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平仄平平仄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平平仄仄平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仄平平仄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平仄仄平平
<東方虬동방규>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옷의 띠가 느슨해지니
이것은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라오.
이 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동방규(東方虬)가 왕소군(王昭君)이 오랑캐 땅으로 가는 애절(哀切)한 심정(心情)을 읊은 시(詩)다. 압운(押韻)은 상평성(上平聲) 진통(眞統) 운족(韻族) 춘(春), 신(身)으로 작시(作詩) 했다. 동방규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도 한 운통(韻統) 작법(作法)은 맞으나 당시(唐詩) 근체시(近體詩) 평측(平仄)은 맞지가 않다. 이 시(詩)는 전한(前漢)11대(代) 원제(元帝)의 후궁(後宮)인 궁녀(宮女)였던 왕소군(王昭君)이 남흉노(南匈奴) 호한야(呼韓邪)에게 정략결혼(政略結婚)하게 되어 희생(犧牲)된 역사(歷史) 다. 왕소군은 본명(本名)은 왕장(王嬙)이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서 18살에 후궁(後宮)으로 선발되었다. 후궁은 수 천명이나 뽑혀와서 원제(元帝)는 후궁들을 하나하나 파악할 수가 없어서 화공(畫工)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宮女)들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서 받치게 하였다. 수도 장안에 사는 후궁들은 모연수에게 뇌물(賂物)을 주고 자신들의 모습을 미녀(美女)로 예쁘게 그려서 받치게 하였다. 왕소군(王昭君)은 집안이 빈천(貧賤)해서 뇌물(賂物)도 주지 못했다. 화공은 다른 후궁들은 다 뇌물을 주는데, 왕소군만 주지 않자. 아주 추녀(醜女)로 그려서 원제에게 받쳤다. 화공이 받친 후궁들 예쁜 초상화만 보고 원제는 궁녀들을 침실로 들게 했다. bc33년 남흉노(南匈奴)인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가 준마(駿馬) 모피(毛皮)와 많은 공물(貢物)을 가지고, 전한원제(前漢元帝)를 알현(謁見)했다. 선우(單于)는 원제元帝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원제 딸, 공주(公主)와 결혼하고 싶다고 청혼(請婚)을 했다. 원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흉노족(匈奴族)을 사위로 삼아 놓으면 국방(國防)이 안전(安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락은 하고 연회를 성대하게 베풀어 총애(寵愛)받지 못한 후궁(後宮)을 불러와서 선우에게 술을 권하게 하였다. 궁녀(宮女)가 들어오자마자 후궁을 본 선우는 넋을 잃고 말았다. 절세미녀(絶世美女)였기 때문이다. 선우는 후궁(後宮)이 욕심(慾心)이 발동(發動)해서 원제(元帝)에게 또 다른 제안(提案)을 하게 된다. 황제(皇帝)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公主)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후궁(後宮) 미녀(美女)들, 중에서 한 명이어도 괜찮겠습니다. 원제는 서우의 제안를 즉석(卽席)에서 수락(受諾)한다. 호한야는 왕소군(王昭君)을 지목(指目)을 한다. 흉노 호한야가 지목한 왕소군을 본 원제(元帝)도 왕소군의 미모(美貌)에 정신(精神)을 잃을 정도였으나 한번 약속(約束)한 결정(決定)이라 되돌릴 수가 없어서 원제는 호한야에게 국혼 혼수가 아직 준비하자면 3일 정도 기다리라고 해 놓고 왕소군(王昭君)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들여서 사흘 밤낮으로 동침(同寢)을 한다. 약속한 3일이 당도하자 왕소군은 흉노족 복장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元帝)에게 작별(作別)을 고(告)하자 왕희에게 소군(昭君)이란 칭호(稱號)를 내렸다. 왕소군(王昭君)은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을 떠나면서 가슴에 비파(琵琶)를 안고 말에 올라 구경나온 장안 거리를 지날 때 말 위에서 고국(故國) 산천(山川)을 떠나가는 애닲은 심정(心情)을 달래려고 이별(離別)의 비파(琵琶) 곡조(曲調)를 연주(演奏)하자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애달픈 비파소리를 듣고 왕소군의 미모를 보려고 날개깃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땅에 그만 떨어졌다고 해서 왕소군(王昭君)을 낙안(落雁) 미녀(美女)라고 했다는 일화이다. 흉노 왕 선우와 결혼한 왕소군은 아들을 낳았다. 선우가 죽자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흉노풍습(匈奴風習)은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어어 받게 되는데, 왕소군(王昭君)이 아들 왕에게 흉노의 풍습을 따르겠는가? 한(漢) 나라 풍습(風習)을 따르겠는가? 묻자, 왕(王)이 된 아들은 흉노(匈奴) 풍습(風習)을 따르겠다고 대답을 하자, 아들 말을 듣고 왕소군(王昭君)은 음독(飮毒) 자살(自殺)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아내로 살겠다는 아들을 말을 듣고 더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죽었다는 애닲은 일화(逸話)다. 왕소군이 죽자 장례를 치뤘주었는데 그녀의 무덤에는 푸른 풀만 났다고 해서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塚)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당(唐)나라 시인(詩人) 동방규(東方虬)가 시제(詩題) 소군원(昭君怨) 오언절구(五言絶句) 삼수(三首)를 남겼는데 그때 당시 왕소군의 애절함을 시어(詩語)로 풀어내고 있다. 일수(一首)부터 삼수(三首)까지 보자. 한나라 황도는 지금 한창 왕성하고, 조정에는 무신이 넘쳐나는데도 하필이면 불운한 이내 몸에게 흉노를 섬기라 쓰라린 고초를 겪으라 하네,<漢道方全盛 朝廷足武臣 何須薄命妾 辛苦事如親> 이수(二首) 눈물을 흘리며 단봉궐(丹鳳闕)을 떠나와 백룡(白龍)으로 가는 길 마음 찢어지는데. 선우는 미친 듯 놀라워하며 기뻐하지만, 소군의 옛 모습 다시는 찾을 길 없어라,<掩淚辭丹鳳 銜悲向白龍 單于浪驚喜 無復舊時容> 삼수(三首) 오랑캐 땅에는 풀도 꽃도 없어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구나! 나도 모르게 옷 띠가 느슨해졌으니, 허리가 가늘어진 것은 선우를 위해서가 아니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말도 설고 낮도 설고 풍습도 설은 흉노 땅에 황제의 명을 받고 가기 싫은 이국땅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왕소군의 서글픈 심정을 시인(詩人)은 왕소군의 마음속을 들어가 본 양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애절(哀切)하게 풀어내고 있다. 왕소군이 영혼이나마 동방규의 시(詩)를 보았다면 조금은 위안(慰安)이 되었을 것 같다.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지만 왕실로 시집을 갔는데, 왜 그토록 불행(不幸)해, 했을까? 이다. 왕소군이 흉노왕 선우에게 간 뒤로 전한(前漢) 원제(元帝)는 화공(畫工) 모연수(毛延壽)를 극형(極刑)에 처했다고 한다. 그만큼 왕소군(王昭君)은 절색미녀(絶色美女)였다는 증거(證據)다. 화공(畫工)이 왕소군(王昭君)의 모습 그대로만 그렸더라면 왕소군을 흉노에게 보내지 아니해도 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황제의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선우를 속여가며 3일 동안 미앙궁에서 왕소군과 동침한 것이, 원제(元帝)가 왕소군(王昭君)을 뺏기기 싫다는 심정의 증표(證票)다. 역사가 흘러도 비련(悲戀)의 여인(女人) 왕소군(王昭君)의 이야기는 정치인들에게 회자(膾炙)되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되고 있다.
한국 정치 80년대를 맞으면서 공화당 총리를 했던 김종필 씨가 박정희 독재(獨裁) 정치가 종식이 되고 3김 시대가 온가 싶었는데, 신군부가 12/12사태로 한국 정치가 새 군부로 넘어가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말을 해서 그때부터 정치권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주 인용하는 말이 되었다. 조선말(朝鮮末) 지방(地方) 향시(鄕試)에도 등장하는 것이 왕소군(王昭君)의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다.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한 시(詩)는 4행(行) 모두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다.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다고 하는데/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리오/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리오마는/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고 하네. /두 번째 똑같은 시인데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오랑캐 땅 화초가 없다고 하나/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을까?/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만/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뜻이 다른 함축성을 지니는 것이, 한시(漢詩)의 묘미(妙味)이고 모효성(模糊性)이다. 이씨조선(李氏朝鮮)을 통체(統體)로 넘기려고 한일병합(韓日倂合) 때 대한중추원(大韓中樞院) 의장이던 운양(雲陽) 김윤식(金允植)이 조약(條約)에 배서(背書)를 불가불가(不可不可) 네 글자로 표명(表明)했는데, 을사오적(乙巳五賊)들은 불가(不可)/ 불가(不可)/로 보지 않고, 불가불(不可不)/가(可)로 합병(合倂)을 찬성한 것으로 해석을, 해서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것이,
근대사(近代史) 우리 역사(歷史)의 비극(悲劇)이다. 김윤식은 그래서 찬성(贊成)한 것으로 보면, 만고(萬古)에 역적(逆賊)되고, 불가(不可)/ 불가(不可)/로 문장을 띄어서 확실하게 반대를 했다면, 만고(萬古)에 충신(忠臣)일 터인데, 한일병합 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부의장(副議長)을 역임(歷任)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 되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에 한일(韓日) 정상회담(頂上會談)을 하고 나서 민심은 흉흉하다. 일본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이고 위안부나 징용문제도 강제성이 없었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한일 문제를 푸는 데는 일본인들의 사죄 사과 반성에 달려있는데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다. 일본 정부 발표와 한국 정부 회담 내용 발표가 달라서 국론(國論)이 분열(分裂)이 되고 매주 주말이면 세종로 거리에는 윤석열 퇴진 탄핵 집회가 열리고 있다. 국민(國民) 자존심(自尊心)과 민심(民心)의 역린(逆鱗)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정치란 민심을 편안하게 하는데 있다. 이번에 들어난 미국의 도청 의혹을 두고도 윤석열 정부는 박정희 정부와 닮은꼴로 대응한다고 국민을 분노케 한다. 지난 70년대에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박정희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자 한국 정부가 미국 측에 항의하기는커녕 도청 사실을 공식 부인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던 비굴한 모습과 겹쳐진다. 유출 문건은 김성한 이문희 대화 내용이다. 미국은 "가짜 문서는 아니다"라는데 한국은 위조를 강조한다. 자유 주권국가인 대한민국 민심의 역린을 건드리는 굴종 외교다. 강태공(姜太公)이 주나라 문왕에게 정치 멘토로써 준 교훈이 정치란 천하지천하(天下之天下)여야 한다고 했다. 5년 정권을 맡은 집권 정부는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강태공이 말한 정치란 천하지천하다. 지지하는 사람만 믿고 정치를 하면 실패하는 정부가 되고 만다는 것이 정치 논리다. 윤석열 정부는 강태공의 말을 정치적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교훈(敎訓)이다. 오늘은 전한시대(前漢時代) 왕소군(王昭君)이 흉노 땅에 시집간 시(詩)로 역사를 반추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