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
[시편 29:11]
시편 29편은 '폭풍 속 주님의 음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다윗의 시다.
'주님의 목소리'가 물 위로 울려퍼지는 데, 그 목소리는 힘이 있고 위엄이 넘친다.
레바논의 백향목이쩌개지고,
레바온의 산맥이 들송아지처럼 뛰놀고,
시룐의 산들은 들송아지처럼 날뛴다.
주님의 목소리는 또한 가데스 광야를 뒤흔든다.
주님의 목소리에 단단한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숲은 벌거숭이가 된다.
창조세계를 통하여 이런 신비로운 주님의 목소리를 경험한 이들은 "영광!"이라고 외친다.
이렇게 창조세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린(2)'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
그렇다면,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린 사람은 누구인가?
'거룩한 옷'이란,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는 것을 '순종'이라고 보면,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는 이들이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행하지 않는 이들은 위선자요, 사기꾼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므로 자신들이 위선자요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것이 곧 자신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만난 이들도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타포(은유)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자로 규정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만일 인간의 문자로 정의를 내리고 규정할 수 있는 분이라면 그는 절대자라할 수 없다. 진리의 속성이 문자로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도덕경 1장)이다.
창조세계의 신비 앞에서 인간은 경외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든, 자신을 압도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든 그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느낀 것 이상의 일이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메타포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런 점에서 월터 브루그만의 주장대로 사역자들,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시인'이 되어야만 한다. 메타포의 언어를 다루는 시인.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메타포의 언어가 아니라 사실적인 문자로 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폭풍 속 주님의 음성'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어떤 말씀들은 너무 분명하여 해석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들이 있다. 시편 29편 11절의 말씀 같은 것들이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
[시편 29:11]
무슨 해석이 더 필요한가? 그러나 그 외의 말씀들은 메타포의 언어로 읽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