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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9장 18-34절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가?” 그러나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답변은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신 방법 그대로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사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으며, 그 말씀에 대한 맹인의 순종이 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은 순종까지 이끌어내는 그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창조의 역사와 같습니다. 있으라 하매 있게 되는 그런 역사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때 그들이 납득할 수 있었는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묻습니다. “너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셨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바리새인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로 있던 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했는데,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실상은 영적으로 맹인으로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빛에 대하여 묻기 위해 누구에게로 갔는가? 어둠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 말은 저들도 그만큼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논쟁이 있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 것으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죄인으로서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런 논쟁으로 인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리스도가 되심에 대하여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흐려지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인으로서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묻히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았을 때 다시금 눈을 뜬 사람에게 재차 묻게 됩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여기에 대해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논쟁을 통해서는 점점 그가 죄인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모든 바리새인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저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그리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에서는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사람의 고백은 무엇인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 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그가 본래 맹인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기까지 하는데, 18절과 19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고 묻습니다. 일단 바리새인에서 주어가 유대인들로 바뀌어 표현되고 있는데, 바리새인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8절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13절 바리새인에게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바리새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자들도 거기에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를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맹인으로 있다가 눈 뜬 자의 고백, 즉 예수가 선지자라는 말로 인하여 무엇까지 의심하는가 하면 그의 맹인 됨까지 의심합니다. 그래서 18절에서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하여 믿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위해서 그의 능력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 나타난 그런 역사도 부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하고자 한다고 해서 부정할 수 있는 문제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진리, 그런 사실에 대해서도 거짓 것으로 바꿔 버립니다. 마치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처럼(롬1:23)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심지어 고린도후서 4장 3절과 4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끝까지 가리었다는 것은 결국 그가 망하는 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을 주관하는 자가 누구냐? 이 세상의 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즉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엡2:2). 바로 그들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이런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이 저들에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들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사실성이 저들에게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저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다는 부모를 불러 묻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너희가 말하는 맹인으로 났다고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여기에 대해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자의 부모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간단히 말하면 맹인으로 난 것은 사실이라는 것과 그런 그가 볼 수 있게 된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와 관련해서 부모가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맹인으로 있던 아들을 고치신 것을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를 모른다고 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아들을 고쳤다는 것을 몰랐는가? 사실 부모의 마음이란 내 자식이 부모보다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들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있다고 할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 용하다고 하는 의원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맹인 된 아들이 나을 수 있는 희망은 없다고 자포자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눈을 뜬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뜨게 되었는지, 누가 아들의 눈을 뜨게 했는지 부모라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모든 것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의 눈을 뜨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22절을 통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2절의 내용 때문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여기서 우리는 부모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맹인으로 있다가 눈 뜬 자는 선지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라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가고자 하지만 맹인으로 있다가 눈 뜬 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고백하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떠해야 합니까? 자신의 아들의 눈을 뜨게 만든 분,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라 이미 유대 사회 안에서는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도 맹인 되었던 자의 부모는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칼빈은 이 일에 잠잠함으로 그들의 배은망덕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올랐어야만 하는데, 그들은 공포에 질려 하나님의 은혜를 묻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 가운데 아홉 번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는 말씀입니다. 이때 거짓은 참된 것과 반대되는 것만이 아니라 참된 것을 흐리게 만들 때도 거짓입니다. 지금 맹인 되었던 자의 부모는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거짓만 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것을 말해야 할 때 거짓을 말하는 것만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거짓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배은망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짓으로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죄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본문 22절에서 출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방인처럼 여겨 교회 출석을 금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로 보자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인데,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도록 하여 결국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출교입니다.
이런 출교가 이 시대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가 말씀과 성례, 권징이라고 할 때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있다면, 그리고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재정하신 그대로 순수하게 거행되고 있다면, 죄를 벌하는 교회의 권징 역시 실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배도자들 혹은 주의 율법을 멸시하는 자들 등에 대하여 징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의 마지막 단계가 출교입니다.
그러나 이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출교조차, 교회 출석을 금함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조차 그가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그러나 이런 권징에 대하여 지금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들의 무리에서 쫓아내겠다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권징을 시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시행해야 하는데, 그들은 말씀과 무관하게 권징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본래부터 말씀에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어떻게 말씀에 근거한 권징이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시행되어 왔습니다.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말씀과 무관하게 권징을 행하는 일들이 교회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한때 교회의 권세가 세상 위에 있을 정도로 크기도 했는데, 이때 말씀에 근거한 권징을 행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씀과 무관한 권징은 자신이 참 교회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벨직 신앙고백 제29장에서는 참된 교회의 표지로 말씀과 성례와 권징 세 가지를 말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순수하신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배격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도록 합니다. 즉 성례와 권징도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가,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배격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출교 결의는 자신들이 참 교회임을 부정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권징을 남용함으로 공포심을 조장하지만 거짓 교회로부터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거기로부터 출교를 당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하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마5:10).
이런 점에서 교회사 안에서 개신교를 가톨릭에서 나온 부류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판단입니다. 개신교는 한번도 가톨릭, 다시 말해 보편 교회로부터 나온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다스림 가운데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교회를 거짓된 교회라 정죄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정죄가 교회가 거짓 교회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모는 출교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참된 가르침,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로 오시면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22절에 대한 연약함은 결국 누구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말을 한다면 거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함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앞에 거짓은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수를 힘으로 삼습니다. 많다는 것이 그들의 힘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 어떤 노회 안에 보면 교인 수가 많은 교회 혹은 목사의 말이 곧 힘인 것처럼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아도 거기에 거짓이 있다면 참된 것 앞에서는 설 수 없습니다. 혹 다수의 힘으로 거짓을 참이라고 하는 시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거짓은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것 앞에 거짓은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수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혹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를 외치고 나만 홀로 주의 편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는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자세가 사도들에게 있었던 것 아닙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19-20)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오늘 본문 24절 이하는 다시금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 확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24절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말합니다. 이미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 확인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로 있던 유대인들 안에서는 이미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한 상태이기 때문에 흐지부지하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맹인이었던 사람들 통해 올무가 될 수 있는 것을 억지로라도 끄집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를 다시 부른 것입니다.
이때 저들이 한 말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이어 두 번째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예수라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입장을 따라 예수라는 사람을 죄인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지금 유대인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말은 허울 좋은 말일 뿐입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는 진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즉 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할 때 그 말 자체는 진심일 수 있지만, 진리에 합당한 진심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마음은 진심이지만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진심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판단합니까? 이 사람은 죄인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진리는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사람이 되셨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중보자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 취급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와 상관없는 진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영광은 진리와 함께, 진리 안에서, 진리와 더불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채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양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24절은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협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압박 속에서도 맹인이었던 사람은 매우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25절을 보시면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들 입장에서는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가 죄인임을 인정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지만 가시 같은 예수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맹인으로 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로 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죄인인지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맹인으로 있었던 이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는데, 그가 죄인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자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자기들 뜻대로 답변이 오지 않자 다시금 묻습니다. 26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지금 유대인 입장에서는 뭔가 꼬투리를 잡을만한 것이 있을까, 올무에 걸리게 할 만한 것이 있을까 하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자로부터 듣게 되는 말은 이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미 대답한 바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복되는 말이라 할지라도 듣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인 되었던 자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해서 저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마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이 말은 반어법으로 쓰인 것입니다. 동일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고 내 대답 역시 다르지 않는데,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어서 질문하는 것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왜 계속해서 반복해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투의 대답입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맹인이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이미 결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고 할 때 자신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결심한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저들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8절과 29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뜨게 된 너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결코 그의 제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임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기록된 말씀들을 보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백성에게 전해진 약속들, 그리고 예언들, 제사들, 할례와 유월절 등 많은 부분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히려 예수님과 모세가 대립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이런 오류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아가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알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말씀하신 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말씀하셨다면 그의 모든 말씀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하면 율법을 떠올리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 외에는 선포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도 생명을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들의 말은 자신들의 무지만 드러낼 뿐입니다. 자신들에 대하여 모세의 제자라 하지만 사실은 모세가 한 말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맹인이었다가 보게 된 자는 굉장히 담대한 말을 합니다. 30절에서 33절입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지금 맹인이었던 자신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내 눈을 뜨게 만드셨는데,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신데, 맹인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이 일을 베푼 예수님은 경건하신 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분이신가 할 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또한 기적의 역사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인가 할 때도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 역사 가운데도 보면 열 가지 재앙 중 앞에 몇 가지 재앙과 관련해서는 애굽의 술사들도 행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해서 죄인의 죄악됨에 대해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이 긍휼을 구할 때 들어주십니다. 기적 또한 애굽의 술사들의 역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악한 마귀가 똑같이 다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일 뿐입니다. 마땅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첫 번째 재앙인 물이 피가 되는 역사,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가 올라오도록 하는 역사는 애굽의 술사들도 행했지만, 세 번째 티끌이 이가 되게 하는 역사부터는 애굽의 술사들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바가 있지만,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맹인이었던 자의 이 말들은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일반적인 이해를 따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뜨게 하신 역사와 관련해서는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즉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 속에서 맹인이었던 자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결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너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득력 있는 말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할 뿐입니다. 34절을 보시면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맹인으로 있다가 눈 뜬 자의 고백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정도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이런 고백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인으로 있었던 자는 그의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서서히 뜨고 있는 상태에 있다면, 지금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눈은 조금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함에 막혀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자를 나무랄 뿐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군가?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그 외 여러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보는 자로, 듣는 자로 있게 하셨다면 주의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뿐만 아니라 주의 것으로만 채워 주의 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힘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라는 힘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세상의 힘 앞에, 또 다수라는 힘 앞에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수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영광된 것입니다. 영광된 것이기에 그들이 쫓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쪽에서 그들이 있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요셉의 예처럼 종살이를 할 수 있고, 감옥살이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우리가 가진 신앙으로 말미암아 외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지만 그 길이 형통의 길임을 확신하면서 주와 함께 동행 하면서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맹인이었다가 눈 뜬 자의 길이 바로 이런 길이었습니다. 예수를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고백을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시 교회로부터 출교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는 곧 죄인이라고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협박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아는 자로서 다수라는 힘 앞에 자신의 신앙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길을 길어가야 할 자임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