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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54
마태복음 6장 9-13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둘째 간구는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의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눅17:21)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세워져 결국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은 이 일을 위하여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사 우리가 더욱더 주께 굴복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아가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주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흥하게 하시기를 구해야 한다고도 가르칩니다. 반대로 주의 나라가 완성되어 주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기까지 마귀의 일들과 주를 대적하여 높이 오르는 모든 권세들과 또한 주의 거룩한 말씀을 대적하는 모든 악한 도모들도 있기에 그러한 것들이 멸하기를 구해야 한다고도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셋째 간구는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요리문답은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무런 반대 없이 주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럼 왜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주의 뜻에 순종하도록 기도해야 하는가?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자신의 뜻은 늘 악한 반면, 주의 모든 뜻만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직분과 소명의 의무들이 있는데, 주의 뜻을 따라 기꺼이 신실하게 수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때 요리문답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하늘의 천사들로 해석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하여 작정하시되 작정하신 그대로 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선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명령된 형태로 계시되어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분리할 수 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처음 세 가지 간구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인데,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주의 나라가 임해야 하고 또 주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를 올바르게 알고, 아는 바에 따라 주를 거룩히 높이고 영화롭게 하고 찬송하는 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 받아 더욱더 주께 굴복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간구와 세 번째 간구는 첫 번째 간구를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두 번째 간구와 세 번째 간구만이 아니라, 오늘부터 살피게 되는 네 번째 간구부터 여섯 번째 간구 역시 궁극적으로는 첫 번째 간구를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첫 번째 간구부터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간구는 우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나머지 간구가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간구가 아니란 것입니다. 실제로 처음 세 개의 간구도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 그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대상도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사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네 번째 간구부터는 우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죄를 사해 달라는 것, 그리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악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부분을 염두 해 두고 오늘 넷 번째 간구 내용을 살피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25문입니다.
125문. 넷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인데, 이는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사(시104:27-30, 145:15-16, 마6:25-34),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심과(행14:17, 17:25, 약1:17) 또한 주께서 베푸시는 복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수고도, 주의 은사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인정하게 하시며(신8:3, 시37:16, 127:1-2, 고전15:58),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옵소서(시55:22, 62:1-12, 146:1-10, 렘17:5-8, 히13:5-6).”라는 것입니다.
일단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 ‘양식’은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해석입니다. 즉 육신의 필요와 관련해서 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섯 번째 간구인 죄 용서와 여섯 번째 간구인 시험에 들지 않는 것, 악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하는 것은 육신의 필요보다는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이해 아래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왜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만 기도하도록 하고, 우리의 영적인 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도하도록 하는가 할 때 하늘의 것에 비해 이 땅의 것들이 얼마나 작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육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영적인 것을 위한 기도가 더 길어야 한다고 교훈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시는데,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가 그 내용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그리고 25절 이하로 넘어가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신 것 때문에 무분별하게 구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한에서 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욕심을 따라 구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으로만 구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때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먹고 마시는 것, 더 나아가 입는 것을 포함합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사회의 안정 등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영적인 복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복이 양식이라는 말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이것을 제유법이라고 하는데, 어느 하나를 가지고 같은 종류의 전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이 세상 복과 관련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종 우리가 실수하는 것 중 하나가 세상의 복과 관련해 우리 힘과 능력에 달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고 마시게 한 것은 기적의 역사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힘과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면 주신 것을 거두어 먹을 뿐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시면 그것을 받아 마실 뿐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이런 기적의 역사가 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수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다보니 수고하여 거두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노력과 열심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7-18) 사람들은 다 이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힘쓰면 모든 결과가 나로 인해 주어지는 줄 압니다. 그래서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 능력이라고 하는 것, 내 손의 힘이라고 하는 것을 주신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고자 하시면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네 번째 간구와 관련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을 기도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설명한 바 있지만 하나님의 산물에는 창조에 속한 선물과 창조에 속하지 않은 선물이 있습니다. 창조에 속하지 않는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기업으로, 자신을 가장 큰 상급으로 소개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소유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에 속하지 않는 선물만이 아니라 창조에 속한 선물도 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세상의 것과 함께 저 세상의 것도 주십니다. 소위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은 창조에 속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이 땅의 것과 다른 점은 이 땅의 것이 일시적이라면 천국은 영원한 것으로 있습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영원한 선물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저들에게도 하나님은 창조에 속한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지금 양식이라는 것은 이런 일시적인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과 관련해서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선물은 신명기 8장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 수고와 노력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분류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요리문답은 보면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도록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더 중요한 내용은 이후에 설명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심과, 또한 주께서 베푸시는 복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수고도 또한 주의 은사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네 번째 간구를 통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구하도록 하시는가?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하도록 하시는가?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우리의 건강이나 사회의 안정 등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시는가? 이 모든 것은 창조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창조에 속하는 피조물일 뿐인데, 그것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일 뿐인데, 왜 일시적인 것들까지 구하도록 하시는가? 이 기도를 가르치고 있는 마태복음 6장에서조차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고 말씀하시는데, 왜 주님께서는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가?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육적인 복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심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주께서 베푸시는 복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수고도, 주의 은사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가? 신명기 8장 3절에 보면 만나와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양식이 없어 불평 불만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먹습니다. 그러나 만나 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만나를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만나를 먹고 육체가 힘을 얻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것으로만 사는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까지 알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6:48-50) 즉 저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자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만나를 먹고 살았지만 정작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은 받지 못한 자로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베푸시는 복이 없다면 아무리 염려할지라도, 아무리 수고할지라도, 그리고 그런 염려와 수고를 통해 육신을 위한 것들을 채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일시적인 복으로 일시적인 유익은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영원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사실 불신자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5:45). 그러므로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지 우리 몸에 필요한 것만 주고자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것들만 주고자 하십니다. 혹 우리 몸에 필요한 것들을 줘서 그것이 선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만, 준 것으로 인해 우리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라는 것, 또한 주께서 베푸시는 복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수고도, 주의 은사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인정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데, 우리가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피조물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수고와 내 노력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순간 내 수고와 내 노력으로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을 채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을 채웠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는 유익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 3절의 경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양식을 구한다고 할 때 양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양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몸에 필요한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어떤 피조물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레미야 17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5-8) 이와 같은 경고는 이사야 31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31:1-3)
요리문답 자체를 통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양식을 구하라고만 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 그것도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도록 구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그것을 구함으로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것은 기도라는 형태를 늘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일용할 양식, 그것도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도록 구하라고 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한없는 욕심을 억제하고자 하심이요, 역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의 잠언을 통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기도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 이외에 어떤 것을 베푸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하고 필요한 목적을 위하여 비축해 두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요셉이 보여준 모범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다가오는 가뭄에 대한 경고를 받고서 풍년에 거두어들인 것들을 비축했다가 흉년과 가뭄의 때를 대비했습니다(창41:48).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그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62편 10절입니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둘째,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을 남용해서는 안 되며, 사치를 피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5절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셋째,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여겨야 합니다. 청지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잠시 맡기게 하신 자입니다. 왜 욥이 주신 이도 여호와요, 거두신 이요 여호와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지만 그것은 거두시기까지 자신에게 맡기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반드시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필요에도 사용할 수 있으나 모든 사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권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네 번째 간구와 관련해서 덧붙이자면, 양식이라고 할 때 반드시 우리 몸에 필요한 것들에만 제한이 되는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네 번째 간구는 우리 몸에 필요한 것들이라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간구는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양식이라고 할 때 우리 몸에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으로는 볼 수 없는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2-34) 앞서도 언급했지만 신명기 8장 3절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요한복음 6장 27절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러자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6:2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9). 그러면서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또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5-57)고 말씀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생명의 양식으로 여기면서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구한다고 할 때 우리 몸의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영혼에 필요한 양식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주셨다면,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고 마시면서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