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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정원?? 스크랩 에피쿠로스와 죽음
유수/백재성 추천 0 조회 77 19.01.25 01: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에피쿠로스와 죽음


전헌상(서강대)



【주제분류】서양고대철학, 윤리학
【주제어】에피쿠로스, 죽음, 네이글, 해로움, 동시성, 대칭성
【요약문】이 글은 죽음의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들을 그 것에 대한 주요한 비판들과 함께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 다루어진다.

첫 번째 논증에서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증은 인식되지 않은 나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 원칙에 대한 네이글의 유명한 비판을 검토하고, 이 비판이 어떻게 죽음의 나쁨을 삶의 상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연결되는지를 설명한다.

두 번째 논증에서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나쁨은 그것의 주제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근거 없음을 주장한다. 이 글에서는 이 원칙에 대한 네이글의 비판을 역시 검토하고, 다음으로 그의 비판에 대해서 에피쿠로스가 어떤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를 고찰한다.
필자의 결론은 두 입장 사이에는 가치의 평가기준에 관한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하며, 따라서 근원적인 해소의 길은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필자는 에피쿠로스가 실제로 제시한 논증보다는 쾌락의 본성에 관한 그의 독특한 설명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었음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루크레티우스가 제시하는 소위 대칭논증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다. 필자는 이 논증에 대한 현대철학자들의 해석이 과도한 것이며, 이 논증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 사이의 대칭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논의된 경험 가능성의 여부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인다.


투고일: 4월 30일, 심사완료일: 5월 19일, 게재확정일: 5월 28일



I. 들어가는 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에피쿠로스 윤리학의 주요한 과제중의 하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육체의 건강과 영혼의 평정을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한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8).

그리고 이 둘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을 때 그가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자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즉 쾌락이 최상의 정도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에피쿠로스는 최대의 쾌락이 쾌락의 항목과 양을 늘려감으로써 성취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고통을 제거함에 의해서 얻어진다. 모든 고통스러운 것의 제거가 쾌락의 크기의 한계이다(주요 가르침 3).

따라서 육체와 영혼의 양 측면에서, 모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긴급한 과제가 된다. 그런데 영혼의 평정과 관련해서,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인간들의 잘못된 믿음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신과 죽음에 대한 그릇된 믿음이다.

사람들은 신들이 끊임없이 자연사과 인간사에 관여하고 선한 자는 이롭게 악한자는 해롭게 한다고 믿으면서 그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신은 불멸하는 복된 존재이며, 스스로 고통을 느끼지도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는 존재이다. 신의 본성에는 어떤 분노도 호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분노와 호의는 단지 약한 존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주요 가르침 1).

사람들은 또한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이 두려움과 고통 역시도 죽음의 본성에 대한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릇된 믿음을 시정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에피쿠로스 학파가 제시한 주요한 논증 세 가지를 검토할 것이다. '에피쿠로스' 대신 굳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조금 뒤에 밝혀지겠지만, 그 논증 중 하나가 에피쿠로스 본인이 아닌 로마 시대의 에피쿠로스주의자 루크레티우스로부터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논의는 우선 각 논증의 전거를 제시하고, 핵심적 논지를 요약한 다음, 각각의 논증에 대해 제기된 주요
한 반론을 소개하고, 그것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이중 반론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필자는 죽음의 문제에 관한 현대철학적 논의의 중요한 시발점이 된 네이글의 고전적 논문1)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네이글의 논문은, 비록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들을 명시적인 타깃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논증들의 핵심적 전제들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 논증들에 대한 논의의 프레임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네이글의 논문은 많은 후속 논의들을 촉발했고,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이 글의 초점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 자체이고 따라서 이 글은 기본적으로 해석적인 목적을 가짐을 모두에서 밝혀두어야 하겠다. 즉 이 글의 목표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들과 그것에 대한 비판들 사이에서 어느 어느 한 쪽을 옹호하거나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증들이 가지는 특징과 한계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켜 그것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것에 있다.


1) Thomas Nagel, 'Death' in Mortal Questio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1-10.



II. 죽음과 감각 가능성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에피쿠로스의 가장 널리 알려진 논증은 다음의 두 구절에서 발견된다.


"<I>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ho thanatos ouden pros hmas). 왜냐하면 해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anaisthtei). 감각이 없는 것(to anaisthtoun)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주요 가르침 II)."


"<II>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달려 있는데(en aisthsei), 죽음은 감각의 상실(stersis aisthses)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게 되면 가사성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4)"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1) 죽음은 영혼의 해체이다.
2) 해체된 것은 감각할 수 없다.
3) 죽음은 감각의 상실이다.
4) 감각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5)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 논증은 두 개의 중요한 전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1)과 4)가 그것이다.
1)은 에피쿠로스가 받아들이고 있는 원자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귀결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실재하는 것은 오직 원자들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복합체들뿐이다. 영혼도,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
지만, 기본적으로 물체일 뿐이다. 그것은 몸 전체에 퍼져있고,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몸의 구조와 잘 조화될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은 그것을 둘러싸고 보호해 주는 몸이 분해되면,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원자들 자체도 여기
저기로 흩어져, 더 이상 이전에 가졌던 능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죽음과 함께 영혼은 감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39-41; 63-65).

1)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에피쿠로스의 논증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적 전제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 전제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다양한 논증들을 통해서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했다. 이렇게 1)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에피쿠로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준다.

죽음에 대한 일반인들의 두려움이 “영혼이 몸으로부터 해방될 때 그것이 흩어지고 바람에 흩뿌려지고 흩날려 가 버려서 더 이상 아무것도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게 될까를 두려워하는(파이돈84b)” 것이라면, 영혼이 불사이고 불멸함을 보이는 일은 그 두려움을 제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을 부정하는 것은 완전히 에피쿠로스와 다른 길을 취함을 의미하는 만큼, 일단 1)을 참으로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4)이다.

4)의 취지는, 간단히 말하면, 어떤 것이 나쁜 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나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a가 A를 나쁜 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A는 a에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좋다는 것은 그것이 쾌락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것이 나쁘다는 것은 그것이 고통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쾌락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어떤 것의 나쁨을 그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지는 주관적인 부정적 경험의 경우에는 고통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은 3)과 결합해 5)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영혼의 해체와 더불어 감각은 더 이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따라서 죽음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2)을 할 수 없다. 죽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것을 나쁜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간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음을 나쁜 일로 여길 이유가 없게 된다.


하지만 과연 4)의 원칙은 참인가? 즉 과연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이 당사자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필연적으로 의존하는가? 네이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들을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등뒤에서 조롱 당하고, 면전에서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경멸 받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그에게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의 유언이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다면, 혹은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칭송 받던 작품이 저작의 사후에 그가 아닌 그의 동생에 의해 쓰여졌음이 드러났다면, 이 경우 그들에게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3)

네이글은 이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4)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는, 에피쿠로스와 달리, 당사자가 인식하지 못한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함축을 가진다. 4)가 참이 아니라면 3)으로부터 5)가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 일체의 감각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죽음은 여전히 4)가 부정하는 나쁨, 즉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쁜 어떤 일일 가능성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이 둘 중 어떤 종류의 나쁨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죽음을 나쁜 일로 생각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이 죽음을 나쁜 일로 간주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마치 어떤 사람이 치과치
료를 두려워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치주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어떤 사람이 치료과정에서 격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치과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사실은 치료기법의 발전과 효력 좋은 마취제 덕분에 환자는 치료과정에서 전혀 통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해보자. 이 사실을 그가 알게 되는 순간 그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미래에 자신이 경험하게 될 고통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고,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 그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거하고자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후에 우리가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사실 사후에 우리는 일체의 감각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후에 어떠한 고통스러운 일도 겪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이런 식의 설명이 과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후에 우리가 어떤 나쁜 일을 겪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가 살아 있다면 누리게 될 어떤 좋은 것들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삶과 살아 있음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삶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어떤 상태들
일 수도, 활동들일 수도, 경험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쁜 일로 간주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러한 긍정적 상태들, 활동들, 경험들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이 나쁜 일이라면, 그것을 거부할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죽어 있음이나 비존재나 무의식의 상태이라기보다는 삶의 상실이다.4)

만일 이것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라면, 에피쿠로스의 논변은 잘못된 타깃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논증이 타깃으로 하고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죽어있는 상태(being dead)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위에 소개된 대안적 설명이 옳다면,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게 됨이라는 사실, 혹은 가사성(mortality) 자체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단지 죽음 이후의 시점에 우리가 어떤 나쁜 일을 겪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과 그것이 포함하는 많은 바람직한 것들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베일리(Bailey)의 지적대로, 위의 논증에서의 'aisthsis'는 사실상 pathos, 즉 쾌락이나 고통을 내적으로 겪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Cyril Bailey, Epicurus: The Extant Remai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26,332). 에피쿠로스는 aisthsis, prolpsis, 그리고 pathos를 진리의 세 규준들(kritria)으로 간주한다.

3) Thomas Nagel, Death, 4.

4) “if death is an evil, it is the loss of life, rather than the state of being dead, or nonexistent, or unconscious, that is objectionable (Nagel, Death, 3).” 강조는 저자의 것이다. 죽음의 나쁨이 삶의 박탈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는 입장은 통상 'deprivation approach'라고 불린다. 이 입장을 옹호하는 학자들로 Fred Feldman,Confrontations with the Reaper, A Philosophical Study of the Nature and Value of Deat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138; Brueckner & Fischer, “Why is Death Bad?,” in Fischer (ed.) The Metaphysics of Death,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221-229; Feldman, “Some Puzzles about the Evil of Death,” in Fischer The Metaphysics of Death, 307-326; Kaufman, Death and deprivation; Or, why Lucretius' symmetry argument fails,” American Journal of Philosophy 74, 1996, 305-12. 등을 들 수 있다.



III. 죽음의 나쁨과 동시성


앞서 제기된 반론에 대해서 에피쿠로스주의의 입장에서 어떤 대응이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에피쿠로스의 또 다른 논증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그것은 인용문 <II>의 조금 뒷부분에 등장한다.


"<III>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나쁜 일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5)."


<II>와 <III>은, 비록 에피쿠로스가 양자의 내용을 명시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소 다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II>가 죽음이 감각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III>은 죽음과 그것의 주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1) 죽음은 영혼의 해체이다.
2) (죽음을 겪는) 주체는 영혼과 몸의 결합체이다.
3)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다.
4) 죽음이 존재하는 시간에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5) X가 a에게 나쁜 일이기 위해서는, X가 존재하는 시간에 a가 존재해야 한다.
6)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 논증의 골자는 이런 것이다. a의 죽음이 a에게 나쁜 일이라면, 그 나쁨은 a가 죽어있는 시간 동안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a가 죽어있는 시간은 a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즉 이 시간은 죽음의 나쁨이 귀속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따라서 a의 죽음은 a에게 나쁜 일일 수가 없다. 문제의 나쁜 일이 존재하는 시간에는 그 나쁜 일이 귀속될 주체로서의 a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a가 존재하는, 즉 살아있는 시간 동안에는, 죽음의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a의 죽음의 나쁨은 a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논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5)임을 쉽게 알 수 있다.

 5)는 나쁨과 그것이 귀속되는 주체가 동시에 존재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 원칙에 입각해서, 에피쿠로스가 죽음과 그것의 주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는 과연 참일까?


네이글은 5)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

뇌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유아 수순의 지능을 가진 채 여생을 살게된 한 지식인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그가 유아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욕구들은 그의 보호자에 의해 완전히 충족될 수 있고, 따라서 그는 여생을 아무런 근심 없이 살 수 있다고 해 보자. 우리는 그가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누구보다도 그 자신에게 큰 불행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동의하면서, 만족한 상태에 있는 유아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유아 수준의 지능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났는가를 판정하는 데에는 단순히 어떤 특정한 시점에 어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의 판정에는 그 사건을 겪은 사람의 그 시점까지의 역사와 그에게 주어진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야만 한다.

위의 예에서, 나쁨이 존재하는 시간은 두뇌에 심각한 부상이 발생한 시점 이후의 모든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그 시간 동안에만, 그리고 그러한 지능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만 주목한다면, 그에게 닥친 불행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설명은 그가 사고 시점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지적 수준과 그가 사고로 인하여 박탈당한 여러 삶의 가능성들을 포함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네이글은 이 점을 환원불가능하게 관계적인(irreducibly relational)5)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있다는 말로 설명한다. 그것들은 한 개인과 어떤 상황들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이때 그 개인은 그와 그가 아닌 것들을 구분해 주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선을 가진다. 반면 그와 연관되는 상황들은 그 개인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선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즉 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은 그 개인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선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유언이 유언집행자에 의해서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가 이러한 일의 전형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유아의 지능으로 살아가게 된 사람의 예 역시도 관계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의 나쁨은 그가 주관적으로 겪는 고통이 아니라, 그의 현실과 대안적 가능성들 사이의 대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가 현재 처한 현실과 그가 실현하고 싶어했을 희망들, 그리고 실현했을수 있었던 가능성들을 비교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죽음의 나쁨을 삶의 박탈과 연관시키는 설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죽음을 삶의 박탈로 이해해야 한다면 죽음의 나쁨 혹은 해로움(harm)은 죽음 이후의 시간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하게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나쁨은 반드시 죽음 이전의 시간, 즉 그 주체가 살아있는 시간과 관련되어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해로움이 존재하는 시간은 언제라고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관해서는 다양한 답이 제시되어 왔다.6) 하지만 이 글의 초점이 에피쿠로스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있는 만큼, 우리는 다음의 문제에 집중하도록 하자. 에피쿠로스는 네이글의 반론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에피쿠로스는 아마도 그 반론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원칙들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7)

즉 그는 경험되지 않은 나쁨이 있다는 명제와 주체와 동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쁨이 있다는 명제를 모두 거부할 것이다. 어린 아이의 지능으로 살아가게 된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에피쿠로스는 아마도 이 환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것이다. 즉 에피쿠로스는 그 환자가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 제3자의 관점에서 명백한 불운으로 판단되는 일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런 한에서 그에게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그는 좋음과 나쁨을 판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쾌락과 고통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때 쾌락과 고통의 본성을 어
떤 방식으로 이해했든, 최소한 이 주장은 그가 좋음과 나쁨이 그것과 관련된 주체의 어떤 주관적 경험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그 주체가 즐거운 것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어떤 것도 좋음으로 인정하
지 않을 것이고, 그 주체가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 어떤 것도 나쁨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인식되지 않는 나쁨이 존재한다고 믿는 학자들은 이런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진영 사이에는 일종의 교착 상태가 성립하는 셈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좋고 나쁨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에 관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의 진전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에피쿠로스가 나쁨과 해로움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겠다고 한다면 그의 비판자들이 그를 결정적으로 논파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이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해소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단순히 무엇이 나쁨과 해로움의 본성에 관한 참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나쁨과 관련해서 만일 에피쿠로스의 비판자들이 제시하는 설명이 그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을 더 잘 포착하고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에피쿠로스식의 설명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일반인들의 우려를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즉 만일 일반인들이 죽음과 관련해서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과 함께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면, 죽은 후에 우리는 아무 것도 겪지 않을 것이고, 그 시간에는 우리라고 할 것이 없으니 죽음이 우리를 해할 일도 없을 것이라는 식의 설명은 그들을 전혀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이 삶을 상실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삶의 상실이 일반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라면 오히려 에피쿠로스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철학자들, 즉 죽은 후에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지속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야말로 일반인들의 우려에 정확히 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음 후에도 삶이 상실되지 않고 지속될 것임을 약속하기 때문이다.8)


그렇다면 에피쿠로스 철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데 철저히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필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설사 위에서 제시된 우려가 실질적이고 적절한 것임
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에피쿠로스 철학 내에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그 길은 쾌락의 본성에 관한 그의 설명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복된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최대의 쾌락은 모든 고통의 제거를 통해 성취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이 쾌락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쾌락에 대해 생각할 때 자극적이고 동적인 쾌락들만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더 많이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쾌락의 양을 증대시키고 있고, 따라서 그만큼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일반인들의 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이 이러하다면, 그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고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이 따라 나온다.

그들은 더 오래 삶으로써 더 많은 쾌락을 경험할 것이라고 믿고, 또 그럼으로써 더 큰 행복을 성취하리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쾌락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생각을 시정하는 것은 삶의 연장이 행복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믿음에 내포된 오류를 시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다음의 구절들은 에피쿠로스가 분명히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추론에 의해서 쾌락의 한계를 측정해 본다면, 무한한 시간이 유한한 시간보다 더 큰 쾌락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주요 가르침 19). 육체는 쾌락의 한계가 무한하다고 생각하며, 이처럼 무한한 쾌락을 공급하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사고는 육체의 목적과 한계를 계산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한 다음,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제공해 준다. 사고는 인생의 무대로부터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최고의 삶을 살았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면서 떠나지 않는다(주요 가르침 20).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6).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9) 하지만 더 많은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행복에의 길이라는 생각은,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욕구하는 것들 중 많은 것은 '자연적인(physikai)' 것이 아니라 '공허한(keinai)' 것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127). 그리고 공허한 욕구들을 충족시키고자 애쓰는 삶, 방탕하고 호화로운 삶은 오히려 복된 삶의 목적인 신체의 건강과 마음의 평정을 방해할 뿐이다.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삶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anankaiai) 욕구들의 충족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 것을 헛되이 추구하지 않는 삶이다.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과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1).

만약 누군가가 일단 이 점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면, 가진 더 오랜 삶에 대한 그의 갈망, 그리고 이와 연관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적으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상당 정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필자가 보기에, 쾌락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시정하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의 논란 많은 논증들에 비해서, 죽음에 대한 일반인들의 두려움을 제거시켜 줄 훨씬 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Nagel, Death, 6.

6) 네이글은 그것이 특정한 시간으로 확정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펠트만(Feldman)은 죽음의 해로움을 영구적인 것으로 본다. 죽음의 해로움은 가능한 두 삶 사이의 비교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인데, 이 비교의 결론은 불변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Feldman, Confrontations, 154). 이에 반해, 죽은 사람이 더 살 수 있었을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죽음의 해로움은 소멸한다는 견해도 있다(Feit, “The Time of Death's Misfortune,” Nous 36, 2002, 359-93.).
7) James Warren, Facing Death: Epicurus and His Critics, 27, 48.

8) 물론 이 말은 영혼의 불멸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려는 전략이 참된, 즉 사실에 근거한 전략이고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적 전략에 비해 더 좋은 전략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유물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 논증은 단순히 엉터리 위안을 제공하는 잘못된 논증에 불과할 것이다. 필자의 포인트는 단지 전자의 전략이 일반인들이 죽음에 관해서 두려워하는 바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고 그 점에 초점을 맞춘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9)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그의 비판자들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좁다고 할수 있다.



IV. 대칭 논증


이제 마지막으로 통상 '대칭 논증(the symmetry argument)'으로 불리는 논증을 검토해 보자. 이 논증은 에피쿠로스의 저작이 아니라, 로마시대의 에피쿠로스주의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제시된다. 이 논증의 전거는 다음의 두 대목이다.


"<IV> 그리고 마치 지나간 시간들에 사방에서 포이니키아 인들이 닥쳐와 내리치려 했을 때, 모든 것이 전쟁의 떨리는 혼란에 뒤흔들려 대기의 높은 해안 아래 떨며 전율했을 때, 온 인류가 땅과 바다에 걸쳐 어느 쪽의 통치
로 떨어질지 불확실하던 때에 우리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았듯이, 그처럼,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 수 없으리라, 설사 땅이 바다와, 그리고 바다가 하늘과 섞인다 하더라도(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3권 832-842).10)"


"<V> 또한 돌아보라. 영원한 시간 중,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흘러간 과거가 우리에게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그러므로 자연은 이것을 우리에게, 앞으로 올, 우리가 마침내 죽은 다음의, 시간의 거울 상으로서 제시한다(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3권 972-975)."


대칭 논증의 골자는 통상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된다.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아니라면, 죽음 후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만일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염려할 이유도 없다.

이 논증이 '대칭 논증'으로 불리는 이유는, 물론, 논증이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과 죽은 이후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대칭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원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과연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대칭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과연 비합리적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파핏(Parfit)이 제시하는 다음의 예이다.11)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하나 있다. 그 수술은 많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환자가 아픈 부위를 계속 의사에게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취제도 진통제도 사용할 수가 없다.

단 의사는 이 환자에게 한 가지의 편의를 제공해 줄 수 있는데, 그것은 수술을 마친 뒤 강력한 약을 투약해 고통스러웠던 수술의 기억을 완전히 제거해 주는 것이다. 이제 입원실에 누워있는 환자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수술을 받은 것인가? 그는 물론 그 답을 알 수가 없다.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당연히 기억이 없을 수 밖에 없고, 수술을 받았다고 해도 이미 기억을 제거하는 약을 투약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기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간호사에게 그가 수술을 받았는지를 묻는다. 간호사는 확인을 해 보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뜬다. 자 이제 당신이 현재의 그 환자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다음 둘 중 어느 쪽에 속하기를 바라겠는가? 이미 수술을 받은 쪽인가, 아니면 앞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쪽인가?


파핏이 보기에, 그 답은 명백하다. 우리는 이미 수술을 받은 쪽을 선호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의 고통과 미래의 고통 사이에서 비대칭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호가 존재하는 원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선호가 인간의 합리성과 관련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 등은 이 글에서 다룰 수 없는 광범한 주제들이므로,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파핏의 예는 최소한,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상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 자체로 불합리한 일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죽음과 관련해서도 이렇게 비대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네이글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점을 다시 삶의 박탈로서의 죽음이라는 아이디어와 연결시킨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의 자신의 비존재와 죽은 후의 자신의 비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태어나기 전의 시간과 죽음 후의 시간 공히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죽음 이후의 시간은 죽음이 죽은 자로부터 박탈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만일 그가 죽음의 시점에 죽지 않았다면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시간이다. 따라서 어떠한 죽음도 당사자가 그 시점에 죽지 않았다면 가졌을 어떤 삶의 상실을 함축한다. 반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a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앞서 죽음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 시간은 만일 a가 원래 태어난 시점보다 더 이른 어떤 시점에 태어났었다면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a가 죽음의 시점보다 나중의 어떤 시점에 죽을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a가 태어난 시점보다 앞선 어떤 시점에 태어날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네이글이 보기에, 만일 a가 태어난 시점 이전에 태어난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는 a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12) 따라서 a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은 그의 태어남이 그로부터 삶을 박탈한 시간이 아니다. 그의 태어남
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 어떤 삶의 박탈도 함축하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의 논증은 네이글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다룬 많은 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다뤄져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것의 의도와 구조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13) 이렇게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다는 사실은 위에 인용된 짧은 텍스트로부터 매우 많은 통찰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학자들이 믿어왔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의도를 왜곡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데, 필자가 보기에, <IV>와 <V>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사이에 성립하는 대칭성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 한 예인 것 같다.
루크레티우스가 과거에 대한 어떤 사실에 대한 고려로부터 미래의 어떤 사실에 대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IV>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의 논증의 핵심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성립하는 대
칭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논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실제로 겪을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IV>와 <V>의 포인트는 대략 이런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을 겪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들이라면, 죽은 다음에 일어난 일들도 우리가 겪을 수 없는 일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없는 일들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겪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미래에 일어나는 일도 겪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반드시 과거에 미래에 대한 대칭적인 태도를 함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루크레티우스의 논증을 시간적인 차이가 아닌 공간적인 차이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보자.

만일 그의 논증이, 그것에 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비대칭성에 결정적으로 근거하고 있다면, 이런 식의 수정은 논증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결론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수정된 논증은, 예를 들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만일 수십억 광년 떨어진 다른 우주에서 일어난 일이,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없는 일이니, 우리에게 상관없는 일이라면,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도,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없는 일이나, 우리에게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루크레티우스가 그의 논증을 통해 성취하고 했던 바를 정확히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분명 그의 논증에서 태어나기 전의 시간과 죽은 후의 시간이 가지는 어떤 공통점을 끌어다쓰고 있다. 하지만 그 논증이 그 두 시간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한 어떤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친근한 <I>에서의 원칙, 즉 오직 경험된 것만이 진정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 간주될수 있다는 원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루크레티우스의 논증에서 끌어내어 온, 시간의 비대칭성에 대한 통찰은, 사실, 문학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 번역은 다음 책을 사용했다. 강대진 역주,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서울: 아카넷, 2012.
11) Derek Parfit, Reasons and Perso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166.
정확히 말하면, 대칭 논증을 반박하는 것이 파핏이 이 예를 고안한 목적은 아니다. 그는 그가 'S'라고 부르는 이론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예를 도입하고 있는데, 이 이론의 핵심 주장은 윤리적으로 유관한(ethically relevant) 유일한 요인이 쾌락과 고통의 주체(subject)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 주체가 쾌락과 고통을 언제 경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함축하는데, 파핏이 제시하는 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대칭적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이 이론의 약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12) Nagel, Death, 7-8. 네이글이 이야기하는 비대칭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a의 죽음의 시점을 뒤로 미루는 것은 필연적으로 a의 삶의 연장을 의미한다. 반면, a의 탄생의 시점을 앞으로 당기는 것은 필연적으로 a의 삶의 연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가 삶의 박탈과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게 된다.
13) 과거와 미래 시간 사이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네이글의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Kaufman,Death and deprivation”; Belshaw, Asymmetry and Non-Existence,Philosophical Studies 70, 1993, 103-116.



참고문헌


에피쿠로스, 쾌락, 오유석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8.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대진 역주, 서울: 아카넷,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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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ren, J., Facing Death: Epicurus and His Critic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Abstract>

Epicurus and Death


Hun Sang Chun (Sogang Univ.)


In this article, I examine three Epicurean arguments to eradicate fear for death. In the first argument, Epicurus argues that death is nothing to us on the ground that we cannot perceive death. The principle this argument is based upon, i.e. that what is unperceived is nothing to us is heavily criticized by many contemporary philosophers. I examine Nagel's classical paper on this issue and explain how his position is connected to the view that the badness of death consists in the fact that it is the deprivation of life. In the second argument, Epicurus argues that death is nothing to us on the ground that the subject of death and the harm of death cannot coexist. This simultaneity principle is also criticized by Nagle among others. I examine his criticism on this question and then consider what Epicurus' response to these two criticisms. I argue that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positions are based on deep disagreement on the criterion of value-judgment and is fundamentally insoluble. I suggest that Epicurus has a more convincing way of eradicating people's fear for death than those arguments he actually offers, i.e., pointing out the nature of true pleasure and the correct way of its maximization. Finally I examine Lucretius' so-called 'symmetry argument.' I argue that the criticism many contemporary philosophers have leveled against this argument are basically misdirected in that the argument does not really draw on the symmetry between past and future as they believe, but depends on the familiar principle that what matters to us is what we experience.



Key Words: Epicurus, Death, Nagel, Harm, Simultaneity, Symm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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