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수승대에 도착했다 무주리조트에서 소백산맥을 통과해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면 40분 가량 걸린다
처음에 캠핑객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목재문화체험관부터 탐방을 했다
거창 수승대는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로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넓은 화강암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이다.
이곳은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와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2008년에 명승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수승대는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관계로,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어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원학동은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알려진 ‘안의삼동’ 중의 하나다. 안의(安義)는 오늘날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소백산맥 줄기의 동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은 매우 험준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그늘과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원학동은 위천을 따라 월성계곡의 아래 지역에 위치한 동천이다.
조선시대에 동은 오늘날과 같은 행정지명이 아니라 동천을 의미하는 글자로 맑은 계류가 흐르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경치가 좋은 계곡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원학동천의 중심에 바로 수승대가 자리하고 있다.
수승대의 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이루면서 흐르는 물길이 조형해놓은 비경이다.
산책을 하며 출렁다리도 건널 수 있는 줄 알았더니 아직 공사중이란다 그래서 다시 거슬러 내려와 거북바위 주변 탐방을 했다
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바위(龜淵岩)가 중심이다.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 하는데,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m2에 이른다. 구연대라는 명칭은 마치 바위가 계류에 떠 있는 거북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비록 키는 작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노송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수승대의 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모양의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주암 위에는 오목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장주갑(藏酒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막걸리 한 말이 들어가는데 일정한 때에 시험을 보아 합격한 제자들만이 장주갑에 부어놓은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요수정, 계곡의 진입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는 요수정의 반대쪽에 마주하고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는 거북바위가 위치한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학자로 향리에 은거하며 소요자족했던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이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던 요수정(樂水亭)이 서 있다.
이 정자는 구연대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수승대의 경관을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요수는 아름다운 원학동 계곡에 살던 신권의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정자의 명칭이다.
요수는 《논어》의 〈옹야(雍也)편〉에 나온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는 글로 옛 선비들이 심산유곡의 산수를 즐기며 늘 마음에 두었던 문구다.
요수정은 1542년 구연재와 남쪽의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중건한 뒤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주변 거창 신씨 후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아울러 퇴계 이황이 이곳을 수승대라고 이름 지을 것을 권한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시와 이에 대한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 〈갈천장구지대(葛川杖廐之臺)〉, 더불어 옛 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 차 있다.
수승대의 동쪽에는 구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요수 선생이 1540년(중종 35)에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1694년(숙종 20)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었는데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 등이 배향되어 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1740년(영조 16)에 세워졌다.
관수(觀水)는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등장하는 문구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흘러간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며 물의 속성을 강조한 글이다.
군자의 학문은 웅덩이를 채우는 물과 같아서 한 웅덩이를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학문의 방법을 담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동천의 계곡에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물을 관조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 심오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수승대를 관광하고 수승대에서 불과 몇백미터 떨어진 다음 여정지 황산전통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