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대주(對酒)라는 제목의 시(詩)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다투는가?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번개같이 빠른 세상에 이 몸을 맡겼는데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부자이건 가난하건 우선 즐겁게 살지니
不開口笑是痴人(부개구소시치인)
큰 소리로 웃고 살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일세.
이 시에서는 인생이란 우주의 광대함에 비해 반짝하고 사라지는 부싯돌 불빛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 부질없는 인생이니만큼 웃으면서 술 한 잔 하는 것은 어떠한가? 한바탕 웃음으로 시름을 떨쳐내야 하는 것이다. 이 시는 음주의 효용(效用)이 인생의 허무감을 이겨내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당나라 특유의 낭만 정신을 그려내고 있다.
명분도 없는 부질없는 싸움이나 별 성과가 없는 전쟁을 비유한다. 와우각상쟁(蝸牛角上爭)의 준말이며 와각상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과 같다. 장자 ‘칙양(則陽)’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이 제나라 위왕(威王)과 맹약을 했으나 위왕이 배반하자 혜왕은 노여워하여 자객을 보내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다. 당시 이 말을 들은 공손연(公孫衍)이 만승의 군주가 필부를 보내 원수를 갚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당하게 공격하라고 하였다.
계자(季子)라는 자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공손연의 의견에 반대했고, 화자(華子) 역시 공손연과 계자의 의견이 모두 잘못됐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이들의 논쟁이 계속될 뿐 결말이 나지 않자 혜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혜시(惠施)가 현인 대진인(戴晉人)을 천거하여 혜왕과 만나게 했다. 대진인이 달팽이를 아느냐고 묻자 혜왕은 그렇다고 했다. 대진인은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있는 나라는 촉씨(觸氏)라 하고,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는 만씨(蠻氏)라고 했습니다. 때마침 ‘이들이’ 서로 영토를 놓고 싸워서 주검이 몇 만이나 되게 즐비했고 도망가는 군대를 쫓아갔다가 십오 일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습니다(有國於蝸之左角者曰觸氏, 有國於蝸之右角者曰蠻氏, 時相與爭地而戰,伏尸數萬, 逐北旬有五日而後反).”
말도 안 된다는 혜왕의 말에 그는 천지 사방 위아래의 공간에 끝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혜왕이 없다고 하자 그의 말은 이어진다. “무한한 공간에서 노닐게 할 줄 알면서, 이 유한한 땅을 돌이켜본다면 이 나라 따위는 있을까 말까 할 만큼 아주 하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혜왕에게 대진인은 위나라나 제나라도 겨우 촉씨와 만씨처럼 별 볼일 없는 그런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결국 전쟁은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시인 백거이도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 때문에 다투는가(蝸牛角上爭何事)-‘대주(對酒)’”라고 했듯이 하잘것없는 다툼을 버리고 대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
江村(강촌) 杜甫(두보)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自去自來堂上燕(자거자래당상연)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맑은 강 한 굽이 마을 감싸 흐르는데
긴 여름 강촌에 모든 일 한가롭구나.
제비는 마음대로 지붕 위 처마를 들고나고
강물 위 새는 서로 친하고 가깝게 날고 있네.
늙은 아내 종이에 바둑판 그리고
어린 아들 바늘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네.
병 많은 내게 필요한 건 오직 약물뿐이니
미천한 이 몸 이 외에 또 무엇을 바라리오.
두보(712-770)는 이백과 함께 중국 대표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 불린다. 이 시는 안록산의 난으로 긴 유랑 생활을 하다가 사십 구세에 성도에 정착해 가족들과 한가히 지낼 때 지은 것이다. 두보는 가족과 함께 강이 흐르는 마을에 정착해 일시적이나마 여유와 안정감을 누렸다. 강촌의 한가로운 모습과 분위기가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성으로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다.
飮酒(음주) 陶淵明(도연명)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년견남산)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此間有眞意(차간유진의)
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
사람 사는 동네에 초가집 짓고 살지만
말과 수레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소.
어찌 이렇게 살 수 있냐고 묻지만
마음이 멀어지니 사는 곳이 한가롭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다가
문득 고개 드니 남산이 눈에 들어오네.
산기운 아침저녁으로 맑고 곱고
새들 짝 지어 날아서 돌아오네.
자연과 함께 사는 이 내 마음
말로는 표현할 길 없어라.
도연명(367-427)은 중국 동진 때 전원과 술을 벗 삼아 살아간 유명한 시인이다. 이 시에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전원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는 멋과 풍류가 그려져 있다. 한가롭게 국화를 꺾어들고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의 참뜻을 터득코자 했던 은일 처사의 형상이 담겨있다. 도연명을 떠올리면 그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적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시 속에 그림이 담긴 작품이다. 인가에 살고 있지만 자연과 합일된 삶을 추구하기에 무한한 자유와 낭만을 누리는 것이다.
石蟹 석해
負石穿沙自有家 부석천사자유가
前行却走足偏多 전행각주족편다
生涯一掬山泉裏 생애일국산천리
不問江湖水幾何 불문강호수기하
負(질 부) 穿(뚫을 천) 沙(모래 사)
家(집 가) 前(앞 전) 却(물러날 각)
走(달릴 주) 偏 (기울 편) 涯(물가 애)
掬(잡을 국) 泉(샘 천) 裏(속 리) 問(물을 문)
湖(호수 호) 幾(몇 기)
가재
돌 지고 모래 파면
저절로 집이 되고
앞으로 가고 뒤로 가니
다리 또한 많구나
한 평생 한 옴큼
샘물에서 살아가니
강과 호수 물이
얼마나 많은지 묻지 않네
이 시는 퇴계가 15세에 지은 「가재」란 시이다. 소년 퇴계가 샘물 속의 가재를 보며 지은 것이다. 가재는 새우와 게의 중간형으로 한자어는 석해(石蟹)이다. 가재의 몸은 붉은 빛을 띤 갈색인데 남한과 중국 동북부의 오염되지 않은 1급수에 산다.
소년은 샘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맑은 샘물에 가재 한 마리가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다. 가재의 집이라야 별 것 아니다. 샘물에 깔린 작은 돌 몇 개면 족하다. 시인은 가재의 몸놀림을 자세히 살펴본다. 가재는 돌을 헤치고 모래를 파내어 집을 만드는데 정신이 없다. 가재는 앞으로도 잘 기어가며 뒷걸음질도 잘한다. 다리도 새우처럼 양쪽에 다섯 개씩 모두 열 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데 어려움이 없다.
소년은 문득 이 작은 생물에게서 가르침을 얻는다. 작은 샘물 안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가재는 샘물 너머 강과 호수가 얼마나 큰 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가재는 이 작은 샘물에서 사는 것이 만족하기 때문에 강과 호수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은 샘물은 퇴계가 살고 있는 그 곳이며, 강과 호수는 바람 그칠 날이 없는 험한 세상을 뜻한다. 가재는 퇴계 자신을 의미한다. 소년 퇴계는 조용한 샘물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가재를 보며 이처럼 깊은 의미가 담긴 시를 표현했다. 예리한 관찰력과 깊은 생각을 담은 시이다. 평범하면서도 교훈을 주는 시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퇴계가 생각했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퇴계는 자연과 함께 생활하며 인품을 바르게 하고 학문 연구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미리 알 수 있다. 이 시는 퇴계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미리 그려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이 시에서 말했던 것처럼 늘그막에 조정의 높은 벼슬을 모두 내어놓고 작은 샘물 안의 가재가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처럼 고향으로 내려와 성리학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는데 만족했다.
遣興(견흥) 許蘭雪軒(허난설헌)
精金凝寶氣(정금응보기)
鏤作半月光(누작반월광)
嫁時舅姑贈(가시구고증)
繫在紅羅裳(계재홍라상)
今日贈君行(금일증군행)
願君爲雜佩(원군위잡패)
不惜棄道上(불석기도상)
莫結新人帶(막결신인대)
반짝이는 황금을 다듬어
반달 모양 노리개 만들었지요.
시집올 때 시부모님 주신 거라서
붉은 비단 치마에 차고 다녔어요.
오늘 먼 길 떠나시는 임께 드리오니
먼 길 다니시며 정표로 보아주셔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진 않지만
새 연인에게만은 달아주지 말아요.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님이다. 김성립과 혼인했지만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는 못했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를 지어 달랬다. 섬세한 필치로 애상적 시풍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이 시에 임과의 변함없는 사랑을 바라는 여성 정감을 그렸다. 그녀는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사후 213수의 시가 중국과 일본에서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夜之半(야지반) 黃眞伊(황진이)
折取冬之夜之半(절취동지야지반)
春風被裏屈蟠蘇(춘풍피리굴반소)
燈深酒煖郞來夕(등심주난낭래석)
節節鋪叙曲曲長(절절포서곡래장)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밤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는 조선 중종대의 명기로서 시조․한시에 빼어났으며 타고난 미색과 가창력으로 당대 풍류 시인들과 호방한 삶을 누렸다. 위의 시는 황진이의 시조를 한시로 다시 옮겨 기록한 것이다.
황진이의 내밀한 여성 정감 표현과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은 탁월하다. 일 년 중 가장 긴 밤을 잘라 고이 보존해 두었다가 애타게 그립던 임이 오신 밤에 한 올 한 올 펼쳐 내겠다는 속마음을 담아내었다.
황진은 서녀 출신으로 신분상 제약을 극복하고자 분방한 기녀 시인․예인으로 활약했으며 한시와 시조가 각각 8수씩 전해진다.
贈醉客(증취객) 梅窓(매창)
醉客執羅衫(취객집라삼)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不惜一羅衫(불석일라삼)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취한 손님 명주 저고릴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 저고리 찢어졌어요.
명주 저고리 하나쯤 아까울 건 없지만
임의 고운 정 끊어질까 두려워요.
매창(1573-1610)은 전북 부안현 아전인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며 거문고 연주도 잘해 류희경․허균 등과 교유하였다. 그녀는 죽을 때 즐겨 연주하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는데 그녀의 시는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현재 58수가 남아있다. 부안군에서는 매년 매창 추모제를 거행하여 매창의 문학과 예술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와 함께 그녀는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의 시조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錦帷(금유) 雪竹(설죽)
錦帷秉却掩重門(금유병각엄중문)
白苧衫襟見淚痕(백저삼금견루흔)
玉勒金鞍何處在(옥륵금안하처재)
三更殘淚不堪聞(삼경잔루불감문)
비단 장막 내리고 중문도 닫아거니
모시 적삼 소매 눈물로 얼룩져요.
화려한 말 타신 내 임은 어디 계실까
삼경에 흐르는 눈물 견딜 길 없어요.
설죽은 경북 봉화 유곡 안동 권씨 집안의 여종 출신으로 빼어난 미모와 시인의 재능 및 가창력을 지녔으며 여종이라는 숙명적 삶을 거부하고 기녀 시인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의 유연한 삶은 조선 중종 때 명기 황진이와 흡사하다. 그의 시에는 애수와 고독한 심상을 여성 정감으로 표현하였다. 별리의 아픔을 초극하고 시로 승화한 전통적 한국 여성 이미지와 접맥된다. 그녀는 여종이라는 신분 등차를 극복하고 황진이․매창에 버금가는 문예 역량을 지녀 한국 대표 기녀 한시 작가로 인정된다. 그녀가 남긴 한시는 167수이며 현재 경북 봉화 유곡의 청암정이 설죽의 유적지이다.
山夕詠井中月(산석영정중월) 李奎報(이규보)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甁傾月亦傾(병경월역경)
산속 스님이 밝은 달빛 탐내어
물 길으며 한 항아리 담아갔네.
절에 가서야 알게 되리니
항아리 물 쏟으면 달도 쏟아지리니
漣漪碧井碧巖隈(연의벽정벽암외)
新月娟娟正印來(신월연연정인래)
汲去甁中猶半影(급거병중유반영)
恐將金鏡半分迴(공장금경반분회)
푸른 이끼 바위 모퉁이 맑은 우물을
새로 뜬 어여쁜 달이 바로 비추네.
길어 담은 물동이 반 쪽 달 반짝이니
거울처럼 둥근 달 반 조각 담아가리.
이규보(1168-1239)는 고려 때의 문인이며 관료였다. 호탕하고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초기에는 도연명의 영향을 받았으나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격을 이룩하였다. 달빛을 탐낸 스님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자연 정취가 무르익은 시정을 담아내었다.
大同江(대동강) 鄭知常(정지상)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어 오는데
임 보내는 남포에 슬픈 노래 울려 퍼지네.
대동강 물 그 언제 마르랴
이별 눈물이 해마다 더해지는데.
정지상은 고려 중기 문신이며 시인이다. 이 시에 그의 문학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또한 이 시는 이별시의 백미로 일컬어져 수많은 세인들이 호평하였다.
특히 3.4구의 기발한 착상은 독자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하며 예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다. 이 시가 당시에 크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작자 자신의 개아적인 슬픔뿐만 아니라 민중의 애환을 동시에 그려냄으로써 그들에게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
기구에서는 비 그친 둑에 돋아난 새싹의 신선한 생명력을 묘사했고 승구에서는 울음소리로 슬픔을 표현해 기구와 승구의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로써 이별의 슬픔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전구에서는 잠시 분위기를 이완시켰다가 결구에서 과장된 대답으로 절묘하게 시상을 수습하였다. 극적 반전과 완곡한 표현으로 이별 정서를 심화시켰다.
野塘(야당) 李滉(이황)
露草夭夭繞水涯(노초요요요수애)
小塘淸活淨無沙(소당청활정무사)
雲飛鳥過元相管(운비조과원상관)
只怕時時燕蹴波(지파시시연축파)
이슬 머금은 풀잎 파릇파릇 물가를 감돌고
작은 연못 맑고 깨끗해 모래조차 뵈질 않네.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은 원래 상관있는 법
때로 제비가 연못 물결 차고 갈까 두렵네.
퇴계 이황(1501-1570)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분으로 따뜻한 인간미와 고고한 학문 경지를 겸비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의 인품을 사모하고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위 시는 퇴계가 18세 때 연곡에 있는 조그만 연못을 보고 지은 것이다. 이 시는 성리학적 사유 의식을 담고 있다.
이슬 머금은 청정무구한 연못은 인욕이 제거되고 천리가 구현된 마음의 세계를 의미한다. 구름이 떠가고 새가 날아가는 것은 천리가 유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제비가 물을 차는 것은 잔잔한 마음의 상태에 인욕이 끼어들어 잔잔하던 마음이 일그러진 상태를 의미한다.
소년 시절 퇴계가 이미 성리학 사고 체계를 확립하여 학문에 전념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순진무구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픈 내심을 표현한 것이다. 성리학 학문 목표가 궁극적으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과 일치한다.
陶山月夜詠梅(도산월야영매) 李滉(이황)
獨倚山窓夜色寒(독의산창야색한)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不須更喚微風至(불수갱환미풍지)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향만원간)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
매화 가지에 달 올라 밝고 둥글구나.
가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지 않아도
맑은 향기 절로 정원에 가득하여라.
퇴계는 남달리 매화를 좋아했다. 매화시 100여 수를 모아 매화시첩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매화는 세속의 티끌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풍속에 굴하지 않는 절개와 봄날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다.
이에 많은 문인들이 달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시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꽃망울을 틔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로서 사랑하였다.
퇴계는 매화ㆍ난초ㆍ소나무ㆍ대나무ㆍ국화 가운데 유독 매화를 가장 사랑하였다. 매화로써 적막함을 달랬고, 매화를 찾는 것을 신선과 봄과 같이 여겼으며 돈독하게 좋아하는 정은 가까운 벗을 대하듯 하였다. 조급할 때나 위태로울 때에도 매화를 잊지 않았으며 매화를 읊음으로써 심사를 의탁하였다.
烏夜啼(오야제) 李東標(이동표)
烏夜啼(오야제)
夜夜烏啼人不眠(야야오제인불면)
烏啼不必便有情(오제불필편유정)
使我如何雙涕懸(사아여하쌍체현)
烏夜啼(오야제)
不恨夜啼烏(불한야제오)
但恨秋宵苦難曉(단한추소고난효)
繡枕鴦衾共君語(수침앙금공군어)
烏夜啼啼亦好(오야제제역호)
까마귀 밤에 울어요.
밤마다 울어 잠 못 이루게 하네요.
까마귀 우는 게 나와 상관없지만
이처럼 눈물 쏟아지는 건 웬일일까요.
까마귀 밤에 울어요.
밤에 까마귀 울건 말건 상관없지만
가을밤에 홀로 지새우긴 참으로 힘들어요.
원앙 비단 이부자리 펴고 당신과 속삭인다면
밤마다 까마귀 울어도 나는나는 좋겠어요.
난은 이동표(1644-1700)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대의명분에 입각한 선비의 전형을 보여 작은 퇴계라는 칭호를 받았다.
악부체 형식의 시에서 고독한 여심의 내면에 감춰진 부재의 임을 그리워하는 내밀한 서정을 집약했다.
임과 함께 하는 밤의 즐거움을 고대하면서 임과의 재회를 가슴 설레는 여인의 심정을 절실하게 그려내었다.
二十樹下(이십수하) 金炳淵(김병연)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인간기유칠십사)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二十(스무). 三十(서러운. 설익은). 四十(망할). 五十(쉰). 七十(이런)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에게
망할 놈 집에서 쉰밥을 얻어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집으로 가서 설익은 밥 먹는 게 나아.
김병연(1807-1863)은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으로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다. 평안도 선천부사였던 조부 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 당했다. 그는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는 풍자와 해학이 기저를 이룬다. 그는 과거 제도의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한시 작시 과정에서 파격과 조롱·야유·기지 기법을 구사해 표현함으로써 울분을 분출하며 야유했다.
打麥行(타맥행) 丁若鏞(정약용)
新獨酒如白(신독주여백)
大碗麥飯高一尺(대완맥반고일척)
飯罷取登場立(반파취등장립)
雙肩漆澤日赤(쌍견칠택일적)
呼邢作聲擧趾齊(호야작성거지제)
須麥穗都狼藉(수맥수도랑자)
雜歌互答聲轉高(잡가호답성전고)
但見屋角紛飛麥(단견옥각분비맥)
觀其氣色樂莫樂(관기기색락막락)
了不以心爲形役(요불사심위형역)
樂園樂郊不遠有(낙원락교불원유)
何苦去作風客(하고거작풍객)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큰 사발 수북 담은 보리밥 높이 한 자일세.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응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하네.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보이는 건 지붕 위 보리티끌뿐일세.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만 하여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는가.
정약용(1762-1836)은 조선후기 대표 실학자며 20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농민의 보리타작 노동과 거기에서 얻는 삶의 즐거운 모습을 그려내었다. 사실성과 현장성이 평민적인 시어의 구사와 함께 잘 어울리는 조선 후기 한시의 전형으로 중농 사상과 현실주의 시 정신을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