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다음 시간의 강의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린 남학생 하나, 여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누구지? 무슨 일이야?"
나의 물음에 둘은 나의 학과의 금년 신입생이라고 답한 뒤에 각자의 이름을 댔다. 바로 열흘 전에 대학의 문을 들어온 애송이들. 그런데 그 중 여학생의 얼굴이 애송이답지 않게 유난히 반들거렸다.
의자에 마주앉아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는 사이에 나는 그 여학생의 표정을 통해서, 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하고 깜찍하고 자신만만한 여자 대학 1학년생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에 갓 들어온 고등학생의 앳된 티가 없었다.
고등학교 생활의 어려웠던 일에 위로와 입학축하의 말끝에, 으레 하는 말로 물었다.
"대학에 들어온 기분이 어때?"
그렇게 묻고 여학생과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서슴없이 뱉어져 나온 같은 답변에 찔끔 놀랐다.
"시큰둥해요. 배울 것도 없구요."
열여덟 살의 두 남녀는 아주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라는 듯이, 정년이 가까운 노교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뭐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되묻듯이,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뭔가 두려운 것을 보았을 때처럼 겁이 나기도 하고, 추한 것을 목격했을 때처럼 역겹기도 했다. 가벼운 분노같은 감정으로 이마가 찌푸려진 것을 스스로 느낄 수가 있었다.
두 학생의 당돌한 얼굴을 잠시 동안 번갈아 바라보면서 마음의 파동을 가라 앉힌 나는, 이 아이들에게는 겉치레말은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너희들이 나와 이야기하겠다고 찾아왔으니 내 똑바로 말하겠다. 너희들은 철이 들기도 전에 벌써 교만부터 배웠구나. 대학에서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니? 대학문을 들어온 지 며칠이 됐니? 이제 꼭 열흘이야. 열흘 동안 대학문을 들락거리고 벌써 배울 것이 없다고?"
그래도 여학생의 눈알은 도전하듯이 나의 눈알을 노려보고 있었다. 섣불리 자기 머리에 도취된 아이들에게서 흔히 발견하는 그런 교만하고 방자한 태도였다.
나는 차라리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 어린 자칭 '수재'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대화로 깨우쳐야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 너희들, 입학하고 나서 오늘까지 대학의 중앙도서관에 가본 일 있니? "
가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물었다. 두 학생은 안 가보았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로 했다.
" 내 방에서 나가는 길에 중앙도서관으로 가 보아라. 너희들은 그곳에서 수십만 권의 책을 보게 될 것이다', 고등학교의 도서실과는 다르다. 그곳에는 인류가 수십만 년 간을 진화,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창조하고 축적한 동서양의 지식과 정보가 가득 차 있다.
그것조차도 전인류의 지식의 몇천분의 일밖에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천재도 그 앞에서는 압도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수재도 그 앞에서는 자기가 얼마나 왜소하고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것이다.
또 교만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히 겸손해지거나 겸손해야 할 필요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말을 하면서 살피니 여태까지 방자했던 눈매들이 부드러워진 성싶었다. 열심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너희들은 아까 대학 1학년생의 생활이 시큰둥하다고 말했지? 배울 것도 없다고 했지? 그러면 종로서적엘 가 보아라. 교보문고엘 가 보아라. 거기에 진열된 책의 제목들을 너희가 가진 지식으로 살펴보고 나서, 아직도 '배울 것이 없는지'를 나에게 말해 달라. 너희는 자기의 무지를 깨달을 것이다. "
조금 전까지 그토록 패기만만했던 여학생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서 떨어져 우리 사이에 놓인 낮은 탁자 위에 멈춰 있었다. 입을 꼭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만큼 깨달음도 빠른가 싶었다. 그래서 대학의 교육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 너희들이 여태까지 배운 공부는 국정교과서에 의한 규격화 공부다. 대학에는 국가권력의 강제에 의한 교과서가 없다. 학과에 따라서 조금은 다르지만 원칙으로는 인류의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서 교수와 학생이 자유롭게 골라서 읽고 연구하는 것이다. 학문, 연구, 사상의 자유가 거기에 있다.
너희들은 오랜 억압적 교육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상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강제와 획일과 억압에 길들여진 머리는 깊은 물의 중압에서 압력없는 표면에 나왔을 때처럼 어지러운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부자유스러울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유를 모르는 정신에게는 '자유라는 형벌'이 된다. 이제부터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 책을 읽어라. 인간이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일 수가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희열'이다. "
그들은 저윽이 감동한 듯 보였다.
나는 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어디서 왔는가를 그들에게 깨우쳐 주어야 할 도의적 책임을 느졌다. 그래서 말을 이었다.
" 이토록 생명같이 귀중한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종교의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준 은혜도, 국가권력이 하사한 선물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 대학에 들어온 너희들의 선배가 자유의 생명을 말살하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대항해서 수없이 많은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리고,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신음한 결과로 획득한 고귀한 열매다.
인간의 자유와 공민의 권리를 교육과 법률로써 말살하려 했던 군사독재체제와 그 광신적 반공주의에 맞서서 싸운 선배들에게 너희들은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그 열매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빼앗기면서 싸웠던 것이다.
알겠니? 무지한 사람은 자유일 수 없어. 너희들은 젊다.
학교 공부와 교외의 활동과 뜨거운 사랑을 하면서도 적어도 한 달에 열 권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시큰둥할 시간이 어디 있으며,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어떻계 할 수 있겠느냐?"
두 학생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 잘 알았습니다. 저희 생각이 잘못이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마지막 말을 해주었다.
" 대학은 고등학교처럼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스스로 찾아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책을 읽어라."
두 학생은 들어을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나는 공손히 머리숙이고 연구실을 나가는 그들의 됫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