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길 해설자료
1))농성
지금은 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곳이 백랑ㅂ2ㅜ곡일 가능성이 있다. 백랑부곡(白浪部曲)은 일부에서 비전동이나 합정동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창내리 일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백랑부곡에 대한 기사가 여지도서에 나온다. 여지도서 고적부에 白浪部曲 載在輿志 今無可考而 縣西三里 許有土城 疑或指此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해석하면 백랑부곡은 여지에 실려 있으나 지금은 그것을 고증할 수 없다. 현 서쪽 3리에 토성이 있는데 이것을 말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하여 농성이 백랑부곡민의 집단거주지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농성은 무엇으로 쓰인 것인지 정확치는 않다. 추측컨대 말을 키우던 말목장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평택이 말목장이 많이 있고 중국에서 뱃길이 가장 빠른 곳이니 중국에서 수입한 말들을 임시로 먹이던 곳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삼국시기에 쌓았던 것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과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이나 임란 때에도 피난지로 사용했을 거라는 설이 확정적이나 임팔급이 고려말에 들어오면서 임팔급의 후손들이 거주한 공간이라는 평택 임씨네의 주장도 강력하다. 임명직 도지사 마지막이 임창열씨 였던걸로 기억 하는데 이양반이 평택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라고 해서 이 농성을 평택임씨의 세출지로 확인하고 대대적으로 복구 복원 사업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고려사 어디에도 입팔급에대한 언급은 없다.
이 지역 사람으로 고려말의 임견미(林堅味)를 들 수 있다. 공민왕초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에 등용된 후 승승장구하여 문하시중에 올랐다. 당시 혼란한 가운데 관리들이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중 임견미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수청목(水靑木)으로 농민들을 두들겨 패서 농민들이 문서를 내놓고 땅을 포기하도록 했다. 그래서 그를 두고 수청목공문이라 일렀다. 고려사절요의 한 대목을 옮기면 “우가 화원에서 말을 조련하다가 말하기를 물푸레나무 공문을 가져오라. 내가 이 말을 길들이겠다.”하였다. 이는 임견미의 행위를 비꼬은 것이다. 그가 평택현의 땅도 그렇게 빼앗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 후 이인임·지윤(池奫)·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전횡을 일삼다가 1388년 최영(崔瑩)·이성계에게 살해되었다. 우왕은 전국에 알려 빼앗긴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조치했다.
2)곤지나루
곤지나루는 지금 미군기지에 포함되어 흔적도 없다. 평택현에서 수원부로 나가는 나루엿다. 곤지머리는 나루보다 아래족의 안성천으로 튀어나간 곳을 말한다. 여기엔 기우단이 있었다고 한다. 대추리가 폐동되기 직전 마지막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수로교통과 육로교통의 편리성은 상업의 중심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외세의 침입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산만을 흘러들어온 중국배들이 곤지나루에 닿았다는 것은 임팔급의 세력형성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곤지나루의 곤지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 원래 대추리는 곤지였다고 한다. 지금 미군부대 깊숙하게 자리했던 곤지나루는 둔포에서 올라와 중국인들이 쉬어갔다는 서정자를 지나 곤지나루에 닿아 수원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물론 또 한 길은 서정자에서 길마재를 넘어 관아를 통해 군물진을 건너 진위로 향했다. 곤지는 우리말로는 땅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곤지(昆支)가 있으면 건지(乾支)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건지는 강 건너 송탄 독곡동에 있다. 그렇다면 하늘메 와 땅메가 행정구역을 달리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
하나 더 추정해보면 백제 개로왕이 아우 곤지를 일본(야마토)으로 볼모를 보낸다. 여기서 곤지는 ‘크다’는 뜻의 ‘곤(昆)’과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마한어인 ‘지(支)’로 이뤄졌다. 따라서 ‘昆支’는 ‘큰 우두머리’ 즉 ‘대왕(大王)’을 가리킨다. 그랬던 곤지가 급거 귀국한다. 장수왕의 남벌(475)때문이었다. 이때 곤지왕이 야마토군과 상륙한곳이 곤지나루라 하면 상상이 너무 과한 것인가 모르겠다.
3)도두리 벌판
평택현의 땅은 자연환경적으로 소출이 적은 땅이다. 그러나 권세가들의 수탈은 많앗다. 고려말의 임견미등이 그예다. 조선을 건국하자 세금을 많이 걷기위해 평택의 당들은 요동을 친다. 세종연간에 사헌부는 예조참판 이명덕을 파면하라고 요구한다. 평택에 과도한 농지를 소유하고 농민을 갈취했다는 이유다. 문하부사 양촌 권근 또한 엄청난 해택을 차지해서 문재가 되었다. 성종때 영산부원군 김수온 또한 절수(折受)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 외에도 중종때 봉성군이 평택 굴포땅을 차지하려고 송사를 벌여 말썽이 있었고 광해군 때 신용휴라는 평택 현감은 땅관련 편의를 봐주고 인사청탁을 해 물의를 빚었다.
4)신대, 도두리 토지투쟁과 대추리 투쟁
신대 도두리 토지투쟁은 80년 민주화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대양학원(세종대)가 해방과 더불어 차지한 적산을 바닷물이 들어와 못쓰게 되자 정부가 피남민들을 정착시켜 옥톨르 일궛다. 그후 대양학원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분쟁은 시작 됐다. 마을사람들은 대양학원이라는 권력에 맛서 매일 전투를 치러내야 햇다. 분쟁은 대추리 도두리 미군기지투쟁의 영향으로 종결되었다.
미군기지 확장으로 마을이 송두리째 수용된 대추리 · 도두리 주민들의 저항은 2003년 5월 10일 용산주한미군사령부 상경집회를 시작으로 2007년 3월24일 935일간의 촛불집회를 마칠 때까지 4년간 완강하게 펼쳐졌다. 2003년 5월 10일 상경집회는 4월29일 주한미군이 미2사단 이전 부지로 팽성읍 일대 토지를 요구하면서 마을이 수용될 처지에 놓인 주민들의 항의였다.
이들은 1942년 일본군, 1952년 미군의 기지조성 및 확장으로 이미 두 차례나 정든 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주민들이다. 같은 해 7월 28일에는 미군기지확장반대팽성주민대책원회가 대추리 · 도두리 주민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어 조직적인 반대활동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2004년 9월 1일 평택대학교에서 주한미군기지이전에 따른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 공청회를 저지하다 김지태 위원장 등이 경찰에 연행 되자 이날 경찰서 앞에서 첫 촛불집회를 개최한 뒤 2007년 3월 24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을 들었다.
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평택시민과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여러 시민사회단체, 전국 각지에서 지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5월 4일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로 진압에 나선 경찰에 대추분교를 진압당한 이후 몇 차례 주민-정부간 대화 끝에 2007년 2월13일 이주하기로 합의를 했다.
5) 망해산봉수
야구장 자리라고 한다. 남쪽 음봉 연암산에서 불을 받아 포승 홰대기로 보내는 5봉수로의 간봉이다. 아쉽게도 미군기지공사대 산을 떼어냈다고 한다.
6) 하양창 경양창
고려시대 하양창을 조선에 와서 경양창으로 고쳐불렀다. 일찍이 타이포(打伊浦) 나중에 '사섭포(使北浦)'로 불리다가, 아주(牙州 충남 아산) 하양창(河倉)(충청도 서북부, 경기도 남서부의 세곡을 모아 개경으로 실어가던 조창)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만을 모아 한양으로 실어가는 경양창(계양의 별칭)이라 불리웠다. 하양창(河陽倉) 지역은 조창이 설치되기 전부터 인근지방의 세곡을 운송하기 위한 기지였다.
고려는 949년경 남방 각도의 수군조직에 12조창(遭倉)을 설치하였다. (본래 13조창이었다가 황해도의 조읍포창은 폐창함) 당시 세곡을 남·서해안 해로와 남한강 및 북한강의 수로를 통하여 예성강으로 들여와 개경으로 운반했는데, 정종 때 세곡의 운송을 위하여 적재량 1,000석인 초마선(哨馬船) 6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조에는 과적을 방지하기 위해 500석 이상을 싣지 않도록 하였다.) 창고에는 해운판관을 두어 조운업무를 주관했고, 이들은 감무·진장 등과 같은 지방관의 대우로 매년 쌀 20석의 녹봉을 받았다. 판관 밑에 색전(色典)이라고 불리는 실무를 맡은 향리가 있었다. 색전은 세곡을 조창에 거두어 들여 정해진 시기에 세곡을 다시 조선에 실어 운송하여 경창에 납입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밖에 조창에는 조창을 경비하는 사람, 초공(精工 : 선장)·수수(水手 : 사공) 등 조선(船- 조세 운반선)을 부리는 사람 등이 거주했다.조창의 기능은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이었다. 지금은 창샘이라는 우물과 배가닿았던 곳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