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유배문학, 사천시 곤양유배 이지걸, 귀양살이 서러움에 북받치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조선후기 문신 금호(琴湖) 이지걸(李志傑 1632~1702) 선생은 신미년(辛未年, 1691년)에 경남 사천시 곤양(昆陽)으로 귀양 왔다가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사면되어 돌아갔다. 귀양지에 있을 때는 문을 닫고 조용히 들어앉아 오직 전적(典籍)을 탐구(探究)하는 것을 스스로 즐기면서 천리 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신세임을 잊고자 애썼다. 공은 문장(文章)에는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더욱 시(詩)에 능하여 그가 읊은 시가 사람들에게 전송(傳誦)되는 것이 많다. 유고(遺稿) 5권에, 총 1천 5백여 수(首)가 전한다.
○ 1691년 경남 사천시 곤양면 곤양천 하류 바닷가 마을에서 처음 귀양살이 한 이지걸(李志傑)은 1년 후, 곤양면 맥사리 무고천변 대울타리 초가집으로 옮겨 거주했다. 그리고 그의 유배작품에서 자주 언급한,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사천의 서봉사(棲鳳寺)⋅다솔사(茶率寺)를 가장 많이 다녀 사찰의 스님과도 친분이 많았다. 그가 교류한 유배인으로는 고성군 갈천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던 조사석(趙師錫 1632~1693)이 있었다. 조사석은 1691년 고성으로 유배되어 1693년 고성에서 사망한 분으로 호는 만회(晩悔)·만휴(晩休)이다. 이 당시 이지걸(李志傑) 선생이 사천시 곤양 바닷가 인근에 귀양살이 하였는데, 1691년 선생이 조사석을 뵙고자 사천시 곤양에서 출발하여 길평리 배춘리를 거쳐 진주시 금곡리, 고성군 영현면의 대가천을 따라 신분리 대법리 갈천 마을까지 왕래했다. 당시 두 분은 같은 60세의 동갑으로 오랜 벗이었다.
○ 또한 공은 기풍(氣風)과 자용(姿容)이 깨끗하고 맑았으며 언어(言語)와 논변(論辨)이 뛰어나고 명쾌하여 한때 같은 연배들이 모두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으며, 관학(館學, 성균관)에 있을 적에는 항상 사림(士林)들의 주론(主論)으로 삼았다. 갑인년(甲寅年, 1674년 현종 15년)에 조정(朝廷)에서 명망(名望)과 덕행(德行)이 있는 선비를 천거했을 때 공이 홍득우(洪得禹)ㆍ이인혁(李寅爀) 제공(諸公)과 더불어 함께 추천(推薦)에 올랐는데, 대개 모두 한 세대의 인망(人望)들이었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 이후로는 천거를 사양하고 자취를 서호(西湖)에 감추고 여생을 마칠 계획을 했는데 벼슬길에 들어옴에 미쳐 현령(縣令)으로 부임함에 이르러서는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조정의 명(命)에 사은(謝恩)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는 좋아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후(前後) 중앙과 외방의 관직에 있을 때는 항상 청렴하고 명결(明潔)한 것으로 자신을 단속했으며 공무를 받들고 법을 지킴에 있어 흔들리거나 굴복한 바가 없었다. 그리고 민사(民事)와 군정(軍政), 학교(學校)ㆍ전결(田結)ㆍ송옥(訟獄)ㆍ진조(賑糶)에도 심력(心力)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정성스럽고 삼가며 자세하고 부지런함은 모두 후세의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 이지걸 선생의 한시를 살펴보면, 음조(音調)에 나타난 것이 간곡하면서도 온화하고, 말에 드러난 것이 순후하면서도 고상하다. 그리하여 모든 차갑고 괴로운 말과 제멋대로 날뛰는 말과 깎아지른 듯한 폐단과 담박한 병통을 한결같이 씻어 버렸다. 때로는 혹 고원(高遠)함에 마음을 두고 세상일에 회포를 부쳐서 가슴속의 감회와 울분이 생각과 형상의 외면에 은은히 드러난다 하더라도 일찍이 온유함과 돈후함을 근본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깨달을 수 있고 말하는 자가 죄를 받지 않을 수 있으니, 이는 시에서 가르침이 깊다고 이를 수 있으며, 또한 그 인품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유배문학에는 회한(悔恨)과 성찰(省察), 희망(希望)과 환희(歡喜)가 주를 이루니,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 다음 한시 <술회(述懷)>와 <한식창회(寒食愴懷)>는 경남 사천시 곤양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 하던, 이지걸 선생이 중국의 왕찬과 굴원을 자신과 대비시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시인 왕찬(王粲 177~217)이 형주(荊州)의 누대에 올라, 이 세상을 근심하면서, 멀리 고향을 떠나온 슬픔에 눈물을 한없이 흘러 멈출 길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리라“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또한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 굴원(屈原 BC343~BC277)은 유명한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辭> 등을 지은 애국시인으로 유명하다. 자란(子蘭)의 모함으로 경양왕에 의해 참소를 받은 굴원이 강남지방 동정호(洞庭湖) 남쪽으로 쫓겨나,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회사의 부〉를 마지막으로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결국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 왕찬의 시구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굴원의 시편에서 자신의 결백과 충정을 표현하고 있으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면서, 저녁 바람과 아침 안개에 내면의 상심을 일으켜 이 시를 지었다.
1) 술회(述懷) 마음속 생각을 읊다.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登樓四望聞王粲 다락에 올라 사방을 보니 왕찬(王粲)의 소리가 들리고 傍澤行吟憶屈平 못가에서 귀양 살며 글을 읊조리니 굴원(屈原)이 생각난다. 海上絶儔誰有顧 해상에선 찍힐 사람 전혀 없어 뉘가 돌아볼꼬. 旅中依僕更多情 사내종에게 의지한 귀양살이 참으로 다정스럽다. 孤忠自與蒼顔老 나 홀로 충성심은 여윈 얼굴과 더불어 쇠약해가고 寸愊元從白日明 나의 자그마한 원종공신만 대낮을 밝힌다. 時復出門無所適 때마다 문을 나서도 갈 곳이 없는 것을, 夕風朝霧揔愁生 저녁 바람과 아침 안개는 늘 수심만 일으키네.
2) 한식창회(寒食愴懷) 한식날 서글퍼져. ‘眞’ 운(韻) / 이지걸(李志傑) 楚雲湘水絆孤臣 초나라 구름과 상강 물에 쫓겨난 외로운 신하, 愁殺今朝物色新 오늘 아침 물색이 새로워 시름을 젖게 하네. 故國蒼茫千里外 창망한 고향 땅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데 焚香上塚幾家人 묘지에 향불 피운 집안사람 몇 분이런가? [주] 초운상수(楚雲湘水) : 초나라 구름과 상강(湘江)의 물로 남녀의 그윽한 정을 상징하며, 주로 초운상우(楚雲湘雨)라고 한다.
● 다음 ‘眞’ 운(韻)의 오언율시 <모진 추위를 읊다(詠苦寒)>는 저자 이지걸(李志傑)이 사천 곤양에서 귀양살이하면서 느낀 바를 적은 글이다. 외딴 바닷가, 적막한 바다, 땔감이 떨어진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유배인의 심정을 드러냈다.
3) 모진 추위를 읊다[詠苦寒]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귀양살이 머물러 사는 이 곳, 외딴 마을 적막한 바닷가, 몸을 지탱하고자 더욱 옹졸함을 도모하여도 집들이 이웃하여 자연스레 서로 친하게 된다. 우물이 얼어 용기에 겨우 물을 긷고 추운 부엌에는 땔감이 다시 떨어졌네. 앉아 근심하니 천 봉우리엔 아직 눈이니 언제 따뜻한 봄날 보려나.” [遷客棲遲處 孤村寂寞濱 資身謀益拙 接屋俗相親 井凍纔容汲 厨寒更乏薪 坐愁千嶂雪 何日見陽春]
● 다음 ‘眞’ 운(韻)의 칠언절구 <봄을 기원하며(祈春)>도 위 글과 마찬가지로 바닷가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저자의 심정을 드러낸 글이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을 바라보며, 돌아오는 봄날에는 대궐에서 사신(丹鵲)이 내려와 자신을 사면 시켜주길 소원한다.
4) 봄을 기원하며[祈春]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蠻鄕千里一孤臣 천리 먼 변방의 한 외로운 신하가 幾上危樓望北辰 몇 번이나 높은 누각에 올라 북극성을 바라봤던고? 忽見雲間丹鵲下 홀연히 구름 사이로 붉은 까치가 내려오는데 玉京歸路伴靑春 옥경(玉京)으로 돌아가는 길에 푸른 봄철과 벗하려나. [주1] 단작(丹鵲) : 붉은 까치[丹鵲]를 사신의 대칭(代稱)으로 쓴다. [주2] 옥경(玉京) : 하늘 위에 옥황상제가 산다는 서울, 여기서는 임금이 사는 대궐을 말함.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봉명산(鳳鳴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연기가 창건한 사찰 다솔사(茶率寺)에는 통일신라시대나 고려 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굴과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16세기 초반 이후에 작성된 다솔사 관련 문헌 자료도 전하고 있다. 503년(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혜근 스님 이후에 계속 향화(香火)를 이어 왔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내 건물의 반 이상이 불탄 뒤에 1686년(숙종 12)에 복원하였고 1696년에는 중건불사로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다솔사 주변 오른쪽 깊숙한 곳에는 서봉사(棲鳳寺)가 위치하고 있다. 서봉사의 기록에서 의명, 도선 이야기는 다솔사와 관련되었다. 의상과 동일인으로 여겨지는 의명과 함께 도선은 서봉사는 물론 다솔사와도 인연을 맺었다. 다솔사는 서봉사와 함께 사천 일대는 물론 지리산 동부 및 남해안 연안 일대의 사찰 가운데 고대 이래 주요 사찰로 자리한 고찰(古刹)의 하나다. 그리고 여기 봉명산(鳳鳴山)은 봉암산, 이맹산과 연봉을 이루고 있고 산정에 올라서면 곤양 앞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한 눈에 펼쳐진다. 다솔사를 비롯하여 서봉사지(棲鳳寺址), 서봉암(棲鳳庵), 봉일암, 보안암 등의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 다음 ‘灰’ 운(韻)의 칠언절구 <서봉사(棲鳳寺)>와 ‘文’, ‘尤’ 운(韻)의 칠언절구 2수 <다솔사(茶率寺)>는, 이지걸 선생께서 임진왜란 때 불탄 사찰 서봉사(棲鳳寺)와 다솔사(茶率寺)를 복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번 다녀왔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찰의 스님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아래 2편의 한시는 선생께서 1693년 단풍이 물든 가을철에 사찰을 다녀온 후에 느낀 소회를 적은 글이다.
5) 서봉사[棲鳳寺]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에 있던 절 欲看楓葉勝花開 단풍잎을 보니 피는 꽃보다 뛰어나니 棲鳳年年幾往來 서봉사 해마다 몇 번을 오갔던가? 不但居僧顔面慣 다만 모든 스님 얼굴이 익숙한 건 아니나 語林幽鳥亦無猜 숲속 산새 소리 또한 시기하지 않구나.
6) 다솔사[茶率寺] 二首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祗園草木無非賞 동산에는 초목이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는데 何事籠山種此君 산을 빙 둘러 대나무를 무슨 일로 심었는고. 要見琅玕高百尺 요컨대 푸른 옥돌이 백 척 높이로 나타나서 半空長拂往來雲 반공중에서 늘 오고가는 구름을 스치네.
客來蕭寺上危樓 쓸쓸한 절에 손님이 찾아와서 높은 누각에 올라 千里難堪北望愁 북쪽을 바라보니 수심이 천리 난감하여라. 還覺聖恩隨處足 도리어 성은이 가는 곳마다 넉넉히 드러나 飽看紅葉滿山秋 온 산에 붉은 가을 단풍잎을 싫도록 보누나. [주] 낭간(琅玕) :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 어두운 녹색 또는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半透明)의 아름다운 돌로, 예로부터 장식에 많이 쓰임. 벽옥(碧玉).
● 다음 ‘先’ 운(韻)의 칠언절구 <못 가에서 조사석에게 보낸다(寄晩休澤畔)>는 이지걸(李志傑)의 유배작품이다. 당시 이지걸 선생은 사천시 곤양에서 출발 길평리 배춘리를 거쳐 진주시 금곡리, 고성군 영현면의 대가천을 따라가, 신분리 대법리 갈천 마을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는 만회(晩悔) 조사석(趙師錫)의 배소까지 왕래했다.
7) 기 만휴 택반(寄晩休澤畔) 못 가에서 조사석에게 보낸다. 秋攪離懷落照懸 가을날 이별의 회포 심란한데 저문 해가 걸려있고 上山遙望倍悽然 산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처량한 마음 금할 길 없다. 如何海樹重遮恨 어떻든 바닷가 나무가 거듭 시야를 가려 유감인데 欲逐東流到葛川 동쪽 시냇물 뒤따라 가다가 갈천(葛川)에 이른다. [주1] 갈천(葛川) : 상공 만휴(晩休) 조사석(趙師錫 1632~1693)이 유배와서 머물던 마을이름이다.(相公所住村名) 경남 고성군 대가면. [주2] 조사석(趙師錫) : 조선후기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1691년 전 해에 있었던 왕세자책봉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고성(固城)에 유배되어 1693년 배소에서 죽었다.
◉ 옛적 경남 고성의 갈천(葛川)은 지형적으로 볼 때에 가장 변방으로서 관포(灌圃,어득강)가 은거한 곳이며, 만회(晩悔, 조사석)가 귀양 온 곳이다. 관포(灌圃)의 또 다른 호는 혼돈산인(渾沌山人)인데 혼돈산은 현재의 갈천서원 부근의 산 이름이다. 그의 詩 “두 냇물 다투듯,,,” 에서 알 수 있듯 당시 갈천(葛川)과 송계(松溪)의 물이 합쳐지는 현재의 갈천서원 부근에 그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현(四賢)중의 한 분인 관포선생이 은거했던 곳이라서 금봉서원이 이곳으로 옮겨지고 갈천서원으로 개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숙종 때의 정승 만회(晩悔) 조사석(趙師錫 1632-1693)은 영돈녕부사로 있을 때 왕세자 책봉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한양에서 먼 남쪽 경남 고성(固城)에 유배되어 3년 후 겨울에 풍질(風疾)로 배소(配所)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후일 복관(復官)되었다. 그가 귀양 와서 있을 때 소시(小試)에 합격한 조카 조태억이 숙부의 귀양지를 찾았다. 만회(조사석)은 사후 갈천서원에 배향되었고 조카(조태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1721년 辛丑) 이곳을 찾아 와 참배했다. 만회(만휴)는 행도관묵 사현(四賢. 행촌,도촌,관포,묵재)등과 함께 갈천서원에 제향되었으나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궐향(闕享)되었다. 그 정확한 이유는 역시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의 정치적 입지나 가세(家勢)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다음 ‘陽’ 운(韻)의 칠언절구 <패옥을 수여받고 길을 떠나다(受環登程)>는 1694년에 이르러 마침내 이지걸 선생은 귀양살이에서 해배 복권되어 한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절망에서 환희로 바뀌는 순간에 그는 붓을 들었다. 아무리 유배지 곤양 땅이 정(情)이 들었다 하더라도 제2의 고향이라 부르지 말라면서, 다시는 천리 먼 유배지 바닷가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읊조린다.
8) 패옥을 수여받고 길을 떠나다[受環登程]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策馬都忘客路長 잊었던 서울로 말을 몰아가니 나그네 길 멀기만 해도 還同征鴈快飛翔 오히려 기러기 날아가듯 즐거이 비상한다네. 昆山不欲回頭望 곤양산 머리 돌려 되돌아보지 말라 誰道幷州是故鄕 여기 곤양 땅이 제2의 고향이라 누가 말했나? [주] 병주고향(幷州故鄕) : 병주(幷州)가 고향(故鄕)이라는 뜻으로, 오래 살아서 정(情)든 타향(他鄕)을 고향(故鄕)에 견주어 이르는 말. 제2의 고향을 가리킨다. 이것은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병주(幷州)에 오래 살다가 떠난 후(後) 시(詩)를 지어 그곳을 고향처럼 그리워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였다. 유의어(類義語)로는 병주지정(幷州之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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