타면서 공명의 북벌 전투상황을 수시로 후주 유선에 알렸을 것이고 유선은 격려의 말을 다시 보는 등 각종 소식과 명령 등이 이 역참을 오가며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청두에서 한중까지 정말 많은 역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참을 잇는 도로가 아마 가장 쉽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 검문촉도에 설치된 관문
▶ 검문촉도 주요 지점의 옛 사진
검문촉도 관문을 표시했는데 면죽관서부터 양평관까지다. 어제 보았던 검문관도 보이고 나중에 갈 백마관도 보인다. 백마관은 봉추 방통이 죽은 낙봉파에 있는 관문이다. 또한, 고촉도에 있는 주요 지점에 대한 옛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사진에서 보여주는 곳을 모두 다 가보고 싶지만 비자기간을 연장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 같다. 언제 다시 이 쓰촨에 와 저곳을 돌아 볼 수 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 검문촉도를 둘러싼 전쟁사
명월협 잔도와 이 부근의 검문촉도와 관련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사를 도표와 석각부조 그리고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 진멸파촉 석각 부조도
진나라 혜문왕이 욕심 많은 촉나라 개명왕에게 금소를 주려해도 길이 없다고 소문을 내 개명왕으로 하여금 금우도를 개척하게 해 금우도를 열자 그곳을 통해 촉나라를 멸망시킨다.
▶ 유비진병 석각 부조도
부락산에서 한중 장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이곳을 다스리던 유장이 징저우(荊州)에 있던 외부세력인 유비를 끌어들여 맞이하고 있다. 유비가 군사 방통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미엔양(綿陽)으로 들어가자 유장은 유비에게 이곳에서 홍문연과 비교되는 부성회를 베풀며 거대한 잔치를 베푼다.
▶ 제갈량 북벌 석각 부조도
▶ 강유열영 석각 부조도
강유가 검문관에서 종회와 등애가 이끄는 30만대군과 맞서 촉한을 지키고 있다.
▶ 당현종행촉 석각 부조도
안록산의 난(安史之亂)으로 인해 수도 장안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당현종 일행, 병사들은 호위를 거부하고 양귀비 일족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 양씨 일족은 모두 목이 잘리고, 양귀비 또한 목을 매어 자결하게 된다.
▶ 몽송진병 석각부조도
몽송 연합군이 금나라를 멸망시킬 당시 송군을 이끌었던 장군 맹공이 일차 양양에서 몽고군 24개 영채를 함락시키고 강릉성에서 몽고군을 대파한 후, 재차 기주를 수복, 양양을 재탈환, 그 뒤에 곧바로 사천으로 진병해 사천으로 침입해 오는 몽고군을 격퇴시킨다.
▶ 틈왕공촉 석각 부조도
명말청초에 명나라를 멸망시킨 틈왕(闖王) 이자성이 고영상이 일으킨 봉기군의 지도자가 되어 명나라 조정에서 진압군 도독으로 파견한 홍승주와 대결하나 잘 훈련된 관군과 영악한 홍승주를 당해내지 못 하고 고영상은 사로잡혀 난도질을 당해 죽자 이자성은 틈왕의 직위를 계승하여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다가 수차례 대패를 겪고 불과 10여 명의 수하를 이끌고 사천의 험준한 산으로 피신한다.
▶ 웅관실수 석각부조도
숭정3년, 미지현 18채의 가난한 자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고, 팔대왕(八大王)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그는 황릉을 불태우고, 봉건통치를 무너뜨리는 피바람속을 계속 달렸고, 이자성(李自成)과 반란군을 나누어 (하나는 동북으로 하나는 서남으로), 명나라를 철저하게 궤멸시키는데 일조했다. 장헌충은 성도에서 2년여간 존속한 농민정권인 대서국(大西國)을 건립한다. 1646년말, 청나라의 철기군이 사천북부의 조천관(朝天關)을 넘어오고, 반도인 유진충(劉進忠)의 배반을 당해, 장헌충은 서충(西充) 봉황산(鳳凰山)에서 한을 품고 일생을 마감한다.
▶ 가릉강 조운 석각 부조
가릉강 중 명월협과 같은 협곡은 물살이 강해 노를 저어서 배가 상류로 올라 갈 수 없기에 견부석이란 바위에 밧줄을 걸고 사람(견부)들이 배를 끌어 올리고 있다.
▶ 소하가 잔도 건설을 독려하는 그림
한나라 승상 소하와 관계된 이야기로 족병족식공쟁전(足兵足食供爭戰)의 일환으로 잔도 건설을 독려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유방이 항우에 의해 한중왕으로 봉해져 촉을 다스릴 때 소하는 명월협의 잔도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던 모양이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하느냐 하면,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안다. 반면 항우(項羽)는 단 한 사람, 범증(范增)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천하를 얻었고 항우는 개털이 되었다." 유방이 항우를 개털로 만든 후 천하를 얻으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 무측천이 촉도를 돌아보는 그림
광위엔이 배출한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여걸 무측천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한 일을 한 여인이다.
▶ 위항치촉도
위항치촉(韦抗治蜀)이란 그림이다. 당나라 때 위항이 촉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로 검남도 안찰사와 익주 대도독부 장사를 지낸 인물로 잔도 보수와 광위엔 시내의 가릉강변에 있는 천불애라는 석불조성을 감독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이주자사로 부임한 안진경
이번에는 유명한 서예가인 안진경이 보인다.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진사에 합격한 이후 태자 교육을 맡은 태사였다. 노군공에 봉해졌기에 안노공이라고도 불렸다. 촉의 이주자사로 일했을 때도 건학육재(建學育才)에 헌신하였기에 광원현지(廣元縣志)에 명신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 교각관 관리가 잔도를 보수하는 그림
남송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잔교를 관리했다고 한다. 교각관(橋閣官)을 관청에 두고 다리나 누각만 전문적으로 관리하도록 해 잔도 건설과 보수공사, 관리 등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청풍협 절벽에 다리를 개수한 후 교각관 이름을 석각으로 새겨놓았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시공자 표시제와 같은 것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공사나 관리감독을 철저히 했나 보다.
▶ 측백나무를 심는 그림
검주지사 이벽은 재임 기간에 취운랑에 나무 심기를 공들여 했다. 청나라 강희 때 검주지사 교발(乔钵)이 촉도고백을 취운랑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검주 남에서 랑중까지 삼백여 리나 되는 긴 길에 십만 그루나 되는 나무를 심었다 하니 측백나무 만리장성이라 해도 되겠다. 옛날 장비도 취운랑에 나무를 심었다 하니 그 나무 길은 대단한 풍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유람차가 다니는 잔도 윗 길
박물관을 나오니 11시가 넘었다. 랑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서둘러 북문으로 돌아가 조천에서 버스를 타고 광위엔으로 가야 한다. 남문까지 올 땐 잔도를 따라 왔으니 북문으로 다시 돌아 갈 땐 유람차가 다니는 잔도 위 넓은 길로 간다. 유람차를 운행하기 위해 새로 만든 도로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돈만 내면 누구나 유람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길은 벼랑을 깎아내고 파내어 건설한 도로로 도로 위 한쪽이 바위로 지붕처럼 덮여 있어 비 올 때나 지진 등으로 낙석을 피하기는 좋겠지만 이 도로를 만들려고 고생한 이들의 땀방울 또한 잔도를 만든 이들의 땀방울만큼 많이 흘렸을 난공사였을 것이다.
▶ 한수잔도 석각 부조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여 돌아오다 보니 제갈량이 사륜거를 타고 북벌에 나서는 석각부조와 한나라 때 잔도를 수리하는 모습의 한수잔도(汉修栈道) 석각부조가 눈에 띈다. 한수잔도는『진(秦)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206년, 초패왕항우(項羽)에게 밀려 파촉으로 쫒겨 나 한중왕에 봉해진 유방(劉邦)은 항우의 거점인 관중(關中)으로 진군할 의도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 친링(秦嶺)산맥의 바오허(褒河) 강가의 깎아지른 절벽에 놓인 잔도(棧道)를 불태우고 한중으로 들어가 절치부심하던 유방에게 한신(韓信)은 동쪽으로 진격할 계책을 내놓는다. 먼저 번쾌에게 군사 1만을 주고 잔도를 3개월 안에 보수하라고 명령한 이른바 “낮에 잔도를 수리하다”라는 명수잔도(明修棧道)다.』를 축약적으로 보여 주는 석각이다. 물론, 유방의 움직임을 포착한 항우의 부하 옹왕(雍王) 장한(章邯)이 현장을 살폈지만 1만의 군사로는 3년이 걸려도 복원이 불가능해 보이자 장한은 마음을 놓는다. 한신의 노림수가 적중하자 병사를 이끌고 친링산맥을 우회해 전략적 요충지인 진창(陳倉)을 기습해 점령한다. 중국 병법의 교과서 격인 ‘36계’의 여덟 번째 계책인 “밤에 진창을 건너다”라는 암도진창(暗渡陳倉)의 고사로 보통 ‘명수잔도’와 함께 쓰인다.
▶ 명월석
명월석(明月石)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이 안내판에는 『강물 중에는 커다란 하나의 돌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돌 위에는 밤에도 달처럼 빛을 낼 수 있는 보석이 있다고 하여 명월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이곳을 지나가던 라마승이 법력을 이용하여 보석을 훔쳐가 지금은 보석은 없어졌지만 명월석 위에는 아직도 보석이 있었던 깊은 홈이 파져 있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강물 쪽을 바라보니 황톳빛 강물이 흐르는 강에 조개를 엎어 놓은 듯한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 등에는 밤에도 빛을 발했다는 보석이 있던 자리인 듯한 홈이 파여 있다.
▶ 절볃에 새겨진 촉도난
절벽 위를 바라보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 면에 촉도난이라는 글이 보인다. 중원에서 촉에 이르는 길은 정말 험한 길이라 노래한 이백의 시는 요 며칠 너무 자주 접하지만 적혀 있는 곳마다 정말 험한 곳이라 공감이 간다.
▶ 진혜왕멸촉 석각 부조
진혜왕멸촉(秦惠王灭蜀)이란 석각 부조도 보인다. 진나라 혜문왕은 늘 촉이 마음에 들어 했지만, 워낙 촉으로 들어가는 길이 험하고 어려워 망설이다 촉나라 개명왕이 무척 욕심이 많은 사람임을 알고 “진나라에 금똥 싸는 금소가 있어 촉나라 개명왕에게 선물하려고 하나 촉나라로 가는 길이 워낙 험해 소를 데려갈 수 없다”고 소문을 내자 그 이야기를 들은 개명왕은 다섯 명의 장정(오정:五丁)에게 명령하여 명월협이 포함된 길을 내게 하는데 열심히 고생하며 길을 만들어 촉에서 장안에 이르는 길이 완성되자 그 다음 날 진나라 혜문왕은 군사를 몰아 촉이 고생하며 닦은 금우도를 통해 촉의 왕궁에 밀어닥쳐 바로 촉나라를 삼켜버린다는 이야기를 부조로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어리석은 탐욕은 바로 나라 말아먹는 지름길이란 이야기다.
▶ 오정개도상(五丁開道像)
그 위 절벽에는 절벽 바위를 깎아 조각한 오정개도상(五丁開道像)이 보인다. 다섯 장사가 길을 여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한 사람은 출타 중인지 안 보이고 바위를 들어내고 옮기고, 정으로 바위를 깎아 길을 내고 있는 근육 덩어리인 네 명의 장사들의 모습에서 남자의 힘이 느껴진다.
▶ 명월잔각
절벽 위를 바라보니 명월협 잔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종유석이 내려 보고 있다. 명월잔각이란 정자가 앞에 보인다. 낙석과 유수를 방지하고자 지붕을 추가로 만들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공중에 두둥실 떠있는 누각처럼 보이기에 "비각(飛閣)" 또는 "운잔(雲棧)"이라고도 부른다. 얼마 전 이곳에서 삼국연의 드라마 촬영이 있었고 바로 화소잔도(火燒棧道)의 장면이 바로 여기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런 곳이라면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 노호취
유람차도를 따라 북문 쪽으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걷다보니 마치 호랑이 입으로 보인다고 해 노호취(老虎嘴)라고 부르는 곳이 보인다. 이 도로 건설시 제일 난공사로 1936년 6월에 건설됐다고 하는 이곳은 호랑이 이빨인지 몰라도 위쪽의 암벽이 무너질까봐 석주기둥을 남겨 두었다.
▶ 명월협시사장랑에 새겨진 글들
산모퉁이를 돌자 이곳을 다녀간 유명 인사들이 남긴 시와 글을 바위나 비석에 새긴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한문 실력도 부족하지만 광위엔으로 돌아가 랑중 가는 버스를 타야하는 나에겐 이 시나 글을 읽어 볼 여유가 없어 사진만 대충 찍고 발길을 서둔다.
▶ 명월주사
명월주사(明月酒肆)라고 부르는 주막에 도착한다. 옛날에 술과 음식을 팔던 주막으로 행인과 말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만든 주막이인데 숙박도 가능했을 것이다.
▶ 중국교통역사박물관-명월협
그렇게 서둘다보니 어느덧 명월협 북문 광장에 도착한다. 명월협 입구 전시관에는 명월잔도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중국 교통사박물관으로 부르는 곳이 바로 명월협이라고 하는데 후세에 만든 도로지만 왼쪽 위로부터 역도가 보이고 그 아래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관광차 통로인 공로가 보며 그 아래 원래 오래된 명월협 잔도의 옛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바오지와 청두를 오가는 아주 험한 길을 달리는 철로가 보이고 그 아래가 바로 견부도라고 옛날 뱃사람이 배를 끌고 오르내리던 길이다. 여기서 보이는 철로는 1956년 바오지에서 청두까지 연결된 철로로 전체 길이 668.2km, 300여 개의 터널, 다리만 천여 개며 특히 바오지에서 광위엔까지는 터널이 270여 개와 다리가 620여 개로 촉도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한지 알 수 있다.
▶ 후출사표
명월협 북문을 나오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한참을 걸어 나오다 그 잔도가 눈에 밟혀 또 돌아보는데 정말 행복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명월협 북문에서 조천 버스터미널까지 또 걷는다. 급한 마음에 버스를 타려고 물어보니 방금 떠났는데 30분 쯤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해 걷는다. 12시 10분 버스가 출발해(1人/9.5元) 35분 정도 걸려 광위엔에 도착한다.
광위엔에 도착해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맡겼던 짐을 찾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 후 장거리버스터미널로 간다. 새벽에 랑중 가는 13시 30분 버스표를 예매하려다 명월협에서 시간 맞춰 돌아오지 못할까봐 예매하지 않았는데 13시가 넘어서도 버스표를 살 수 있어 다행이다.(1人/58元) 정말 발에 땀이 날 정도로 바쁘게 돌아 본 명월협이었지만 옛 잔도가 있었던 길을 걸었다는 행복감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첫댓글 중국어반 남봉희(두곡)입니다.김연옥강사와 같이 배우기도 하고 실버 음식도 만들어 먹던 기억이 새로워 지네요.
오늘도 중국 광야를 삼국지의 기록을 더듬어 다니시는데 감탄하지 않을수 없소이다.
화이팅! 힘내세요. 자주 들리 겠습니다. 안녕. 건투를 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