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부에서 안목사에 대한 불신임이 나오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안대벽 목사와 나요한 선교사 사이에서 발생한 주택에 얽힌 불화가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안목사는 8ㆍ15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일하였고, 안목사는 관제청 고위직원으로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서울 필동에 있는 적산가옥에 입주하였고, 그곳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서울침례교회는 이곳의 가정예배로 시작되었다.
1950년 4월경, 미남침례회 해외선교부에 소속된 나요한 선교사 부부가 안대벽 목사의 배려로 같은 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나선교사는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곧바로 필리핀으로 떠났고, 안목사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 뒤, 9ㆍ28 서울 수복으로 안목사는 다시 귀가했고, 나선교사도 경남도지사 양상봉 씨를 통해 안목사의 귀국 요청 전보를 받고 1951년 3월에 한국에 입국하여 다시 합류했다. 그들은 서로 언어가 통하였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는 데 어려움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문제는 1953년 나선교사의 주선으로 안목사 부부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2년간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발생했다. 안목사가 없는 사이에 통역을 맡아 달라고 천거했던 장로교에서 전입해 온 조응철 목사가 나선교사의 절대 신임을 받고 그를 보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선교사를 가운데 놓고, 조목사와 안목사가 대립하여 치열한 냉전기류가 형성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선교사는 그 둘의 사이를 조정하려 했지만, 안목사가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 조목사는 자기 나름의 방어세력을 형성해 나갔고, 안목사는 총회실행위원들과 친구들의 힘을 통해 조목사를 제거하려고 했다. 급기야 안목사는 조목사가 신학교 교무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교수로 있던 한기춘 목사와 강사 서동순 씨와 모의하여 조목사의 과거 비리를 들추어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 인해 1956년 조목사는 마침내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안목사의 문제는 조목사의 제거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57년 7월 29일부터 충남 무창포 해수욕장에서 개최된 교역자 하기수양회에서 안목사를 중심으로 한 “주류파”와 장일수 목사를 중심으로 모인 전입교역자들의 “신진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장목사는 꾸준히 전입자들을 귀합하여 자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안목사와 나선교사의 관계는 더욱 갈등이 심화되었다.
1954년 4월에 나요한 선교사는 남침례교 미국종군목사들을 초청하여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국장병들을 위한 기념교회를 세우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종군목사들의 헌금과 남침례교 선교부의 보조로 서울시 충무로에 서울침례교회의 신축공사가 착공되었다. 석조건물 4층, 연건평 298평의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 때 그 자리에서 나선교사는 자신이 한국에 와서 교회와 각 기관을 세워 부흥을 시켰다고 보고를 했다.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배석했던 안대벽 목사가 일어나서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며, 반 백 년의 선교사역을 이룩한 펜윅 선교사를 소개했다. 그리고 일제의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사를 언급하게 되자 나선교사는 말할 수 없는 창피를 당했다.
이때부터 나선교사의 마음에 교단분열의 씨가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 때부터 그는 펜윅 선교사의 후예들이 있는 한 자기의 뜻대로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 그는 사사건건 분리작업을 시도했다. 한 사람의 영웅심리가 엄청난 분열을 초래했던 것이다. 물론 총회 때마다 불만을 토로했던 타 교단에서 전입한 교역자들 일부도 동참했다. 그리고 일부 다른 교역자들도 직간접으로 감정이 대립되어 분열에 가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분열의 단초는 본 교단과 선교부가 제휴할 때 주 안에서 맺은 약속을 지켜야 함에도 선교부가 1959년 3월 17일 총회전도부장인 안대벽 목사의 부부를 불신임함으로써 촉발된 것이었다. 이 일이 결정적으로 교단을 분열시킨 원인이었다. 일방적으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는 온당치 못한 처사다.
설상가상으로 안목사와 나선교사의 관계는 서울 필동의 주택 소유권 문제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 집은 본래 조선 이씨 왕가의 재산인데, 이순도 여사의 연고로 안목사가 불하 받아 소유하게 될 가옥이었다. 그 당시 이여사는 정식 이씨 왕궁의 비서직으로 임명을 받고 외국 국빈이 오면 통역 및 안내를 담당했다. 그런데 그 때 안목사 부부는 미국 텍사스신학교에서 연수중이었으므로(1953-1954년), 주택 불하 통지를 받았지만 직접 그 일을 수행할 수 없어서 친지를 통해 나선교사에게 돈을 빌려 우선 불하하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목사가 귀국하여 빌린 집값을 상환하려 하자, 나선교사와 의견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중간 역할을 잘못한 까닭인지 모르나, 안목사는 나선교사로부터 그 돈을 빌린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선교사는 안목사가 돈이 없으므로 자기 돈으로 불하를 받아 자기 소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결국은 동양 총무 크리어 박사에게 안목사가 진정서를 보내어 소유권 인정을 받아 입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선교사는 이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일들은 나선교사로 하여금 안목사 부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일로 인해 나선교사는 안목사를 신임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안목사의 불신임을 결의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주류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장일수, 한태경, 민영호, 조효훈, 김기석, 이덕수, 전흥상, 유영근, 윤덕훈 등 여러 목사와 구두원, 우락수, 나요한, 마라 등의 선교사들이 사전 결합하여 총회의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선교부는 승산이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성명서를 전국 각 교회에 발송했다. 선교부 측에서는 만의 하나 여의치 않으면 분열되더라도 자신들을 지지하는 교회들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선교부의 행동은 총회 임원들을 과소평가한 소치였다. 선교부의 성명서가 전국 각 교회에 발송되자, 그에 대한 반발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각 구역, 교회, 개인의 반박성명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안대벽과 이순도는 어엿이 총회에서 선출한 임원인데, 선교부가 그들과 같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불신임을 한 것은 곧 현 총회와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속셈이라고 지적하면서 몹시 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