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덕지본(孝德之本) - 효는 덕의 근본이다. 이상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무너진 효의 나라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일컬었다. 이는 중국인들의 중화 중심의 세계관에서 주변 민족들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나라로 조선을 꼽았다는 점이다. 중화 중심 사상에서 보면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일 수 있지만 어쨌든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라는 것만큼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 왜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을까?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의 근본 바탕에는 효를 숭상하고 실천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어져 온 중화사상의 기본적인 틀은 동양 삼국 특히 한국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크다. 사상은 그 기원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문화화한 이후부터는 그 시원을 가리기 전에 우리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사상이 유럽의 신화와 사상으로 자리 잡고 오늘날 서양문명의 정신적 토대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한자 문화, 중국 고대 문화의 수용을 통한 한국화는 지극히 문화의 자주화라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고대 정신문화의 토대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천명사상은 덕이 있는 군자에게 하늘이 명을 내려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그를 천자(天子)라 일컬었다. 이 천명사상에서 말하는 군자의 덕(德)이란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덕치(德治)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천명사상에는 만약 군주가 덕치를 하지 않고 백성을 핍박하면 하늘이 분노(忿怒)하여 군주를 내쫓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는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천명사상은 우리 고유의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단군신화 역시 그 천명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단군신화는 하늘의 명을 받아 신시를 베풀었다. 그 하늘의 명은 홍익인간의 실천이며 모든 정치의 중심은 홍익인간의 실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군주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천명을 어기는 것으로 군주의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우리의 전통 사상에도 역성혁명은 정당화되었다. 그래서 천명사상이나 홍익인간의 중심에는 덕치 사상(德治思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덕치 사상(德治思想)의 실천을 위해서는 관계가 잘 정립되고 관계 속에서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그 관계의 중심 윤리를 정리한 것이 바로 삼강오륜이었다. 그리고 그 기초에는 부자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자지간은 사랑과 공경이 기본이다. 그중에서도 자기의 근원에 대한 공경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근원에 대한 공경이 곧 효(孝)이다. 그래서 덕치사상의 기저에는 효치사상(孝治思想)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사상으로 자라 잡았다. 공자가 대학(大學)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강조한 것에서의 수신(修身)도 효로부터 출발하였다. 효가 없는 수신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효는 그처럼 우리 민족 전통의 삶과 수양, 통치의 중심에 있는 사상이었다. 조선의 성군(聖君)이었던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은 대단한 효자였다. 그들의 모든 통치행위의 근저에는 효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종의 용비어천가는 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조대왕의 수원화성 역시 효에 기반을 두고 있다. 효에 기반을 둔 천명사상의 실천은 곧 백성을 향한 인의(仁義)의 정치로 이어졌다. 이처럼 효는 매우 중요한 우리 민족의 전통 정신이었으며, 우리 민족은 비록 가난할지언정 효를 숭상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근대화가 되면서 우린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리치고 문명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소중한 민족의 전통 정신문화의 유산을 내팽개쳤다.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노인들은 갈 곳을 잃고 젊은이들은 혼인하지 않으며,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문명화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기저에 있는 인륜을 지키는 일과 반비례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6월 1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다. 유엔까지 나서 이런 날을 제정하였다는 것은 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노인 학대는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를 넘어 경제적 학대, 유기, 방임까지 포함한다. 이런 일들이 매년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경제적 거래, 계약 시 명의를 도용당한 경험이 있는 노인이 미국에서는 60대 이상 노인 10명 중 1명, 캐나다에서는 25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자식에게 주택 명의를 넘겨준 뒤 집에서 쫓겨나 쉼터나 친척 집을 전전한다는 것이었다. 노인학대의 대표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였다. 한국은 다를까? 한국에서도 노인 학대는 매년 증가 추세다. 2020년 한 해에 6,259건의 학대 사례가 발생했다. 경제적 학대 피해는 연평균 400건을 넘는다. 노인 연금과 복지 지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와 관련된 사기, 절도 피해도 늘어난다. 2022년 4월 경기 수원에서는 치매를 앓는 80대 노모의 연금보험료 1억 원을 가로채 생활비, 유흥비 등으로 쓴 50대 딸과 20대 손녀들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국은 더 심각하다. 한국은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이 예상된다. 그만큼 노인 학대는 늘어날 전망이다. 노인 학대의 중심에는 돈이 도사린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세계 1위이다.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도 세계 1위이다. 그만큼 노인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증거다. 우린 여기서 문명화란 말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문명화라는 것이 경제적 풍요를 말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 같다. 그래서 문명화할수록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팽개치는 것 같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효인 것 같다. 우린 지금 효를 내세우면 꼰대가 된다. 이제 노인은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되었나? 전통적으로 자랑하던 효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아니 이미 무너졌다. 2. 효덕지본(孝德之本), 효생지본(孝生之本) 효는 덕의 근본이자 삶의 근본이다. 효는 가정을 이루고 삶을 가꾸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가정의 화합과 화목은 효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가정은 모든 공동체의 기본이며 가정이 잘 다스려져야 세상이 편안해진다. 그것이 곧 덕치다. 덕치란 통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모든 사람은 가정에서 출발하여 세상에 나아가 일을 하고 세상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효가 덕의 근본인 것은 그러한 연유이며 삶의 근본인 것도 그런 연유이다. 가정이 파괴되면 덕도 삶도 파괴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효치 사상을 중심으로 모든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확장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학문과 통치의 출발을 효로 보았다. 공자의 어록을 정리한 논어(論語)나 공자가 강조한 효의 어록을 정리한 효경(孝經)의 저변에 흐르는 중심 사상인 인의 핵심도 효에 있다. 공자께서 어느 날 모든 일을 벗어나 한가로이 있었다. 이를 본 증자(曾子)가 가까이 다가가 곁에 앉아 공자를 모셨다. 그때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삼아, 선대의 성왕들께서는 지극한 덕(德)과 사람으로서 반드시 실천하여야 할 도(道)를 갖추고 계셨으며, 그것으로 천하(天下의 만민(萬民)을 가르치고 인도하셨다. 그래서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였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너는 그 지극한 덕(德)과 중요한 도(道)가 무엇인지를 아느냐?” 증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삼은 총명하지 못합니다.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무릇 효(孝)라는 것은 덕의 근본이며 선왕들이 가르치신 것도 바로 그 효(孝)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仲尼閒居 曾子待坐 子曰 參 先王有至德要道 以訓天下 民用和睦 上下亡怨 女知之乎 曾子避席曰 參弗敏 何足以知之乎 子曰 夫孝德之本也 敎之所繇生也 - 효경(孝經) 제1장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위에서 삼(參)은 증자의 이름을 말한다. 증자(曾子)는 본래 성은 증(曾)이고 이름은 삼(參)이었다. 증자(曾子)의 자(子)는 뒷날 그의 학식과 덕망이 출중하여 증자의 제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시좌(待坐)는 제자나 아랫사람이 스승이나 윗사람을 지극한 자세로 모시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증자는 늘 공자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이는 증자의 겸손한 제세를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증자는 대단한 효자였으며 겸손하였다. 선왕(先王)은 글자 상으로는 선대의 왕들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중국 고대의 성왕(聖王)으로 추앙받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등을 일컫는다. 이들은 모두 덕과 효로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화롭게 한 성인 군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선왕들은 지덕요도(至德要道)의 상징으로 숭상되어 왔다. 지덕요도(至德要道)에서 지덕(至德)은 선왕인 성왕(聖王)들이 보여준 지극한 덕(德)으로 이를 갖추면 하늘이 감복하여 복과 지혜를 내려준다. 요도(要道)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중요한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효도(孝道)를 지칭한다. 효는 모든 덕의 근원이므로 지덕(至德)과 요도(要道) 모두 효에서 비롯되었으며 효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훈천하(以訓天下)에서 훈(訓)은 가르쳐 깨우친다는 것으로 효를 가르쳐 세상 사는 이치를 깨우쳐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효에는 세상 사는 이치 모두가 담겨 있음을 강조한 것이며 천하(天下)는 우주의 의미지만 한나라 즉 백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훈천하(以訓天下)는 백성에게 효를 가르쳐 세상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효로써 깨우침을 받은 백성들은 이치를 터득하고 염치를 알게 되므로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였고(民用和睦)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上下亡怨)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여지지호(女知之乎) 즉 너는 그것을 알겠느냐?”에서 여(女)는 너(汝)를 가리킨다. 지(之)는 선왕의 지덕요도(至德要道)를 지칭한다. 증자가 자리를 뜨면서 “저는 불민(弗敏) 즉 총명하지 못합니다”라고 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증자가 피석(避席)한 것과 함께 겸손한 증자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위와 같이 설명한 모든 이유를 들어 “부효덕지본야 교지소요생야(夫孝德之本也 敎之所繇生也 무릇 효(孝)라는 것은 덕의 근본이며 선왕들이 가르치신 것도 바로 그 효(孝)에서 비롯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효를 모든 것의 근본에 두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전한 초기의 학자로 공자의 11세손으로 알려진 공안국(孔安國, ? ~ ?)은 고문효경서(古文孝經序)를 썼다. 이글에서 그는 효(孝)란 고행(高行)이며 경(經)은 상(常)이라 했다. 여기서 고행(高行)은 고매한 행위로 사람으로서 품격있는 행위를 말하며, 상(常)은 변치 않는 일상의 도리(道理)를 말한다. 따라서 효경은 사람을 고매한 품격으로 만드는 일상의 도리를 말한 것이다(孝經者何也 孝者 人 之따高行 經常也) 따라서 효는 덕의 근본(덕지본 德之本)뿐 아니라 삶의 근본(생지본 生之本)이 된다. 3. 효의 나라 재건을 위하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 옛말에 버릇없이 못되게 구는 사람을 ‘호로자식’이라 하였다. 이는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부모를 욕 먹인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나의 왕조를 이끄는 국왕이 덕치를 행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고 왕위에서 쫓겨나면 선대의 모든 업적을 무너뜨린다.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왕이 행실을 바르게 하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 한 집안의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가정을 파멸하고 조상을 욕 먹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행실을 바르게 하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부모는 늘 자식의 건강과 안위를 걱정하며, 가정을 이루고 복되게 살기를 바란다. 사람의 본분을 다하여 살며, 행실이 바르고 열심히 노력하여 세상에 이름을 빛내기를 바란다. 그것이 봉양이며 그런 행함이 있는 가운데 봉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식이 자기 관리를 못하여 몸이 아프거나 일찍 죽으면 최대의 불효가 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거나 처벌되면 부모는 가장 가슴 아프게 여긴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빛내는 일은 차후의 문제이다. 따라서 효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효의 정신을 다시 깨우는 것은 단순한 전통 정신을 살리는 길을 넘어서는 인간 보편의 진리와 고매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효를 실천하는 것은 고행(高行_ 즉 고매한 행동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의 기본은 수신(修身)에 있다. 수신의 중심은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건강하게 하는 일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삶을 이끄는 중심이며 생명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근본이다. 따라서 이를 등한시 하는 것은 삶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다음으로 효를 이루고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인간이 물려받은 순리이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려면 결혼을 하여야 한다.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하고 바르게 기르는 것은 인간의 순리이며 천명(天命)이다. 문명의 논리, 자유의 논리로 이를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순리를 거역하는 지극히 오만한 것으로 매우 작위적인 논리이다. 그리고 부모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근원에 대한 존중이며 현존하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문명화란 이름으로 도시화 되고 지나치게 자본주의화 되어 부모를 모시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니 세상은 각박해졌다. 그리고 부모를 버리고 노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삶의 문제를 넘어 가치의 문제이다. 지금 세상의 가치가 모든 것의 우위에 나와 돈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과 돈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우선할 수 있겠는가? 문명국이란 기술과 자본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사람 사는 가치가 발전된 나라일 것이다. 문명인의 삶도 그럴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공동체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영향이 선한 영향이라야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삶이 전개된다. 옛날 사람들은 마을에서나 집안에서 중요한 행사를 할 때 “내 몫”을 먼저 챙겼다. 그 “내 몫”은 자기가 먹을 것이 아니라 부모나 집안 어른, 나아가 동네 어른의 몫을 말한다. 그래서 돼지를 잡거나 좋은 음식을 만들면 부드럽고 맛있는 부분을 먼저 챙겨 놓았다가 갖다 드렸다. 그것이 왜 “내 몫”이었을까? 여기에는 삶과 도리의 순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내가 부모와 어른을 받들고 모셔야 나중에 후손들도 나를 그렇게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다. 본보기 문화이다. 효자의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고 불효자의 집안에서 불효자가 나온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순환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2022년 또 한 해가 저문다. 수많은 사람이 객지에서 살아가고 수많은 노인이 자녀들을 그리워하며 홀로 지낸다. 이 시점에 젊은이들도 노년에 대하여 한 번쯤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지면 참 좋겠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오기 마련이며 어쩌면 삶은 노년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머지않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노년의 삶이 고달프고 노인들이 빈곤하며 노인들이 학대받는 세상은 젊은이들이 취업하기 어려운 세상보다 더 비참한 사회일 수 있다. 범국가적으로도 효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효는 자녀라는 한 개인,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효는 실천 방법은 전통적인 것과 다를지라도 정신은 같다.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문명화와 함께 점점 퇴락해가는 효의 정신을 다시 살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더 건강하게 더 성실하게 살아가며,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할 수 있는 마음으로의 가치 전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젊은이들도 늙음에 대하여 성찰하는 게기가 있었으면 더 좋겠다. 그 운동이 젊은이들로부터 생겨나면 더욱 건강한 세상이 될 것 같다. 공자가 왜 효는 덕의 근본이며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 했을까? 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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