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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17)
☞ 순례 장소 : 남방재 ➟여사울 ➟신리➟합덕성당 ➟솔뫼
➟원머리➟ 공세리 성당 ➟성거산
오랜만에 순례를 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어설프게 하느님을 찾는 길이 아득하게만 여겨진다. 회장님의 성수뿌림 맞으며 함께 우리들의 축복해주심으로 여러 회원님들과 함께 순례 길에 올랐다. 가을바람 하늘의 청명함이 하늘하늘 거리며 무지갯빛의 단풍들이 뽐내며 자랑을 만끽하고 있었다.
첫 번째 간 곳
● 남방재
신창 남방 제는 현재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1리 마을로 성 조윤호(1848~1866, 요셉)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조윤호는 성인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이다. 1848년 충청도 신창에서 막내아들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8세 때에 모친을 여의었으며 1865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 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년 후 병인박해가 확대되면서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1866년 12월 4일 성지 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원지(일명 원조, 1846~1866, 베드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그가 갇힌 곳은 좌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에 조윤호는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끝내는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18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임을 당한 조윤호 성인은 당시 거지들이 순교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조윤호 집안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 고개에 묻혔다가, 그 후 교우들이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있는 아버지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다른 증언록에는 시신을 용머리에 갖다버렸고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 점으로 볼 때 유상리 막고개로 조윤호 시신이 이장되지 못하고 아예 처음부터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순교자
◆ 성 조윤호 요셉(1848∼1866)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성지 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혼인하였다. 1866년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심문과 형벌을 예닐곱 차례 받았지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열흘 지난 12월 23일 전주 숲정이에서 곤장 16대를 맞은 뒤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와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에 이어 가문의 3대가 함께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두 번째 간 곳
● 여 사 울
여사 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 비코 곤자가)의 출생지이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 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 여사 울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이존창이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스승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 스코 하비에르) 형제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천주교 신앙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 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호 星湖, 1681~1763)의 제자로 일찍이 서학을 받아들인 홍유한(洪儒漢, 호 隴隱, 1726~1785)도 경상도로 이주하는 1775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1777년에는 이존창의 스승인 권철신과 이기양(李基讓, 호 茯庵, 1744~1802)이 여사 울 이존창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예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 울로 되었다고 한다.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의 집안이 바로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단원 이존창은 한국 교회의 기틀을 잡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충청도는 그 당시 가장 큰 교세를 형성했고 충청도 신자들은 박해 때 전국으로 퍼져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1786년 이래 초기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이 조직한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 模倣聖職者團)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그해 말에는 여사 울을 떠나 충청도 홍산을 거쳐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였으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에 들어갔다.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에 열을 올렸으며 그 후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다시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공주 감영에서 1801년 2월 28일(음)에 참수형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 여섯 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낱같은 흉터가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 내포(內浦)
내포란 삽교천과 무한 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지역을 말한다. 즉 충남 아산에서 태안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충청 북부의 수운(水運)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포구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영했던 곳이었으며, 신흥 향반(鄕班) 세력이 성장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충청도에는 순교지 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특히 내포 지역에 관련 유적지가 집중되어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하였다.
◆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를 집행했던 제도이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년부터 1787년경까지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홍낙민 루가 등 10여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神品)을 안 받은 채 사제(신부)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래 그를 북경으로 가게 했던 남인(南人) 학자 이벽, 세자 요한을 중심으로 권일신,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3형제, 이존창, 홍낙민, 유항검, 김범우 등 양반 및 중인 신분 사람들이 차례로 입교함으로써 창설된 한국 교회는 처음 서울 명례방(현재 을지로 2가)에 있던 김범우의 집을 집회 장소로 삼아 주일과 축일을 지내왔으나 그 때까지는 아직 이런 제도는 실시되지 않았다.이 제도는 1785년 일어난 박해 즉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김범우가 유배되어 순교하고, 주도 인물이었던 이벽이 타의로나마 은거하게 된 뒤, 북경에 가서 직접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 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에 의해 교회 발전책으로 제의되어 채택되었다. 그러나 유항검이 교리서를 자세히 연구하여 본 결과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의 이름으로 씌어져 1789년 10월(음),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을 통해 북경의 북당(北堂) 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승훈 등은 1790년 윤유일로부터 북당 선교사들의 회답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회답에서 선교사들은 성사를 마구 집전한 것을 무지로 돌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통회로써 구원을 얻도록 노력할 것이고, 구원의 가장 확실한 길은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므로 그 조속한 실현을 권고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평신도들은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가 교회에 필요함을 비로소 인식하고 북경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윤유일을 다시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게 되었다.
■ 순교자
◆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
이존창은 이 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 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진산 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주 소각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년)때 공주 감영에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취조관으로부터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운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그러나 계속된 모진 고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멀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곧 후회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열심히 전교하였다. 가족에게 환난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보좌하여 사목을 돕다가 다시 잡혀 결국1801년에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세 번째 간 곳
● 신 리
신리는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교우촌이다. 성 다블뤼주교가 거처하던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이며, 또한 성 손자선 토마스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로 구성된다. 1836년 1월 13일(양)에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줌으로써 신리(거더리)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신리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 ~1866, 안토니오)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당시 전라도(현 충청도) 강경 나바위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 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의 사목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러 지내던 장소이며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그리고 병오박해(1846년)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하여 초기의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신리는 손자선 토마스( ?~1866) 성인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못자리이기도 하다. 안 주교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이 집은 이 일대의 유지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20여 평되는 목조 건물로 1815년에 지은 초가집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다.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재건, 1813~1866, 루카)를 체포하고 이어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도 체포되었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제천 배론 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樂韶, 1803~1866,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이들 5명은 갈매 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다. 성 손자선 토마스도 체포되어 1866년 순교하였다. 그는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성인으로 유명하다.
▒ 다블뤼 주교 저서 및 번역서
○ 다블뤼 비망기 :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자들 시복청원을 위해 1856년부터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 자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다블뤼 주교는 이를 1858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는데 이것이 《다블뤼 비망기》다. 모두 5권이며 마지막 권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이다. 이는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하는데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됐다. 현재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전사본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소장돼 있다. 이를 복사한 것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 신명초행(神命初行) : 상하권으로 이뤄진 묵상 서적
○ 영세대의(領洗大義) : 세례 준비서
○ 회죄직지(悔罪直指) : 죄를 성찰하고 통회하도록 권고하는 일종의 묵상서
○ 성찰기략(省察記略) : 올바르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방법과 내용을 담음
○ 천당직로(天堂直路)(번역서) : 신자들이 천당에 갈 수 있는 방 법과 하느님 은총을 얻는 방법을 담은 신심서
○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번역서) : 장례에 관한 옛 예식서로 예수회 선교사 불리오 신부가 저술한 한문본을 다블뤼 주교가 번역
○ 성교요리문답(번역서)
■ 신리성지에 성 다블뤼 기념관 및 순교자기념공원 조성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가 1845년 입국해 1866년 순교하기까지 10여 년간 은거하며 사목거점이자 주교관으로 쓴 ‘신리성지’에 성 다블뤼 기념관 및 순교자기념공원이 들어섰다. 대전교구 신리성지(주임 김동겸 신부)는 2014년 5월 6일 당진 시 합덕읍 신리1길 61-23 성지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성 다블뤼 기념관 및 순교자기념공원 봉헌식을 하고, 다블뤼 주교의 영웅적 성덕과 업적, 순교를 기렸다. 이날은 다블뤼 주교가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등과 함께 시성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인 데다, 고향인 프랑스 아미앵교구에서 온 후손과 사제 15명이 함께 해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됐다. 루크 부이어헤 대주교 (브장송대교구장, 전 아미앵교구장)를 비롯한 이들은 미사 중 다블뤼 주교 유품과 그의 첫 사목지 로아본당에서 1차세계대전 당시에 썼던 총알 탄피를 녹여 제작한 십자고상을 신리성지에 선물했다. ‘신리성지 역사공원’은 지난해 4월 20일 기공, 충청남도와 당진 시에서 30억 원을 지원받고 성지에서 15억 원을 투입, 1년 여에 걸쳐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기념공원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3만 61㎡에 달하는 성지에 지하 2층 및 지상 4층, 1262.90㎡ 규모의 성 다블뤼 기념관을 세워 다블뤼 주교 성인화와 유품, 이 종상(요셉, 76)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가 ‘신리 기록화’ 20점을 전시키로 했다. 다만 이 교수의 기록화는 현재 지하 2층 전시실에 제작이 마무리되지 않아 우선 복제화 6점을 선보인 상태이며, 장차는 다블뤼 주교 전신 성인화, 초상, 사제서품과 순교 그림도 선보인다. 아울러 14m 높이 기념탑(전망대)에 오르면 내포 들녘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순교를 결심한 다블뤼 주교의 명에 따라 젊은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신리성지로 돌아오던 순교의 길을 돌아볼 수 있다. 또한 순교자기념공원에는 신리성지에서 잡혀간 다블뤼 주교와 오매트르ㆍ위앵 신부, 손자선(토마스)ㆍ황석두(루카) 등 다섯 성인을 기리는 야외 경당을 세워 봉헌하고, 순례자들과 방문객들이 영적 쉼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습지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또 순교자기념공원에는 프랑스 파카르드사 장인들이 제작한 3개의 종을 내걸었다. 신리성지는 다블뤼 주교가 한글 교리서를 저술 간행하고, 초기 조선교회 상황과 순교사적을 수집 정리해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다블리 주교 비망기」를 엮게한 사목거점이어서 오는 8월 열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와 제3회 한국청년대회에 참가한 우리나라와 아시아 청년들이 순교성인들의 신앙을 본받는 배움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흥식 주교는 미사 강론을 통해 “다블뤼 주교님 시성 30주년의 날에 다블뤼 주교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을 봉헌하게 돼 무척 기쁘다”며 “특별히 103위 시성 30주년을 맞으며 특별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다블뤼 주교님의 사목표어를 늘 기억하시길 바란다. 고 당부했다. 이날 봉헌식에는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와 전 신리성지 주임 김성태(합덕본당 주임) 신부 등 대전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함께해 성황을 이뤘다
.<평화신문 오세택 기자>
■ 성 다블뤼 주교 후손, 안 카트린 수녀 방한“한국땅 묻히신 다블뤼 주교 … 프랑스교회도 감사할 일”다블뤼 주교 여동생의 5대손, 사제 많이 탄생 ‘남다른 가문’“조상들 신앙 영향 수도자 결심, 한국서 주교님 더 깊이 알게 돼”
안 카트린 수녀(주아르 베네딕도수녀회 수련장)는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1818~1866)의 후손 대표로 6일 신리성지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봉헌식에 참석해 “오늘 봉헌식에서 살아 있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과 동시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침체된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달리 순교자를 현양하는 교회의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자세는 프랑스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카트린 수녀는 다블뤼 주교 여동생의 5대손이다. 카트린 수녀는 “30년 전 다블뤼 주교님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시성될 때, 저의 부모님이 시성식에 참석하셔서 주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오늘 봉헌식을 계기로 다블뤼 주교님에게 더 깊이 다가가게 됐다”며 “주교님께서 순교 후 한국 땅에 묻히고 그 유해가 지금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은 주교님이 평생에 걸쳐 한국에서 사목하신 만큼 프랑스교회로서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블뤼 주교에 대한 프랑스교회의 현양운동에 대해 카트린 수녀는 “주교님의 출신교구인 아미앙교구에서는 주교님을 알리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프랑스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주교님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카트린 수녀와 동행한 또 다른 후손인 피에르 다블뤼(74)씨는 다블뤼 주교의 서한을 수집, 정리해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가계도(족보) 편찬도 병행하고 있다. 카트린 수녀는 “성인을 배출한 우리 집안에서는 많은 사제가 탄생했고 아프리카에서 50~60년 선교사로 봉사하신 분도 계시며 저도 조상들의 신앙에 감화돼 수녀가 됐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2014-05-18, 제2895호]
■ 공소와 교우촌
◆ 공소 교회법에 따르면, '공소'란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를 의미하는데, 때로는 그 지역 신자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서의 '공소 집' 즉 경당(혹은 講堂)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따로 공소 예절이 행해지며, 사제의 방문으로 성사가 집행되거나 미사가 봉헌되는데, 사제의 첫 순방 날짜가 공소 설립일이 된다.
◆ 교우촌 천주교사에서 말하는 '교우촌'이란, 그 구성원들이 천주교 신자 즉 교우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 신앙 공동체(신자 공동체)형으로서의 자연 부락을 의미한다. 공소는 주로 이들 교우촌 가운데서 설정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공소는 넓은 '지역 본당'의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박해기 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 섞여 사는 혼거형(混居形) 공동체도 많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공동체는 교우촌으로 볼 수 없다. 이들 교우촌을 형태별로 보면,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공동체가 유지되는 정주형(定住形) 교우촌과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처음에 형성된 공동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전이형(轉移形) 교우촌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성 민 루가 위앵 (Huin) 신부(1836∼1866)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 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1837∼1866)프랑스 앙굴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3월에 안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1813∼1866)‘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손자선 토마스(1838∼1866)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떤 일로 갔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손자선을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그를 해미로 보냈다.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킨 손자선은 결국 공주(公州) 감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네 번째 간 곳
● 합 덕
성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지는 아니지만 신앙의 유산을 찾기에 충분한 교회 사적지다. 사제 40여명, 수녀, 수사 약 70명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기도 하다.
합덕 본당이 위치한 내포 지역은 충청도 복음 전파의 요람지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후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전교 활동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이후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 되었고, 신해박해(1791년) 이후 무진박해(1868년)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어느 곳보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초기 교회사에서 유명한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집안도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박해를 피해 가며 전교 활동을 편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활동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담당한 선교사는 1836년 초,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였다. 또 1845년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1808~1853, 高, 요셉)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에 주교가 됨), 1849년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합덕 일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전국을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눈 이후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된 선교사는 랑드르(Landre, 洪, 1828~1863, 요한) 신부였다. 그러나 랑드르 신부가 황무실에서 병사한 뒤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그 결과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쇠재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가 거더리에서 각각 체포되었다.박해가 끝나자 합덕 인근 지역에는 다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1년부터 내포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신부는 이들 공동체를 방문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1890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로 교구의 장상이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요한) 신부는 두세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지역에 본당 중심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내포 지역에는 1866년 이래 24년 만에 2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중 합덕 본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촌 본당에는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가, 간양골 본당에는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1866~?, 베드로) 신부가 거처하였다. 후에 양촌 본당은 간양골 본당을 병합한 후 현 위치로 옮겨 오면서 합덕 성당으로 개칭되었다. 합덕 성당은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내포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이 넘는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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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요즈음
내포지역 성지 도보순례중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내용을 잘 정리해 주시니 크게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대전 두번째 순례후 소감을 적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