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임, 정선옹주 묘역을 나와 온수역을 거쳐 반대쪽 유순정, 유홍 묘역을 찾았다
온수역에서 걸어 가자니 오정초를 거쳐 은하수수목원아파트 뒤 산으로 올라 산길을 통해 동보아파트까지 돌아들어가니 묘역입구가 나타났다
류순정(柳順汀)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림파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1506년의 중종 반정에 참여하였다.
본관은 진주로 자는 지옹(智翁). 아버지는 목사 류양(壤)이다.
박원종, 성희안, 홍경주와 함께 중종 반정에 참여했고 이들 중 박원종과 홍경주 같은 이들이 뒤에 훈구파로서 축재와 전횡이 만만치 않아 유순정까지 싸잡아 훈구파의 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유순정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엄연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훈구파들과 같이 역사적 비판 대상의 인물에 들 사람이 아닌 사림파이다.
목사를 지낸 목사 류양(柳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암기에 능했고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그와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한다. 김종직은 성리학 학문 이외에 호신술로서의 활쏘기와 무예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도 무예에서는 그가 앞섰다 한다.
1487년진사를 거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전적에 등용되었다.이어 훈련원정으로 승진하고 배편으로 비밀리에 전라도지방에 침투한 왜적을 수색, 포획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 무재를 인정받아 1491년 북정도원수 허종(許琮)의 막하로 야인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평안도평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 사헌부정언 등을 두루 거쳐 연산군이 즉위하자 사헌부헌납으로서 기우제를 반대하던 임사홍(任士洪)을 공격, 비판하였고 직위를 이용해 권력남용을 하던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을 탄핵하였으며 한편, 야인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가 되었으며, 문신으로서의 활솜씨를 인정받아 특별히 홍문관 부응교로 배수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가 되었다가 의주목사로 임명되어 변방 수비에 힘썼다. 이어 압록강 연안의 야인정벌 때는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여진족 부락의 정세를 정탐하고 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군자물자 확보와 성곽의 보수와 수축 등 군비강화에 노력하였다.
이후 공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공조참판이 되고, 1503년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504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평안감사 재직 중 연산군의 밤사냥에 대해 밤사냥의 불편함을 진언하였다가 임사홍이 이를 문제삼으면서 추국당하였다.
그 뒤 연산군의 조정에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1506년 이조판서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홍경주 등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1506년초 박원종 등이 김종직의 문하생인 유순정과 성희안, 남곤 등에게 사람을 보내 중종 반정을 지지해주고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때려죽이고, 아버지 성종의 첩 두 명과 이복 동생 두 명을 때려죽인 연산군을 도덕적 패륜아라고 규정한 유순정은 성희안과 함께 적극 호응하여, 반정에 가담하였다. 그해의 중종 반정에 병력을 동원, 반정이 성공하면서 이후 이조판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1506년 성희안, 박원종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어 정국공신 1등(靖國功臣一等)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로 특진, 청천 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하면서 폐지한 경연부활에 앞장섰다. 이어서 우의정이 되고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직하고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고 역모를 꾸미는 것을 적발,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관에 책록되었다.
1508년 평안도 경계지역으로의 이주와 함께 병력을 양성케 하였으며, 그해 평안도 인산(麟山), 강계군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자물자 조달을 강화하였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당시 경기도 인천, 김포, 양천, 통진 일대에 흉년으로 강도들이 횡횡하자 박영문(朴永文)·유담년(柳聃年)을 포도대장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처리하게 하고, 떠돌이 유민들의 정착 방안인 안집책(安集策)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경상도도원수로 출정하여 전란을 평정하였다. 1510년 경오왜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병사를 총괄하였으며, 다시 도원수로서 현지에 출동하여 삼포(三浦)의 난을 평정하고, 각 포에 왜구로부터 방어할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때 대간들로부터 식화(殖貨, 재화를 늘림)를 이유로 탄핵당했으나 오히려 중종으로부터 군공을 치하받았다. 이어 1512년 성희안의 양보로 의정부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박원종과 성희안 등의 축재와 전횡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유순정 자신은 부패행위를 일삼지 않았음에도 다른 김종직 학파 동문, 선후배들의 시선은 냉담하였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서 영의정이 된 지 2개월만인 1512년에 사망했는데, 졸(卒)하기 20여일 전까지 조정에 나아가 의논하고, 고찰하여 상소하며 의계했다.
사후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바로 시호는 무안(武安)으로 내려졌으나 뒤에 개시되어 문정(文定)으로 고쳐졌다.(지금까지 위키백과와 다음백과 참조)
비석엔 시호 문정이 후에 문정왕후의 탄생으로 다른 문자 문성을 얻었다는 비음기가 쓰여있다고 관리하는 후손분이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손녀사위로 당대 최고의 문벌가문이자 3대 영의정을 배출한 홍언필, 홍섬의 남양홍씨 가문 홍섬을 두어 이렇게 홈섬의 문자로 신도비들이 남겨져 있다
오늘 윤석열 탄핵차 서울로 왔기에 당대 문성공 류순정처럼 윤석열 밑에 있는 장관과 장군들이 연산군 폐위시키듯 미리 간언하든가 알아서 하야시켰으면 만고 역사적으로 충신이 될 텐데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선 연산군 같은 윤석열을 돕는 반란자, 반란군만이 넘쳐나고 있음에 역사적으로 안타까움과 개탄을 금치 못한다
이 묘역은 반정공신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류순정이 1512년(중종 7년) 53세에 세상을 뜨자, 중종이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과 온수동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작동에 이르는 약 300만 평의 땅을 사여[賜與]하면서 조성되었다.
류순정의 묘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80여m 떨어진 곳에 류순정의 아들로서 역시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된 류홍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류순정 · 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 지역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으로, 조성 시기도 16세기 전반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에 속한다.
특히 중종반정의 1등 공신인 류순정의 묘역은 조성 당시 왕족에게만 내려주던 장흥고의 관곽을 사여할 정도로 국가적 관심 속에서 조성되어 공신묘역의 조성 방식을 알게 하는 중요자료이다.
문성공 유순정 묘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오르면 진산군 류홍의 후배위인 증정경부인 평창이씨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 묘에서 내려와 맞은편 진산군 류홍의 묘역으로 오르면 류홍 묘의 동쪽 아래로 다른 곳에서 이장된 그 후손 묘 5기가 자리하고 있다.
류홍(柳泓,1483-1551)은 1506년 아버지인 류순정(柳順汀, 1459-1512)과 함께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성공으로 이끈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冊祿)되었다.
류홍의 자는 자연으로 류순정과 안동권씨 사이 맏아들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매우 능했으며 장성해서는 부친의 재능을 이어받아 무장으로 출중하였다
중종반정 당시 아버지 순정을 따라 반정군(反正軍)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정주목사,충청도병마사,경상우도병마사,전라도수군절도사,북병사 등 변경의 장수직을 두루 역임 하고 말년에는 훈련원도정을 거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6년 아버지를 따라 반정에 성공하여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이어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 공조정랑이 되고 1510년 류순정이 삼포왜란 당시 도원수로 출정하자 막료로 참가 부친을 도와 난을 평정하고 내직으로 들어와 내자시와 군기시첨정을 지냈다
1511년 무과에 급제하고 사복시부정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훈련원부정이 되었는데 겨울에 부친상을 당했다
1515년 외직으로 나아가 제포첨사로 있을때 첨사들이 뇌물을 받고 왜인을 무시로 출입하게 했던 폐습이 많았는데 법규에 따라 이를 깨끗이 처리하여 명성이 높았다
1516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 이후 원주 정주목사 그리고 충청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539년에는 종2품 품계인 가선대부로 오르고 회령부사 함경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1544년 진산군에 봉군되고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는 금직제장으로 위사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이 부분이 꺼림직하다 을사사화 후 공신 녹훈이라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어쨌든 1551년 가의대부 겸 훈련원도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그 해에 병이 들어 별세하여 지금의 묘역에 예장되었다
후손으로 통훈대부온양군수인 류홍 아들 류사필
손자 통훈대부군자감정으로 류준
류홍 증손으로 사헌부감찰 류중광 고손으로 좌승지 류순 5대손으로 진양군 류시경 6대손으로 진흥군 류식이 있다
묘역 맨 아래엔 류홍의 사위 홍섬과 려성군 송인이 쓴 신도비가 근 500년이 지났는데도 새것과 같이 남아있다 복원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