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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적 건달들의 지렛대 자아의식>의 줄거리 :
이 지구는 건달과 양아치들의 아사리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영적 건달들이 있습니다. 자기 본업을 등진 채 건들거리며 난봉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영적 건달들의 난봉은 모두 다 지렛대 의식에서 비롯합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는 마음의 소원을 따라서 자기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지렛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 본업을 잃으면 땅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자기 멋대로의 착각과 해석과 이해를 가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적 건달들의 지렛대 자아의식
(창세기 30:1~43)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 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본문의 내용은 참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와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시면서 아이를 낳게 된다는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접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을 중재하기 위하여 간구했던 것 외에는 자녀나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야곱의 아내들은 자신을 위한 소원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이루어주셨다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야곱의 집안은 여인들의 출산을 위한 각축전이자 경쟁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37절 이하에는 야곱이 품삯을 받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도 참 특이합니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도 재산이 풍부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은 야곱처럼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고 외삼촌을 속여서라도 재산을 모으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에게 재산 모으기를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소원한 적이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야곱의 집안사람들은 마음대로 소원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어주십니다. 심지어 야곱은 인간의 의도적이고 교활한 수법을 통해서 소원을 추진하는데 그것조차 들어주십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영적 건달들의 지렛대 자아의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영적 건달의 가장 온전한 모습을 표본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음을 본업으로 삼은 선민의 표본이라면, 야곱의 집안사람들은 영적 건달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집안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선민이 아닌 건달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영적 건달들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신 근본적 이유는 이들이 소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소원을 들어주시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선민 중에 영적 건달들이 반드시 생겨날 것이며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전에서 건달을 찾아보면 두 가지 뜻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둘 본업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는 일이나 가진 것도 없이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건달의 사전적 정의로부터 영적 건달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 건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선민에게는 본업이 따로 있습니다. 이 본업을 잃어버린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영적 건달이 됩니다. 선민의 본업은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12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십자가에서 육체를 벗고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마음은 마주하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눈앞에 있는 누구보다 크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본업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움을 위한 열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모든 직장 동료들이 추석 보너스를 원하고 승진을 소원하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 부자 되기만을 소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업입니다. 영적 건달이란 이 본업을 등지거나 잃은 상태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마음은 땅에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땅의 대상들에 관심을 둡니다. 가족을 관심하고, 건강을 관심하고, 재물을 관심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선민으로서 본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러한 상태는 땅에서 어슬렁거리며 건들대는 영적 건달들의 모습입니다.
한편 이러한 영적 건달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난봉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머리털까지, 내 세포 하나까지 주장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이나 백합화 하나의 피고 짐으로부터 이 우주의 별의 운행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결과입니다. 영적 건달이란 이렇게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 주권의 그물망 안에서 땅을 향해 소원을 갖는 것을 본업으로 삼게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난봉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찢어버리고 방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가질 때 하나님의 주권이 찢어지고 방해받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난봉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소원을 가지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건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심도 인정합니다. 정말로 주권자이심을 인정한다면 소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물론 소원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업이 유지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면서 그것이 소원의 형태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본업을 유지하지 못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지구 위에서 건들거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영적인 깡패이고 건달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 야곱에게 강짜를 부리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에 야곱은 화를 내며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라헬은 남편인 야곱에게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뒷배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곱이 소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30절 이하에서 야곱은 라반과 품삯을 결정하는 대화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외삼촌 집에 왔을 때 재산이 많지 않았으나 자기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재산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라반은 야곱의 말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라반이 볼 때도 야곱은 세상을 향해 소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뒷배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라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상을 향한 야곱의 소원을 위해 움직이는 지렛대로 본 것입니다. 야곱도 삼촌 집에 들어와서 삼촌 집의 재물이 늘어났다고 본 것입니다.
야곱이 이러한 모습을 보였기에 라헬은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야곱이 소원을 하면 해결되리라 여겼습니다. 야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였기 때문에 소원하기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헬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라헬보다 라헬이 아이를 낳는 것은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아버지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결혼한 지 20년 만에 자신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원치도 않은 레아와 결혼하여 생각하지도 않은 아들 넷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더 이상 자녀에 대한 간절함을 갖지 않았습니다. 소원이 아닌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위임해 버립니다.
그런데 재산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재산으로부터 자기 몫이 생기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자기 몫을 늘리기 위한 수단을 마련합니다.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 껍질을 벗겨 개천에 세워 아롱무늬를 만듭니다. 그리고 라반의 가축들 중에서 튼튼한 것들이 교미할 때만 아롱무늬를 보임으로써 아롱진 무늬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약한 가축들이 교미할 때는 아롱무늬를 치워버립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삼촌의 가축들은 약한 것들만을 남게 하고 자신의 몫으로는 튼튼한 것들을 남깁니다. 이처럼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서는 볼 수 없던 술수를 부립니다. 자신이 관심하는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야곱이나 그의 아내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은 영적인 원리상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영적인 사실로 이루어진 논리가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6~27절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지는 30절에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 계신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 33절에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려면 마음이 하나님 나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 사랑 생활화’라는 책의 서문에 썼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 주시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됩니다. 주권(主權)이란 말 그대로 주인으로서의 권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소원을 가질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안다면 마음은 마땅히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지는 일에 힘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민이면서도 이것을 하지 않는 자들이 영적 건달입니다. 이들이 갖는 소원이란 이 세상에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행패와 난동을 부리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에게는 소원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고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내 아버지이시고, 독생자를 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시며, 주권자로서 계획하시고 전지전능하심으로 이끌어가시는 중이라는 것이 영적인 사실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나 따위가 내 인생을 향해 어떤 소원을 발동할 수 있을까요? 소원 갖기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부자 되기를 원하는 본업을 등진 건달들이나 할 수 있는 난동이고 행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행패를 가하는 것은 양아치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레아와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언급됩니다. 그리고 야곱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지만 결국 야곱의 소원이 재산을 늘리는 것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야곱의 소원도 들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아롱진 것들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벗겨 아롱무늬를 만들어 보인 것은 그야말로 작당이자 교활한 술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술수대로 부자로 만들어 주신 것일까요? 우리는 본문 전체의 의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업에 충실한 선민의 모범이었다면, 야곱과 그 집안사람들은 초기 단계에서 이미 본업을 잃어버린 선민의 행태를 보여줍니다. 선민들의 마음이 세상에 머무르며 영적 건달들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건달들의 완전한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소원은 하나님을 많이 갖고 싶어 하는 것뿐입니다. 야곱은 30절에서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건달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소원이란 내 발이 가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마음이 충만하기를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을 소원하며 살든지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원하며 하나님 부자 되기를 열망하는 것이 본업입니다.
아이를 갖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하며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을 갖는 것은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행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야곱의 재산 증식의 소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야곱에게 아롱무늬를 보게 하라는 지혜까지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해 소원을 갖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난봉을 부리는 영적 건달들의 완전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대해 소원을 받침대로 삼아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 영적 건달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남아서 본업을 잃은 채로 빈둥대는 건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뒷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소원을 갖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난봉인지를 모릅니다. 그저 소원을 가지면 하나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선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될 것을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계획하셨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몸종까지 들여보내며 출산을 위한 각축전을 벌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하나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억울함을 풀어주셨다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건달들의 행패일 뿐입니다. 열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계획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건달들의 자아의식입니다.
영적 건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 세상을 향해 소원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이다. 하나님을 들썩거려 움직이게 함으로써 내가 갖고 있는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라는 영적 건달의 자아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대로 이루어 가시면서 일부러 야곱의 아내들에게 주권적으로 이루실 일들에 대한 소원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과 그 아내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라고 착각하고 오해합니다. 선민의 집안에서 자식 낳는 것을 소원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보면 이런 식의 소원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소원은 하나님이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낳게 하리라는 계획과 의지와 소원을 갖고 계셨고 그대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내들은 경쟁적으로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습니다.
그 소원의 의도도 매우 불순합니다. 남편 야곱의 마음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는 대결에서 라헬은 언니 레아를 이기고자 했고, 레아는 동생 라헬을 이기고자 했습니다. 자녀를 낳아서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라도 웃기는 소원이었을 텐데 하물며 그 수준에 이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아내들은 그저 아이를 낳아서 남편에게 인정받고자 했고, 야곱은 삼촌을 속여서라도 부자 되기만을 바랐습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고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소원했습니다.
영적 건달들이 이 세상에서 갖는 모든 소원은 이 세상으로 귀결됩니다. 이 세상에서 생긴 이유로 이 세상에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권자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이유는 내가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인으로 삼아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을 원인으로 삼아 움직이십니다. 당신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을 원인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을 원인으로 아브라함을 있게 하셨으며, 마찬가지로 야곱도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원인이라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 방식이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갖고, 하나님을 많이 가지겠다고 소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가지고 싶은 소원 외에는 허락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아의 경우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들여보내면서 그 공로를 하나님이 인정하고 값을 치러주시느라 아들 둘을 낳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성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되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영적 건달들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갖고 계셨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속에 ‘이렇게 하면 되겠다.’해서 아롱무늬를 보여서 튼튼한 가축의 새끼를 얻으려 하는 간교함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간교함을 그대로 이루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세상을 소원하는 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본업을 잃어버린 영적 건달들의 모습을 가장 온전하게 제시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레아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야곱이 방책과 술수를 써서 부호가 되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나의 소원도 들어주실 수 있을까?’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본업을 잃어버린 영적 건달들이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라헬과 레아의 소원을 들어주셨듯이 나의 소원도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작 남편 마음에 들기 위하여 아이를 많이 낳고자 했던 라헬과 레아의 소원이란 본업을 잃어버린 영적 건달이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 수 없는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며 아브라함과 야곱을 대비시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업에 충실한 자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야곱은 본업을 잃어버린 자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구분해서 보여주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계속해서 온전한 영적 건달의 모습을 향해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말년의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흉년에 의해 인생에서 모은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자기 주도적이었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건달의 삶을 그제야 끝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성경에서 나오는 소원이라는 단어를 잘 보시길 바랍니다. 선민에게는 무조건 하나님만이 소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 됩니다.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습니다.
소원은 엄청난 마음의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난동을 부리는 건달의 삶이 다시는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보여주신 선민의 본업을 잃지 않게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았던 생애의 거반이 본업을 잃고 지구 위에서 빈둥거리는 건달의 삶이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물 샐 틈 없는 주권에 행패를 부리고 난동을 부리며 살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아니라고 예수님의 몸을 입고 우기며 주장하게 하시고, 다시는 육체를 입은 건달로 살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