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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옥중(?)예배로 하룰를 시작한다>의 줄거리:
보이고 들리는 등 감각을 통해서 세상이 밀물처럼 들어와 마음에 대해 지배력을 발휘하는 속수무책의 상태로 일상을 시작하고 진행하기를 반복하는 한 구원 받은 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혜는 전무합니다. 받은 구원을 써먹고 그 구원의 혜택이 활성화된 상태로 일상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선 예배 후 일상"의 방식을 고수해야만 합니다.
옥중(?)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사도행전 16:35~40)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옥중(?)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옥중(?)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감옥에 들어가 있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옥중예배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드린 예배는 예배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본질적 요소를 배움으로써 예배에 이어서 하루를 사는 先예배 後일상의 방식을 고수해 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 37절을 보면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때리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데로(δέρω)로써 “사람의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당한 태장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입니다.
앞서 반복하여 말씀드렸지만 바울이 풀려날 때 비로소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는 이 장면은 굉장히 특별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일찌감치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다면 가죽이 벗겨질 정도의 혹독한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지하 감옥에 갇혀 발이 차꼬에 채워질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신분을 밝혔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집행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더 이상 감옥에 묶어둘 명분을 찾지 못하여 석방을 결정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나가는 시점이기에 이제 와서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는 것은 바울과 실라에게 특별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힌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이 나오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봅니다.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서 가죽이 벗겨질 정도의 태장을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혀서 발이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기도와 찬양을 하였을 때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지만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간수가 자결하려는 것을 막고 간수와 온 집안을 구원하고 석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이 이어지며 뒤늦게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이 모든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바울 한 사람에게만 집중해서 살펴본다면 이 과정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겪은 과정은 우리가 날마다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통과해야만 하는 두 지점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매일 통과해야 할 첫 번째 지점은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매일 통과해야 할 두 번째 지점은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이 두 지점을 통과한 뒤에야 우리의 삶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지점이 예배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요?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 기도와 찬양을 하였습니다. 기도와 찬양은 만남의 사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사건이고, 찬양은 하나님을 유일한 상대자로 마주봄의 증거가 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가는 기도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나오는 찬양 이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즉, 바울과 실라의 옥중예배는 예배의 본질적 요소가 완벽하게 충족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기쁨이 되시고 좋음이 되십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유일하게 기쁨이신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기쁨의 표현으로 찬양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마주하실 수 있게 되었기에 나의 몸과 연관성을 가진 삶의 영역 안으로 임재하시고 개입하실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예배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유일하게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에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떠난 이 세상의 삶에 임재하시고 개입해나가십니다.
이번 휴무기간 중에 많은 분들이 코로나로 인해 예배당에 나가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코로나뿐만이 아닙니다. 아예 예배당 조직으로부터 빠져나와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 또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예배당에 갈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주일마다 드리던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궁금증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기도,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찬양,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임재에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옥중예배에서는 이러한 본질이 고스란히 성취되어 있습니다. 다만 옥중예배에 특이한 점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예배가 우리의 일상이 되기 위하여 꼭 알아야 되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옥중예배가 이루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배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감옥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알아야만 하는 본질적 마음가짐의 문제를 가르쳐줍니다. 감옥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택한 장소였습니다. 감옥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장소이자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서 나타나야만 하는 특징이자 본질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기존의 예배생활에서 간과되던 부분입니다.
예배는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상태가 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를 중단하고 모든 일을 멈추는 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예배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감옥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사람들 앞에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이라 칭송을 받는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외침에 의한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 마음이 높아지는 압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한 분만을 만나기 위해 택한 장소가 감옥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나서려는 자는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나 단체 안에서 출세를 원하는 마음으로는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5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사십 년 광야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연습하고 훈련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장소이고 인간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을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던 것은 바로 세상과의 격리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격리와 분리가 없이는 진정한 예배는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시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들과 떨어져서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 세상과 격리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셨던 것은 예배가 아닌 사역을 위함이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한적한 곳을 찾아서 제자들까지도 등지고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절차를 수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예배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의도적으로 예배를 위한 장소로 감옥을 택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의도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격리된 상태를 만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시작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1절을 보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고가 나타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예배로서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일하기 위하여 예배당에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인들도 만나고 주어진 일도 하고 그 과정에서 절차상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예배는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가죽이 벗겨질 정도의 매를 맞고 감옥에 던져지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과의 분리이고 격리입니다. 예배는 주일날 예배당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 조직에 연연하는 동안에는 또 다른 세상을 찾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떠나기 위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완전히 끊어지는 장소를 찾고 그곳에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기도함을 통하여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이 몸과 몸의 연관성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떠나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하고 기도함을 통하여 마음을 하늘로 보내면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서 좋거나 싫은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과 나의 마음이 일대일로 마주하면서 기쁨의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는 상태가 되면 땅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은 유체이탈을 하듯이 육체를 떠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 사람이 갖고 있었던 인격적 특성과 능력과 이력과 로마 시민권과 같은 자격증 등의 몸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로부터 마음은 떨어져야만 합니다. 철두철미하게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여기고 격리된 자로 여길 때에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예배는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드디어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에 상대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좋거나 싫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만이 나오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떠난 몸에서 비롯된 성격과 특성과 자질과 능력과 자격과 스펙 같은 모든 것들을 지진이 일어나듯이 개입하시고 장악하셔서 삶을 시작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로 하루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지진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의 임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돈이 벌리는 것을 좋아하고 돈이 벌리지 않는 것을 싫어합니다. 건강한 것을 좋아하고 병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좋고 싫음의 노예가 된 상태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산 결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돈이 벌려도 좋아하지 않고 돈이 벌리지 않더라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건강해도 좋아하지 않으며 병이 들어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가기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좋은 것이란 하늘에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이고, 싫은 것이란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격리되고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격리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의 주체가 되셔서 살아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과의 충돌이고 상충이고 지진이고 격돌이고 갈등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돈 버는 것을 좋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사업장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에는 지진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돈이 벌리면 좋아하고 안 벌리면 싫어하고 어떻게 하든 돈을 버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미 하나님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장악되어서 하나님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 모습이 지진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뒤늦게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힌 것은 집행자들을 벌벌 떨게 함으로써 보상을 받고자 함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기를 주장하고 높이고자 함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몸과 바울에게 주어진 성격과 자질과 능력과 자격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장악하시고 사용하시는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것도 하나님이 주장하셔야 할 내용입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예배하는 자입니다. 예배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간 바울과 실라의 의도를 배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할 때에는 남편이라는 신분도 버려야 하고 아버지라는 신분도 버려야만 합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이 세상의 모든 신분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림받은 자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과 실라의 옥중예배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감옥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격리된 자들의 장소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여길 때에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첫머리에 올라타게 됩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라는 의식이 없이 예배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배가 진행되고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일대일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기쁨과 감사와 충만한 찬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떠난 몸과 연관된 모든 일을 장악하시고 강한 신념과 확신에 찬 말을 하게 하시며 삶을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바울의 입을 통해 나타난 말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예배 없이 시작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첫머리에 올라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의 싫음과 좋음에 대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고백하고 일대일의 만남을 이루는 상태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몸을 장악하시고 재료로 삼으셔서 나의 삶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가 구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예배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버림받은 자의 마음이 아니면 세상을 떠날 수가 없고 오롯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로마 시민권자임을 침묵하여 가죽이 벗겨질 정도의 매를 자처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를 바랐던 것은 예배를 위함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했던 바울의 마음을 고스란히 배워서 골방에서라도 화장실에서라도 기도하며 찬양을 기점으로 나의 몸과 연관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장악하시는 지진의 삶이 일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곳마다 지진의 발원지가 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적으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로 자처하게 하시고, 기도하고 찬양에 이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내 몸과 모든 것을 장악하시고 주체가 되어 사시는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