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칼라의
낡은 노트 쪽이 열연공장을 살리다.

열연공장의 사상압연기와 압연 된 철판의 모습
종합 준공 후 회사는 수퍼바이저들의 지도하에 그런대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조직도 바뀌어 사장님이 회장님이 되고 크게 본사와 제철소, 건설본부로
바뀌고 압연정비과도 1과와 2과로 분리되어 강편공장을 2과에 넘기고 열연 및 후판 공장만 담당하여 업무량을 줄여주었다.
열연공장에서는 몇 분만에 십 수십 톤의 철판을 생산하였지만 쇠가 너무 귀하던 시절이라 치마만 입으면
여자로 보이듯이 철은 바로 돈이었다. 철의 질도 질이지만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운 코일러에서 화장지처럼 감긴 철은
약 섭씨 500도를 넘나 돌았지만 냉각대기장에서 식기가 무섭게 출하되었다. 수요가들은 줄서기를 하면서 배급을 받는다고 들까지 했다. 하지만
회장님의 철학은 명확했다. 산업의 소재의 우선 공급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제대로 된 철강공장이 없었다 인천에 국영기업으로 대한중공업사(지금의 현대제철)가 전기로로 고철을 녹여서 철을 만들었지만 자사 철근이나
형강제품의 수요밖에 충당하지 못했다. 부산에도 극동철강(한보철강)이 전기로로 고철을 녹여 철근을 생산했을 뿐 철강판재는
포항제철에서 처음 생산한 것이다.
철강2차 가공공장으로는 서울 오류동에 일신제강(현 동부제강)과 부산에 연합철강이 열연코일을 일본에서 수입해서 냉연강판을
제조해서 그나마 숨통을 튀었다. 그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시내 택시였던 시발택시는 판재가 없어 미군들이
버린 드럼통을 펴서 상자 같은 자동차를 생산한적이 있었다. 그만큼 철강판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 생산한 열연제품은 품질 상 일신제강이나 연합철강에서 수입한 열연 강재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그때의 실정은 품질보다 량이 먼저였다. 쌀이 부족했던 보리고개 시절에는
생산량이 많은 통일벼가 우선 이듯이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철도 질보다 양이 더 필요했다.
회사는 곧 바로 2기설비 확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 철강업계는 포철의 순항에 놀라 기술지원은 단절되고 오직 하드웨어만 메이카에서 팔았다. 이제 소프트웨어는 미천한 실력이지만 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큰 틀은 회장님이 일본정계와 재계, 철강계에 계속 줄을
잇고 있었지만 고위층일수록 지원은 항상 정책적이었다. 한마디로 ‘아, 그래요. 도와 드리지요’하고는
핵심을 빼고 지원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본제철소와 년 1-2회
품질과 설비안정을 위해 서로 어려웠던 점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기술교류회를 이어갔다.
회장님은 간부들에게 개인적으로 인적 채널을 형성해서 공식적으로 얻지 못하는 기술자료나 코멘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런 연유로 기술교류회에 참석한 일본인 기술자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을 칙사 대접하듯 했다. 물론 그들도 지침을 받고 왔지만 며칠 거의 같이 붙어 다니며 경주관광도
시켜주고 동해 바닷가에서 아까다이(붉은 도미)를 대접하고
술 한잔 하면 지침도 잊어버리고 사람과 사람으로 돌아와 엔지니어 답게 순수해졌다. 연수 때 후쿠야마
역에서 일본사람들이 세또노나이가이(瀨戶內海)에서 잡히는 도미를 귀히 여기는 것을 눈으로 보았던 적이 있는데 빨간 도미는 정말 귀하다고 했다.
어떤 분은 ‘이것 먹어도 되느냐’며
먹기전에 생선 통체로 회를 떠서 몸체는 이미 회가 되었지만 머리와 꼬리는 살아 움직이는 활어회에 절을 하고 먹었다고들 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비싸서 평생 한번 먹어 보기 힘든 게 아까다이였다. 그럴
때 마다 궁금했던 일을 한마디씩 던지면 쉽게 답을 얻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술도
함께 마셨다. 개인적으로는 요정과 양주코너에 가본 게 처음이었다.
흔히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포철은 초기에 일본사람들이 다 돌려주어서 잘 돌아갔다고들 했다. 실제 그들의 도움은 컸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국경선처럼 어느정도 까지의 한계선은 그어져 있었다.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가해져야 그 국경선을 무너뜨린다. 남의
머리속에 든 것을 갖고 오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잘 돌아가던 열연공장도 일본인 기술자가 돌아가고 난 다음 몇 달이 지나자 가끔 사이리스트(Thyristor, 실리콘제어 정류기)가 손상을 입었다. 정류기는 교류전력에서 직류전력을 얻는 회로장치로 다이오드처럼 한방향으로만 전류를 통과시키는 기능을 가졌다. 동구에서 들여온 후판공장은 다이오드를 사용했지만 일본은 벌써 사이리스트를 쓰고 있었다. 그만큼 동구제품의 질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야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어 그들 말 대로 사고가 발생하면 일본제철소의 관행에 따라 소모품처럼 부품을 통째로 교환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웃 일본이라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고에 대해 회사 창구를 통해 일본의 자문을 받았지만 사이리스터는 현재 일본에서 똑 같이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며 혹시 조업
쪽에서 수동개입시 발생하는게 아닌가 조사해보라고 했다.
가열로에서 약 250mm두께의 슬라브를 추출해서 조 압연기에서 가역식으로 약 40여mm두께로 우선 압연하고 사상압연기로 제품(두께 1~6mm)을 만드는 과정에서 6대의 사상압연기를 통과할 때 마다 철판의
두께가 점점 얇아지는 대신 길이는 늘어나 다음 스탠드의 속도를 높여서 철판의 장력을 조정하는데 무언가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수동개입시 순간적으로 스탠드의 장력차이로 과부하가 걸려 사이리스터에 충격을 주어 사이리스트가 파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업 측에서는 자동으로 되어있는데 수동개입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철판의 상태를 보아가며 수동개입을 드물게 하고 있었다.
사이리스트가 파손되면 6대의 연속 사상 압연기를 통과하던 제품은 스탠드사이에 종이조각처럼
구겨지거나 판파단이 생겨 오작(誤作)이 생겼다. 조업 쪽에서는 사이리스트 고장으로 오작이 발생했다고만 했다. 사이리스트가
파손되는 시간은 타임로그에 자동기록 되지만 오작 발생시간은 조업실의 벽시계라 오작이 먼저인지 사이리스트 파손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비
측에서 볼 때는 논리적으로 사이리스트에 과부하가 걸릴 원인은 조업미숙으로 스탠드간 장력의 언발란스로 보이지만 잘되다가 간헐적으로 발생해서 이것 또한 오리무중이었다. 대안은 비싸지만 예비품을 많이 준비해서 사고 때마다 바꾸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사고가 발생할 때 마다 이것 저것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징후도 잡지 못 하고 정비시간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고무줄 타기를 했다. 매월 초 시행하는 운영회의에서는 생산량이 정비시간에 비례해서 늘어나고
줄어들었고 철이 없어 팔지못하는 본사는 회사의 손익이 정비시간에 따라 증감된다는 심사분석보고를 했다. 이
심사분석보고는 피를 말렸다. 그때마다 회장님은 공무부장에게 ‘좀
더 노력해봐’ 하셨지만 대안이 없었다.
공무부장이 연수 중 일본 제철소 초창기의 정비율을 조사한 게 약 10%정도였지만
우리는 이보다 제법 높은 13-14%를 오르내렸다. 이 수치는
일본은 자국에서 예비품을 쉽게 구하는 점을 감안해도 우리 기술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좋게 생각하면
부품을 자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닐 수도 있지만 국내의 철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생산량을 늘이려면 정비율을 낮추어
설비가동율을 높여야 했다. 자연적으로 회사는 정비시간을 줄이는 게 이슈화되었다.
정비요원들은 사이리스트가 파손될 때마다 계기반의 설정치가 바뀌어 있다고들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누가 바꿀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전기실 운전을 담당하는
조업부서에 있었다. 이번에도 숙련공의 지혜를 얻어보려고 정비요원과 조업부서 소속의 전기운전 요원을 다
모우기로 했다. 일본의 자문내용을 설명하면서 조업 측의 협조를 요구했다. 다행이 열연공장장은 대학동기라 쉽게 대화가 되고 조업측도 생산량이 감소하면 매월 심사분석때 수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이었다.
합동토의는 조업과 정비 간의 일이라 원인을 따지려면 불협화음만 생겨 서로 간의 협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조사결과에 개인적인 잘못이 발견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전제부터 하고 시작했다. 그들은 인사부서의 칼날 같은 인사위원회에서 내리는 견책에서 감봉, 정직에
이르는 규정이 바로 본인들의 승진과 수입에 직결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조업은 3교대 근무였다. 수퍼바이저가 있을 땐 일어나지 않던 사이리스트 파손의 원인에 대해 확증이 없더라도 개인적으로 유추되는
사항과 교대후 작업을 시작하기전에 하는 일부터 작업이 종료되어 다음 작업팀에 인계하는 사항을 서술식으로 솔직히
기록하도록 당부했다. 그들은 매일 작업일지에 기록을 하는 대로 전기 계기치의 설정을 먼저 확인하고 생산
측에 준비완료라고 알려주면 생산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업일지에는 설정치는 없고 이상 유무만
체크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본인들이 기준으로 알고 있는 설정치를 기록하라니까 망서렸다.
다시 한번 더 책임을 묻지 않는다며 이번 일로 징계나 견책 등 그런 일은 없다고 강조하고 정비와 운전팀의 공히 설정치를
기록하도록 했다. 결과는 3교대 작업장 간에 설정치가 서로
달랐다. 정비요원들의 말하던 대로 설정치가 서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수퍼 바이저들이 설정해 준 기준치가 얼마인지 아는 사람도 없고 PAT(설비성능시험)과 FAT(설비능력시험)기록에도 없었다. 단순히 설정만 하고 작업을 했을 뿐이고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다가 갑자기 사이리스트가 고장이 난다는 것이다. 사이리스트의 파손원인은 스탠드간 장력차의 누적으로
부하가 걸리면서 사이리스트가 견디지 못한다는 일본의 자문내역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뾰족한 대안이 없이 정비원과 운전원을 계기판과 생산조업팀에 고정 배치하고 상항을 감시하도록 했다. 틀림없이 사고가 날 때는 지침은 춤을 쳤고 오작이 생겼다. 사이리스트
파손이 먼저인지 오작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업에서는 사이리스트가 기능을 먼저 잃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비는 그 원인이 일본의 기술자문 대로 과부하원인이 조업에서 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기제어판의 움직임은 타임로그에 일일이 찍혀 나오고 있었다. 타임로그에
따라 오작이 발생된 시간을 작업장별로 분석을 시켰더니 발생회수의 편차는 있었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작업장별로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한 작업장이 찾아왔다. ‘과장님, 건설당시 수퍼바이자와 함께 일하면서 적어 놓은 계기치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수첩에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하느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당장 전기실로 내려가 계기마다 설정치에 맞추어 페인트로 선을 표시하고 3교대 작업장들에게 이 선을 지키도록 지시를 했다. 그랬더니 오작이
눈에 보이게 줄어들었다. 이 설정치는 장력을 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이후 조업은 안정되면서 정비율은 점차적으로 낮아졌다, 후판공장도
그랬고 열연공장도 초기에는 전기적인 문제가 훨씬 많이 발생했다.
연수 때 배운 기록 정신이 큰 효자 노릇을 한것이다.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 노트를 들고 무엇이던 기록하는 지가 실감이 났다.
회사에서도 기록습관을 들이기 위해 전용으로 포켓용 수첩과 B-4 크기의 수첩을 전사원에게 나누어 주고 매일매일 기록하도록 당부했다.
우선은 보직이 바뀔때는 전임자의 기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취임 때 주요 데타를 선별해서 인계했다. 멀리는 훗날 혹시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면서 아주 작지만 포항제철의 힘을 하나하나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