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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와 황해도에 거주한 남원김씨 일족
가. 이동규 처 남원김씨(李東奎 妻 南原金氏) 세종 / 임영대군파 14대
이동규 처 남원김씨(李東奎 妻 南原金氏) | ||
이동규(李東奎), 전주이씨(全州李氏) | 세종 / 임영대군파 14대 | |
이동규(李東奎) 처부(妻父) | 김일종(金一宗), 유학(幼學) | |
조부 이하중(李夏重) | 墓龍尾巽坐 | 1696년(숙종 22년) 병자생(丙子生) |
부 이원일(李元日) | 墓龍尾巽坐 | 1740년(영조 16년) 경신생(庚申生) |
본인 이동규(李東奎) | 墓龍尾巽坐 | 1759년(영조 35년) 기묘생(己卯生) |
남원김씨(南原金氏) | 己卯生甲辰卒○墓上同娶南原金一宗女 | |
선영(先塋) | 황해북도 장풍군 가곡리 용미(龍尾) 巽坐 |
◉ 승정원일기 613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 3월 20일 임자 31/36 기사
1726년 雍正(淸/世宗) 4년
柳鳳煇 등 여러 賊들에 대한 討逆의 의리를 진달하는 李洙 등의 상소
○ 八道儒生, 幼學臣李洙等上疏曰, 伏以臣等, 昨年以來, 上自大臣三司, 下至草野韋布, 苦口爭執, 抗章叫號者, 莫不以懲討亂逆爲第一義, 而殿下一向堅拒, 始則但示訑訑之聲色, 末乃稍震威怒, 而攫抑過絶之, 臣等未知, 爲國家討亂賊者, 何拂於殿下之心, 而乃至於是耶? 臣等, 俱以祖宗遺黎, 爲殿下之臣子, 而尙與諸賊共戴一天, 寧欲裂冠毁冕, 不在人間而不可得也, 則又安得不沬血飮泣, 以爲必討乃已之計耶? 玆敢倡率八路多士, 更此齊聲呼籲於九閽之外, 惟殿下, 哀憐而財察焉。殿下, 英睿出天, 智周萬物, 諸賊之窮凶情節, 已知之矣, 天討之不可不〈行〉, 已知之矣, 人心不可久拂, 亦已知之矣。然而遲回留難, 當斷不斷, 閱月經歲, 汔未有處分者, 抑何也? 臣等竊以爲, 殿下, 雖已知諸賊窮凶情節, 而於輕重淺深之間, 猶有所未燭也, 雖已知天討之不可不行, 而於公私, 毫釐之差, 猶有所未明也, 雖已知人心之不可久拂, 而於聖人大一統之訓, 猶有所未察也。臣請有以條陳之。蓋自肅廟甲戌更化之後, 六年·九年之說出, 而彼輩, 已得罪於名義矣。彼亦自知其不容於淸議, 而敢爲中廟朝安老輩假托之說, 以爲日後自全之計, 其主張此計者, 非輝之父·恒之兄, 則乃耉與佐·億之徒耳。及見先王, 不幸無嗣, 而介弟之親, 唯有殿下一人, 則彼之深憚而陰忌者, 蓋有年所矣。是以有嫌之言, 泰耉唱之, 驚惑之說, 鳳輝繼之, 恒·佐之輩, 又爲傳禪國亡等語, 百般搖撼於建儲·代理之策, 而鏡·儉之變, 遂作矣。然則耉·輝等, 卽諸賊之根本也, 鏡·儉輩, 則諸賊之枝葉也。根本·枝葉, 因爲相須, 而今殿下, 只治其枝葉, 不治其根本, 此臣等所謂輕重·淺深之間, 猶有所未燭者也。君臣, 天下之大倫也, 謀逆, 天下之大惡也。是故, 莽·操·懿·溫之徒, 卽千載之人, 而異代之賊耳。然至今簡編之上, 人之覽其情跡者, 莫不扼腕而切齒, 此其故何哉? 誠以亂賊之必誅, 卽天下之公理, 而人心之所同然也。漢高之不誅貫高, 先儒猶非之, 梁武之泣赦謀逆, 終致其亂亡, 蓋以其一時之曲諒少仁, 害天下之公也。今殿下, 視諸賊猶一己之私賊, 而不知爲天下後世之所共誅, 遂一切寬貸, 欲以曲遂其好生之心。夫好生之心, 固仁之端, 而旣不能當理, 則便是私也。此臣等所謂公私, 毫釐之差, 猶有所未明者也。國論之分裂, 已垂二百年, 君子·小人, 各自爲朋, 轉展層加, 至於向來而又爲逆順之分矣。夫人情, 莫不欲捨逆而就順, 彼之黨類, 其麗不億, 此豈盡無秉彝之天者哉? 只以一入邪逕, 尠能自返, 而主張其論者, 又爲疑亂眩惑之說, 以誑誘之, 故聽之者, 眞以爲是, 而不自知其陷於亂逆之儔耳。是以, 今之爲輝·鏡之說者, 幾半一國, 殆不可破, 一自鏡·虎之伏法, 稍稍有欲自異者。此乃轉移世道, 變逆·爲順之一大機會, 而殿下, 乃反容貸巨魁, 不肯加誅, 則彼輩竊議以爲, 謀危君上, 卽王法之所不容, 而某某之不死, 乃其所守者是, 而不可以爲逆故也。於是乎, 鼓舞相賀, 益肆凶說, 而彼稍欲自異者, 又復自悔, 還尋其故, 則是殿下之國, 半是背馳殿下之徒, 而朱子所謂, 以蜀之小, 兩國, 又自相攻者, 不幸近之矣。殿下, 今愛惜凶魁, 而反使半國之人, 不能自脫於亂逆之倫, 此臣等所謂聖人大一統之義, 猶有所未察者也。自古亂臣賊子, 有不知而不誅者, 哀·平之於王莽, 玄宗之於祿山, 是也。有知之而力不能誅者, 周之於列國, 唐之於藩鎭, 是也。其不知而不能誅者, 其禍速而反致匡恢之烈, 其知之而不能誅者, 其禍遲而竟不能興復, 蓋不知而不能誅, 則倫常猶未盡淪, 而知之而不能討, 則天下不知名分之嚴, 人心無所係也。今殿下, 旣已知之, 力又足以討之, 而終不肯討, 臣等竊恐, 其禍反有甚於周·唐也。豈不痛哉? 夫諸賊之罪, 輿儓下賤, 皆曰可殺, 而雖其黨類, 初亦以爲, 必不免誅, 則是所謂國人皆曰可殺者也。國人皆曰可殺, 而殿下獨以爲不可殺, 豈有違衆自用如是, 而其國不亡者乎? 噫, 大臣, 殿下之股肱也, 臺諫, 殿下之耳目也。太學之生, 雖不能盡法孔子, 其中有志者, 亦皆孔子之徒也。今者殿下, 以容護凶賊之故, 而大臣決歸, 臺諫遠逐, 而太學諸生, 又被未安之敎矣。殿下, 旣自斷其股肱·耳目, 而拒絶頌法孔子之徒, 藉曰, 殿下今日處分, 不害爲一時之寬平, 而只此數者, 亦足以亡殿下之國家也。臣等, 皆鄕曲賤士, 固不足以遽回殿下獨斷之心, 而區區葵藿之誠, 不能自已, 敢陳狂瞽之說如此。伏乞聖明, 不以草野寒賤之言, 而少加察納, 亟正諸賊之罪, 則宗社幸甚, 臣民幸甚,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旣諭, 云何? 疏錄, 慶尙道幼學臣李洙·李昉·尹得冉·李鎭夏·辛政復·李聖時·金國寶, 生員朴聖時, 幼學李道章·羅學淳·兪禹相·辛景馥·金仁聖·成翊昌·李希昌·閔友賜·李希洛·李坦·金重器·曺孟明·金重成·李墰·辛景奭·金聖佑·辛岌·兪夢相·郭成涵·盧龍甲·兪冉相·朴重一·閔友參·金華世·金宇重·金重白·朴思咸·李埰·孫命天·孫慶始·朴胤宗·朴胤文·何得一·李希安·呂柱·李宅仁·黃演·黃鍾古·李泰年·許楷·李泰運·李油然·申鳳儀·申命德·金弘道·張志恒·都萬紀·李德祖·崔柱廷·金啓商·金之錄·都萬封·金之欽·金之鎰·成弘續·崔嵂·崔垕錫, 進士成淑, 幼學崔禹瑞, 崔弘錫·金以恒, 生員申鎭九·申鎭宅, 幼學兪彦經·成爾漢·成爾淳·成爾混·成爾沅·尹商霖·成爾澯·成憲柱·成漢柱·成爾濂·金弘國·金弘寶·尹大遇·朴聖瑞·朴就章·鄭重泰·李廣淵·李廣規·李道恒·金義遂·郭時在·閔重錫, 生員朴思亮, 幼學張大和·蔡時欽·申光寅·南道輶·蔡遇·蔡命海·金鐛·蔡時建·申光震, 進士申鎭元, 幼學李僞謙[李爲謙]·金銑·羅學濟·金翊漢·金萬敵·羅學成·尹和彦·尹孝彦·尹朝彦·朴鳳祥·朴鳳休·朴始陽·朴始泰·朴有華·李恒壽·李聖斗·李暹·李千齡·李匡尹·鄭昌圭·都命時·都命恒·李夏培·李德一·李德淵·盧碩恒·金尙仁·盧大澲·曺時甲·成夏宗·孫命有·李KC00902·權萬度·金重來·張齊賢·權萬雄·盧大淇·金重世·曺夏鳳·鄭孝玉·孫命性·郭來涵·金重剛·成命昌·河應參·李萬春·成煥·許瑨·曺世麟·楊期春·曺淑·曺漢瑞·李希元·朴泰齡·朴聃齡·朴衡齡·朴益齡·沈龜賢·沈致賢·李錫玄·李亨普·沈鍵·韓弘弼·玄禹璋·徐崙·鄭益周·鄭重泰·鄭聖周·徐崶·韓泰恒·鄭垕世·李仁紀·姜錫禔·洪遂海·姜益溥·金昌重·曺瀅·金致重·李萬剛·曺深·權一大·金宇兌·權命大·金世鎰·李萬葉·金世璋·朴來松·金世圭·姜台老·李星白·姜東翰·李星大·李寶·李天杓·李世琯·鄭致周·李天極·柳萬禧·曺啓夏·李KC00628·李世玹·曺夏聖·宋商輔·李萬春·李商尹·李亘三·李台祥·李亘夏·李晬·崔震東·李茂松·柳東彩·李亘命·柳德考·李景春·鄭榏·李泰仁·李元文·曺德·姜大奇·曺又鱗·姜聖構·成虎采·李天祐·姜處殷·姜世德·李道弘·郭在新·郭垕·金慶鳴·羅學程·郭來甲·郭命說·郭景斗·朴成泰·郭萬元·金聖憲·郭命天·蔡夢翼·金震鎰·辛冉齊·金夏冉·沈楷·權大亨·金爾亮·金昉·盧大演·金懲·李命新·河瑞禹·徐璜·金萬寶·朴瓊·姜相擧·鄭商霖, 進士成德徵·蔡命寶, 幼學李正鳳·李后迪·李泰明·表廷泰·李暄·曺夏珶·金信大·全聖孝·朴垕泰·愼邦彦·愼邦憲·文世仁·柳漢郁, 生員崔鵬瑞, 幼〈學〉金萬鈒·全聖範·柳時華·朴尙古·愼商翊·愼貞錫·愼履亨·柳漢瑞·李后湜·崔泰亨·柳棕·徐摶·鄭錫桂·鄭新桂·徐撰·權泰斗·洪壽益·柳天明·鄭東雄·權泰復·李命老·權泰元·權泰義·柳碩明·朴泰羲·權太祐·李胤宗·柳應明·柳德齊·權以升·李世甲·鄭璨·鄭東龍·李命迪·柳重明·曺以性·權以中·洪壽聖·盧爾璣·盧爾璨·盧大甲·洪壽封·慶大來·魚好淵·魚遇淵·崔鳴大·崔元大·河聖胤·朴允文·柳演·柳時明·魚大淵·曺以寬·鄭昌德·鄭觀德·宋德新·李玄道·李就道·朴時蕃·李垕·李堡·朴時茂·朴希仁·朴希天·李世紀·李世貞·李殷相·金德興·朴世燾·朴明采·朴浩源·朴萬奎·朴萬墅·朴萬源·朴泰升·朴泰登·朴泰元·朴泰謙·朴泰晉·韓世翼·崔載一·鄭泰燮·鄭天燮·鄭昌燮·鄭仁杰·崔載瓊·崔載冉·崔琇·崔光普·崔好仁·金宗寶·金宗大·金宗彦·金宗夏·金必潤·金尙三·金錫三·金世鍵·金必聲·郭景益·朴尙燁·朴震泰·朴震逸·朴震紀·朴聖麟·金城國·金儀國·全以紀·全以翰·全泰基·全福基·全得基·全俠·韓景斗·韓宗斗·韓受謙·韓國弼·申道濟·李萬貞·李翊獻·李翊欽·李光夏·李昌夏·李春馦·李友恒·權漢永·權萬準·權欽·洪亨益·都瑞明·柳錫祺·宋來白·朴東望·鄭潗·全瑢·李長春·李極天·全瓚·李培春·全昌儁·白龍成, 生員禹洪迪, 幼學徐洛·朴成德·朴亮采·郭涉德·郭漢德·崔鳳瑞·姜聖和·崔龍瑞·姜太古·崔鵬瑞·申德KC02009·申台錫·李桂德·宋厚基·李達德·李萬元·金宇極·申德溟·金汝鏞·李世胤·朴泰亨·申演·申允模·具鳳德·申德沂·李增·申思國·李泳·李涕·李潝·張孝白·李圭·李堂·張大濟·李坳·張大鳴·張孝思·張大河·申德徵·申德泓·曺世虎·曺世鳳·黃元吉·鄭德隣·黃有厚·韓道大·李益三·韓益濟·全琛·李仁俊·禹洪晳·李馨春·楊大隨·徐淹·禹弘龜·禹弘益·全載德·全昌恒·禹洪紀·楊大恒·蔡冉夏·蔡達夏·柳達海·孫邦杰·徐翊世·徐潛·郭斗標, 生員柳檉, 進士李后沆, 幼學尹得咸·李恒春·禹命樞·蔡興夏·呂必瑞·李載春·徐翊武·徐大甄·蔡時鐃·柳長華·李世彩·呂必櫶·崔弘錫·呂必泰·徐湘·徐淙·徐鵬世·全慶傳·全昌旭·鄭理·郭斗樞·呂必㯳·權璸·宋碩徵·宋逸徵·宋國徵·權萬宜·李是禎·李益泰·崔宗元·金兌郁·安聖履·李雲紀·崔昌元·蔡汝䇼·金夏冉·鄭元燮·金宗聖·李友恒, 進士權壽大, 幼學金昌基·朴震甲·金命一·金琮·申命相·白命聃·朴弘宙·金圭·金天表·兪碩佐·申以濟·李時植·申任唐·崔斗三·金鳴一·柳㰒·李后相·表世湛·李正昌·李正麟·柳漢彬·金萬兼·李光衍·崔龜瑞·金爾杰·全聖三·表璟·柳漢彩·全孝大·都瑞長·宋仁涵·李益新, 進士禹洪受·禹洪標·禹洪疇, 幼〈學〉李禎厚·朴重采·朴元德·朴來德·李華春·崔麟瑞·崔龜瑞·具重履·具冉履·具謙履·徐漢興。咸鏡道李漢郁·李泰章。京畿李思誠·李必亨·閔長卿·鄭龍弼·宋夏瑞·李必遠·宋彬·李必榮·李必茂·李維漸·李恒·李惇·鄭世恒·趙德健·韓壽增·韓采增·鄭纘模·李萬祚·李基周·李相緝·李聖佐·李春祥·金璥·李儒珍·李儒淳·李儒鴻·李萬濟·李萬泰·李萬復·李顯民·李厚民·金應九·金應祚·韓汝海·韓汝重·權會慶·金應漢·朴肇赫·李瑾·李瑜·李𤨢·李明最·李彦最·柳培·柳KC00637·李基聖·申景說, 進士崔沂, 幼學崔溪·李寶臣·李光臣, 生員朴履祥, 幼學尹恬·愼希顏·金履遠·任頊·金應成·尹聖復·尹聖一·柳習·申命說·李義夏。全羅道李德培·吳仁錫·李以儉·兪格·陳宗漢·蘇昌燁·鄭邦祐·柳萬榮·李以讓·南天柱·朴漢明·金光瑞·李東碩·蘇昌爀·權必泰·金潤夏·朴致淳·吳命垕·金震夏·金尙璘·蘇碩升·宋之健·鄭泰復·南天衢·蘇碩晉·陳起漢·陳后錫·柳萬長·蘇昌煥·金尙瑜·金起夏·金應昌·南天桂·李原榮·陳日章·宋道燦·南雲翰·蘇昌煜·宋道炫·陳麒瑞·金尙瑀·蘇碩臨·宋道明·金德裕·柳龜齡·陳大復·金華瑞·李東元·金尙炫·金應鏜·柳聃齡·陳益盛·宋德隆·鄭泰益·宋道炯·吳命益·柳萬著·宋德昌·宋道烜·金應九·高日徵·權浹·高日章·金鐄·李興俊·宋台徵·全德炳·李柱邦·金鏜·全頊·孫世翊·李柱天·朴就規·朴震相·宋大徵·朴弘規·吉尙復·郭鎭泰·全德履·金泰珣·琴鳳郊·韓聖奎·吳命錫·成後孟·趙陽彬·金泰運·趙陽郁·金泰珩·宋泰徵·全在明·任重德·高尙一·任重三·高尙德·李注海·辛權·高尙呂·金泰璉·金五一·高尙濂·金五元·金在長·金在一·李觀華·金在弘·辛禎·全在和·金慶益·高尙周·金泰玧·金在哲·宋師程·金泰琳·金在復·李光夏·金以兌·全在頤·辛晟·辛應夢·郭聖賚·趙元綱·趙元相·趙順基·高尙烈·金泰益·金泰采·朴震輔·宋師拭·高尙尹·韓泰章·柳雲慶·偰命殷·權應房·洪橧·朴光璘·偰瑍·洪枓·尹聖麟·韓胤東·權龜年·薛晥·金俊賢·楊欽·洪汝明·楊銑·吳泰東·偰宗殷·韓偉·偰珷·薛昉·洪橚·洪汝俊·金世賢·柳春益·韓德龜·洪汝通·韓道東·姜與載·柳春震·薛晥·權延年·洪汝澄·楊大杰·梁濟民·韓命東·洪汝迪·楊夏濟·權德齊·偰玹·鄭來鳳·朴光琥·偰贇佐·偰纘殷·權萬濟·楊漢昇·偰堯佐·吳道彩·姜師載·偰台佐·偰琂·楊應澤·權載稱·偰舜佐·朴致素·楊普基·吳道濟·鄭世垕·黃景烈·宋道洙·金聖杰·鄭世曾·李宇楫·金鎡·李楚興·李夏衍·崔以完·李震邴·宋思謙·李殷衍·李夏馥·宋挺倚·宋殷緖·洪以㯍·柳翼運·柳一星·崔以全·柳夢華·柳暻·李東泰·李榏·柳齊憲·禹冉命·宋殷封·洪以柁·宋秀春·宋奎煥·宋秀彦·柳世彬·宋殷培·崔昌漢·梁聖遇·金聖槼·韓重勳·李萬祺·崔命崙·金聖榘·金汝精·宋秀徵·李龜元·趙恒錫·柳一龍·李夏行·金昌運·洪復熙·柳亨運·朴昌萬·李惟東·崔以坦·朴昌道·李震興·徐鎭垕·宋德駿·李廷柱·李汝龍·鄭繼曾·李大憲·李載萬·李東曄·朴昌會·李應辰·金瑞朝·李震發·李儀·宋德孫·黃世鉉·朴瓛·柳遇暘, 生員李聃龍·朴世鳳·宋殷圭·宋之鐸, 進士金應鍾, 幼學林秀英·李朝白·李恒烈·李聃壽·鄭守曾·李恒新·李倫·元命佐·李朝海·李㑻·柳輝天·宋之鉉·宋之鏐·李遵憲·李仁萬·李景憲·柳鳳燦·文道樞·朴命采·崔漢龍·柳漢復·宋啓遠·鄭堉·林挺橒·李德明·崔俊八·金遂濟·任璜·姜永來·林中桂·李儔·柳汝楫·朴思誠·李繼孫·李惟章·李命孫·蘇大謙·鄭𣆴賓·李錫衍·朴尙燁·韓重烈·鄭曄·鄭舜賓·金義德·黃潤德·柳謙·宋德觀·宋秀斗·李益烜·姜瑞靈·柳德輝·李惟栽·姜昌業·朴后龍·李龜靈·李聃隱·禹冉相·吳錫圭·吳聖時·吳壽興·鄭東燁·楊遇靑·楊遇新·韓汝柏·韓汝松·韓宅心。黃海道進士李光蓍, 幼學金光振·李仁壽·李元甲·金益泰·金鎡·李元垕·李鳳翼·李冉華·尹壽甲, 進士尹壽俊·李仁濟, 幼學奉日晉·奉日臨·金鍊九·朴載恒·朴載淳·趙汝豪·金晥·李正寅·李師翼·尹壽岱, 生員姜晉基·李光奎, 幼學李錫夏·李正彙·李正倫·朴廷燦·姜晉熟·李仁咸·李光選·李仁恒·安喜天·安命國·趙汝俊·趙汝宣·奉明佐·朴葂·金命徵·朴茂·朴葳·朴葴·安昌國·尹KC00222·尹俰·尹𠇟·李靖夏·朴荇·金俔·安正國·李惇五·李敬五·朴載淸·朴薰·朴𧂍·李宗協·李公協·李德龍, 進士李光緯·吳泰欽·吳泰胄·朴𦸂·尹俔·金鶴九·金允五·朴苾·金光世·尹俒·尹壽岳·尹壽崙·李仁泰·金相五·朴莢·金冉垕·李寬五·李章五·尹備·尹KC00174·朴藏·李必壽·李行五·金俛·金KC10443·李宗夏·安柱國·李徵五·李星五·金旨鍊·金聖輔·李元華·朴萱·朴藢·尹儉·尹倎·李才茂·姜晉鳴·姜晩周, 生員權㻼, 幼學李奎壽·朴蘤·尹儁·李冉協·姜晉壑·姜晉復·吳泰億·吳希曾·趙壽溟·金爾濟·李師義·姜尙潛·李亨遠·朴業·李震協·姜必英·李績夏·李命五·朴廷爀·愼希天·愼希元·權搏·李勛翼·尹光俊·李虎臣·金聖楷·朴葆·尹光履·金鎭綱·金鎭維·金堞·金龍九·金甲老·李升翼·金夏冉·金甲文·金光漢·金光弼·朴景憲·朴門興·安龍慶·閔在魯·金相夏·李仁佐·李光軫·金晊·金晌·李震爀·姜晉弘·尹光佐·李範殷·尹光宣·李德夏·姜必海·姜相海·李德寬·閔頣壽·閔齊儀·趙壽賢·李鵬翼·吳泰鳳·吳泰尙·吳泰維·朴苰·李昌翼·李亨福·李亨洙·姜必璜·尹湫·尹儻·李采五·李仁觀·金冉相·趙汝勝·趙亨壽·金垕·李德基·李時芳·李時薰·金壽冉·金壽夏·金壽益·姜必齊·尹僩·李華翼·李命翼·韓必大·高後胄·高友益·李應麟·崔昌奭·崔昌門·李宅夏·安喜甲·辛格·尹壽會·李彰五·尹壽星·李全五·崔東瑞·李正發。忠淸道金益煊·任震雄·柳一淸·朴弼周·金萬坖·李種蕃·金萬種·朴崙秀·李濟東·李時孟·李時尹·李秀東·李宬·李振東·李翰東·金瑾·尹九一·李種彦·柳一奎·金德基·金萬垕·洪疇敍·韓德重·洪敍範·李龍紀·崔日強·金鎭謙·金萬程·金萬坫·金五一·金萬㙔·金廛·柳仁根·李櫓·李始曾·李始盛·宋必煋·辛就殷·張瑞箕·金蹇·延世齡·辛百齡·金宖·張瑞奎·辛萬齡·張瑞旭·延萬·秋KC10444·張瑞暉·延萬格·辛配殷·辛以殷·張彦緯·黃萬吉·金允錫·張漢相·張瑞樞·辛大潤·辛光禹·延萬宅·延海俊·張瑞杓·張彦紀·李震煜·劉景亮·辛大呂·辛處殷·李世樑·張瑞鳳·劉壑·張濤·延命東·延萬華·李廷興·辛佐殷·辛大衍·張瑞龍·辛大廈·辛大敏·李震熺·劉埈·金宜·金冉錫·李華瑞·張文煜·李來瑞·張文垕·張瑞宇·延聖柬·張載垕·韓始益·金恒錫·韓載謙·韓載兌·權大悅·辛大有·辛學齡·韓載謹·張文爀·李後沆·李雲瑞·延濟東·辛泰齡·楊敏章·延萬祖·韓始殷·延海雄·辛光岳·韓載觀·延萬迥·李震亨·延泰運·延光運·李昌瑞·韓載基·延默謙·楊敏亨·張景洙·辛景馥·兪禹相·兪冉相·辛景奭·金聖佑·李油然·李華年·李惠年·裴昌錫·金聖仁·兪夢相·李台一·李台三·李基仁·辛岌·辛嶖·辛崗·權炯·權榮·李立齡·李齊聃·李齊檜·李齊聖·李齊蕃·權洺·權河·尹昌奎·尹錫奎·尹鎭奎。江原道辛聖源·金夏兼·李夏佑·金以剛·閔載文·辛甲東·辛碩東·崔虎徵·金應鐃·李重·曺夏蓍·崔天迪·崔鎭奎·辛聖澤·沈植·金暋·李悌·崔裕慶·閔昌文·崔龍徵·權達思·李擧·曺夏綈·李萬肇·李禧肇·曺夏橚·權弼思·李仁徵·崔龜徵·辛達東·辛斗東·崔麟徵·辛纘東·辛宗東·曺永禧·辛載復·辛始復·曺永洽·李寅興·辛鎭東·李睦·李時欽·崔翼海·崔宗煥·金昌炫·辛益東。平安道趙泰奎·趙慶夏·金思佐·金思佑·黃信采·趙泰軫·張鳳翊·羅采傳·黃內美·趙泰張·趙敬說·盧永宇·趙泰翼·盧昌范·金亨隨·金震五·康益秋·金桁·盧興悌·金命大·李震一·金憬·黃德載·金盪·金澤·趙東恒·金錫福·金錫祿·宋燦奎·宋紀奎·金錫祺·金錫禧·宋尙奎·宋昌奎·金錫煆·金錫祚·宋興奎·宋炳奎·金錫祐·金錫禎·林敬昌·金錫來·林釋昌·金錫眞·林極昌·林三昌·金錫采·金錫興·林四昌·林五昌·金萬斌·金萬輝·林以檍·林以樟·金萬郁·金萬重·林以榗·田萬疇·金萬珣·金萬豐·田萬頃·金萬澄·金致千·金得千·李世潝·李世郁·金壽千·金富千·宋時濟·宋時大·金益千·宋希充·宋天壽·宋彭壽·金瑞冉·金瑞三·金禹冉·金夏冉·林允德·林鳳鳴·車允翁·車得翁·車萬翁·徐八俊·徐八介·徐厚提·金世振·金九冉·金九錫·金九瑞·林盛甲·林萬甲·金九鳴·金鳳瑞·金龍瑞·金虎瑞·金鶴瑞·金尙夏·林震甲·林碩根·朴泰稂·金泰興·金泰成·金義德·金秋鳴·金聲大·金聲振·李萬馧·金夢一·金大夏·金光振·金光漢·金信民·金奇珍·金萬白·金重千·李英白·金涑·金沃·林益亨·林震恒·林震維·林震起·金起鳴·吳道濟·林漢柱·林震章·金一宗·金秀沃·金國謙·林震榮·林壽兼·林致職·林鳳采, 進〈士〉金錫九, 幼〈學〉金運秋·李台輝·金世良·金德珍·車擎翁·車萬興·安仁華·姜霮·張世俊·張世維, 進士金仁冉·朴興文, 幼學金振璜·金漢明·朴興采·林擎宇·鄭再鳴·李承春·洪一河·洪一海·洪徵河·洪錫景·李挺岳·尹之涉·尹之泳·尹榮三·尹莘訪·尹尙徵, 進士鄭楷·金德齊·金漢明, 幼學李楫·李桷·黃鐸·黃鏶·金運西·金兌西·李錫珍·李錫球·李道一·李道濟·金相濟·徐文益·金鳴周·金益夏·康晉垕·金克俊·尹莘聘·尹廣道·尹就道·金兌明·金兌榮·李齊聲·閔齊回。
참고로, 조선 전기에는 성균관(成均館)의 중재(中齋)와 하재(下齋), 사학(四學)의 학생(學生)과 지방 향교(鄕校)의 청금록에 입적한 교생(校生)이 사마시(司馬試)나 문과에 나갈 때에 유학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을 모두 유학이라 칭했을 뿐 아니라, 17세기에 이르러 “살아있을 때는 유학이라 칭하고, 죽은 뒤에는 학생이라 칭한다(生稱幼學 死稱學生)”는 관습이 나타나 유생이 살아있으면 과거(科擧) 응시나 나이와 상관없이 유학이라고 칭하였다.
유학은 유건(儒巾)이나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음으로써 구별되는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일정한 예의범절과 법도를 지켜야 하였다. 가묘(家廟)를 세워 4대조의 신주(神主)를 모셔야 하고, 길흉상제(吉凶喪祭) 때에는 주자(朱子)의『가례(家禮)』에 규정되어 있는 법식을 따랐다. 서울은 성균관 및 사학, 지방은 향교의 유적(儒籍)에 등록되어야 하며,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실시하는 석전제(釋奠祭) 등에 참석할 수 있고, 학교에 입학하여 각종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사학과 향교에서 수년간 공부하다가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비로소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다시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대과(大科)에 응시,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는 것이 유생들의 정상적인 경로였다. 유학과 학교와의 관계를 보면, 인조 3년에 유생은 이름이 학교에 속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유학은 학교에 입적하였고, 이는 과거응시 자격요건의 전제가 되었다. 유생이 학교에 입적하지 않으면 과거응시를 규제할 정도로, 관직이 없는 유생을 학교로 유도하였다.
나. 무과급제자 김송로(金松老)
성명 | 김송로(金松老) |
[무과] | 정조(正祖) 8년(1784) 갑진(甲辰) 정시(庭試) 병과(丙科) 1947위(1951/2692) |
생년 | 신유(辛酉) 1741년 (영조 17) |
합격연령 | 44세 |
본관 | 남원(南原) |
거주지 | 평안남도 삼화(三和), 평안남도 용강의 옛지명 |
전력 | 별무사(別武士) |
부(父) | 성명 : 김정서(金廷瑞), 관직 : 양인(良人) |
출전 | 『갑진왕세자책봉경용호방(甲辰王世子冊封慶龍虎榜)』(국립중앙도서관) |
별무사(別武士)는 조선후기에 일반 병사나 한량 등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아서 선발하였던 마병 장교이다. 처음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보군(步軍) 중에서 무예가 있는 자 약간 명을 뽑아서 말을 주어서 마병(馬兵)으로 편성하였다. 그 뒤에 한량(閑良) 중에서도 선발하였다. 수솔마병(隨率馬兵)이라고 불리다가 1710년(숙종 36)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별무사로 고쳤다. 훈련도감에는 모두 68명이 있는데 10명은 중군(中軍)에 속하고, 20명은 좌·우별장(左·右別將)에 나누어 속하고, 4명은 좌·우천총(左·右千摠)에 나누어 소속되었다. 금위영(禁衛營)에는 모두 30명으로 중군과 각위에 나누어 속해 있었다. 어영청(御營廳)에는 모두 30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중군에 10명이 소속되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해적(海賊)을 방어한다는 이유로 외방에도 설치하였다. 군영의 경우에는 대장소(大將所)나 중군소(中軍所)에 소속되어 호위나 사환 등의 임무를 맡았으며, 궁궐 밖의 순찰과 감독, 진(鎭)과 둔(屯)의 전답에서 세를 징수하거나 환곡을 거두는 일, 한성부 금송군(禁松軍)에 배속되어 산지기하는 일, 입직(入直) 등을 담당했다.
다. 이상건 처 남원김씨(李尙健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15대
이상건 처 남원김씨(李尙健 妻 南原金氏) | |||
이상건(李尙健),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15대 | ||
이상건(李尙健) 처부(妻父) | 金□□ | ||
조부 이정오(李正五) | 墓所串洞亥坐娶 | ||
부 이양식(李陽植) | 墓中南一所新倉洞丑坐 | 1793년(정조 17년) 계축생(癸丑生) | |
본인 이상건(李尙健) | 1814년(순조 14년) 갑술생(甲戌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甲戌生□□卒娶南原金□□女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영변군 연산면 화천(花川) 馬峴洞壬坐 |
라. 이응모 처 남원김씨(李膺模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18대
이응모 처 남원김씨(李膺模 妻 南原金氏) | |||
이응모(李膺模),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18대 | ||
이응모(李膺模) 처부(妻父) | 김재윤(金在潤), 金在潤爲平薪僉使, 종3품 | ||
조부 이상즙(李相楫) | 雲山官軍隅庚坐 | ||
부 이만흥(李萬興) | 了城里酉坐 | 1768년(영조 44년) 무자생(戊子生) | |
본인 이응모(李膺模) | 南外城卯坐 | 1801년(순조 1년) 신유생(辛酉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辛酉生, 忌九月十九日○墓南外城卯坐娶南原金在潤女庚申生, 忌四月十八日○墓魚川三巨里壬坐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남외성(南外城) 卯坐 |
◎ 승정원일기 1950책 (탈초본 103책) 순조 8년 6월 21일 을묘 9/30 기사
1808년 嘉慶(淸/仁宗) 13년 兵批의 관원현황
○ 兵批, 判書金履翼進, 參判尹致性進, 參議南履翼進, 參知鄭景祚入直進, 右副承旨尹鼎烈進, 以吳載熙·韓用鐸爲知事, 李勉兢爲都摠管, 李東善爲副摠管, 李儒燁爲宣傳官, 訓鍊主簿單尹世俊本院去官, 韓光迪爲內禁將, 李貞坤·韓師鎭·金樂海·鄭魯誠爲五衛將, 訓鍊判官金泰協, 訓鍊主簿金弘喆·張遇良·宋再成以上依定式減下事, 承傳。 韓命祺爲五衛將, 李鍾三爲忠翊將, 文有章·朴文郁爲景福將, 文尙表爲訓鍊僉正, 李悌彬爲訓鍊僉正, 洪疇九爲中樞都事, 劉弘基·李重協爲訓鍊主簿, 李載弘爲三陟營將, 趙崗爲廣州中軍, 禹拓夏爲全羅左水虞候, 鄭泰曾爲慶尙左水虞候, 李台遠爲羅暖萬戶, 李燁爲厚州僉使, 韓根馨爲安興僉使, 吳亨喆爲法聖僉使, 朴聖鎬爲防踏僉使, 金鎭恒爲荏子島僉使, 李寬彬爲南虞候, 金尙孝爲龜山僉使, 金在潤爲平薪僉使, 韓興國爲善績僉使, 金學濂爲龍媒僉使, 宋履慶爲馬梁僉使, 李鳳儀爲文城僉使, 鄭義鎭爲麟山僉使, 洪潤浩爲魚游澗僉使, 黃道彦爲老江僉使, 李倞賀爲美錢僉使, 同知單文有章·劉興五, 僉知單李琦鉉·尹澤烈·李爀·李鐵永·李貞坤, 大護軍李直輔, 護軍韓致應, 副護軍洪羲膺·鄭來百, 副司直李勉求·尹久東·安光宇·申光軾·柳遠鳴·尹東壽·趙晉和, 副司果李垿·鄭文始·李永純竝單付。 以金德信爲柔遠僉使, 高道明爲南桃浦萬戶, 廉德運爲會寧浦萬戶, 曺潤身爲多慶浦萬戶, 徐日成爲馬島萬戶, 朴道弘爲豆毛浦萬戶, 金仁煥爲所已萬戶, 崔獻祥爲越松萬戶, 趙彦基爲助泥浦萬戶, 徐在亨爲於蘭萬戶, 田得祿爲德津萬戶, 孫處恒爲寅火堡萬戶, 金宅徵爲濟物萬戶, 金鳳倜爲仇寧萬戶, 金鎭綱爲笠嚴別將, 李寬休爲黑山島別將, 朴師雄爲文殊別將, 裵大倫爲保山別將, 金之漢爲鳥嶺別將, 護軍單李文協, 副護軍單元晦鎭, 魚錫命爲部將, 金權爲林土別將, 金孝載爲九月別將, 吳義喆爲長壽別將, 秦東運爲訓鍊判官, 洪翼彬·李慶培·鄭龍河爲訓鍊主簿, 沈公燁爲全羅右水使, 李普天爲同知, 李仁秀爲兼訓鍊都正。 尹鼎烈, 以兵批言啓曰, 五衛將李貞坤前任三陟營將, 韓師鎭前任順天營將, 韓命祺前任南虞候, 俱在任所, 上來間該廳番次苟艱, 竝改差, 何如? 傳曰, 允。 以李禹道·張東玉·李益賢爲五衛將, 李晩植爲訓鍊正, 李儒祥爲慶尙右兵虞候, 宋應圭爲北評事。 尹鼎烈, 以兵批言啓曰, 新除授KC00040溫萬戶韓宗涉老母今年八十五歲, 法不當遠離赴任云, 邊將之親年七十五歲以上者, 許遞其任, 載在法典, 依法典改差, 何如? 傳曰, 允。 以高震聲爲KC00040溫萬戶, 具守諒爲部長, 以上落仕最久人收用事, 承傳。 具毅和爲公州營將, 南錫九爲全州營將, 李永建爲江原中軍, 朴宗林爲順天營將, 閔致愼爲京畿中軍, 僉知二單, 李禹道·張東玉。 尹鼎烈, 以兵批言啓曰, 新除授五衛將李禹道前任全州營將, 張東玉前任江原監營中軍, 李益賢前任平安兵虞候, 俱在任所, 該廳番次苟艱, 竝改差, 何如? 傳曰, 允。 以韓鐸謩·李亨祿爲五衛將, 金麟鍾·李忠運爲訓鍊副正, 韓國良爲公忠水虞候, 徐致輔爲宣傳官, 李明錫爲訓鍊僉正, 李元祥爲平安兵虞候, 張彦極爲慶尙中軍, 朴思英爲全羅中軍, 金致恭爲訓鍊判官, 朴履榮·李思謙爲訓鍊主簿, 韓宅源爲武兼, 副司果單魚錫命。 尹鼎烈, 以兵批言啓曰, 新除授五衛將韓鐸謩前任全羅監營中軍, 李亨祿前任慶尙監營中軍, 俱在任所, 上來間該廳番次苟艱, 竝改差, 何如? 傳曰, 允。 以金益淳·趙雲衢·洪聖禧爲五衛將, 李義權爲訓鍊主簿, 申在恒爲中樞都事, 李邦榮·李濟元·趙雲豪爲武兼, 李萬柱爲守門將, 三陟營將李載弘, 公州營將具毅和, 全州營將南錫九, 江原中軍李永建, 南虞候李寬彬, 以上今加折衝加資事, 承傳。 副護軍單李載弘·具毅和·南錫九·吳泰贒爲副摠管, 李榏爲宣傳官, 李近植爲訓鍊主簿, 權思漢爲武兼, 安光贊爲從浦萬戶, 吳慶德爲都摠經歷, 李升權爲訓鍊僉正, 趙徽鑑·崔華男爲訓鍊判官, 趙惠鎭爲僉知, 金秉喆爲都摠都事, 吳準常爲訓鍊判官, 元永道·權顯中爲訓鍊主簿, 盧重·許濯爲宣傳官, 卞永植·元植爲武兼, 具載默·柳基常·尹禹鉉·李永緖爲宣傳官, 洪羲書·申光碩·金榮秀·趙KC02058爲武兼, 朴玎晦·金致和爲部將, 鄭達行爲守門將。 權管秩, 自作仇非洪楫, 雙靑趙潤祥, 乫軒洞石明玉, 於汀灘金鼐衡, 廣坪金理元, 小吉號里許濂, 副司果單金基常。
마. 이병한 처 남원김씨(李炳漢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18대
이병한 처 남원김씨(李炳漢 妻 南原金氏) | |||
이병한(李炳漢),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18대 | ||
이병한(李炳漢) 처부(妻父) | 김일수(金日叟) | ||
조부 이신옥(李信玉) | 博川德安面石朴山丙坐 | ||
부 이서명(李瑞明) | 石朴山丙坐 | 1843년(헌종 9년) 계묘생(癸卯生) | |
본인 이병한(李炳漢) | 1859년(철종 10년) 기미생(己未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己未三月九日生娶南原金日叟女庚申九月二十四日生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德安面) 石朴山 丙坐 |
바. 이태용 처 남원김씨(李泰鏞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22대
이태용 처 남원김씨(李泰鏞 妻 南原金氏) | |||
이태용(李泰鏞),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22대 | ||
이태용(李泰鏞) 처부(妻父) | 김□□ | ||
조부 이우점(李遇漸) | |||
부 이욱송(李旭松) | 十三枝 武科 | ||
본인 이태용(李泰鏞) | 武科 僉知 | 1838년(헌종 4년) 무술생(戊戌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戊戌生武科僉知娶南原金□□女丙寅生 | ||
선영(先塋) | 평안남도 안주군 태조봉(太祖峯) 午坐 |
사. 이규은 처 남원김씨(李奎殷 妻 南原金氏) 태종 / 양녕대군파 / 고정부정파 15대
이규은 처 남원김씨(李奎殷 妻 南原金氏) | |||
이규은(李奎殷), 전주이씨(全州李氏) | 태종 / 양녕대군파 / 고정부정파 15대 | ||
이규은(李奎殷) 처부(妻父) | 김항려(金恒呂) | ||
조부 이응모(李膺謨) | 信川周王洞中峴丙坐 | ||
부 이정용(李貞容) | 突伊山冷井上亥坐 | 음도사(蔭都事), 종6품 | |
본인 이규은(李奎殷) | 1846년(헌종 12년) 병오생(丙午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憲宗丙午七月十三日生娶南原金恒呂女憲宗乙巳四月九日生 | ||
선영(先塋) |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주왕동(周王洞) 中峴丙坐 |
참고로, 의금부(義禁府)는 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조옥(詔獄)·금부(禁府)·왕부(王府)·금오(金吾)라 부르기도 하였다. 포도(捕盜)·순작(巡綽)·금란(禁亂)의 임무를 관장하였다.
의금부의 구성을 보면, 1466년(세조 12) 판사 중심의 경국대전(經國大典)체제로 개편되었다. 당상관은 4인으로 판사(判事, 종1품)·지사(정2품)·동지사(同知事, 종2품)를 두었으나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당하관은 10인으로 경력(經歷, 종4품)과 도사(종5품)를 두었다. 『속대전』에서는 경력은 없어지고 종6품 도사 5인과 종9품 도사 5인을 두었다. 하부구조로 영사는 서원이 되어 4인을 두었다. 『속대전』에서는 18인으로 늘어나 사무정리를 담당하였다. 나장은 250인이었는데, 『속대전』에서는 40인으로 줄었다. 『육전조례 六典條例』에 와서는 80인으로 늘어나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아. 이정헌 처 남원김씨(李廷憲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23대
이정헌 처 남원김씨(李廷憲 妻 南原金氏) | |||
이정헌(李廷憲),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23대 | ||
이정헌(李廷憲) 처부(妻父) | 김□□ | ||
조부 이석송(李碩松) | |||
부 이제익(李齊益) | 安州燁德洞申坐 | 1824년(순조 24년) 갑신생(甲申生) | |
본인 이정헌(李廷憲) | 1854년(철종 5년) 갑인생(甲寅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甲寅生娶南原金□□女庚戌生 | ||
선영(先塋) | 평안남도 안주군 燁德洞 申坐 |
자. 이의준 처 남원김씨(李義俊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20대
이의준 처 남원김씨(李義俊 妻 南原金氏) | ||
이의준(李義俊),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20대 | |
이의준(李義俊) 처부(妻父) | 김성열(金成烈) | |
조부 이계홍(李桂弘) | 陰幕洞巳坐 | |
부 이정례(李正禮) | 1859년(철종 10년) 기미생(己未生) | |
본인 이의준(李義俊) | 1877년(고종 14년) 정축생(丁丑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丁丑十二月二十七日生娶南原金成烈女壬申六月十日生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초산군 송면(松面) 甕匠洞 申坐 |
① 자강도 초산군 행정구역
이 지역은 본래 고구려 땅이었는데 한때는 두목리(豆木里)라고 하였다. 1402년에는 이주(理州)라 하였고 1413년에는 이산군(理山郡)이라고 하였다. 1724년 고을을 한 급 높여 이산부라 하였고 그 후 1777년에 초산부라 하다가 1895년에 초산군으로 되었다. ‘초산’이란 이름은 궁벽한 산골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초산군 지역은 인접해 있는 주변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들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이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시기에는 고구려의 판도로 되어 있었으며 고구려가 패망한 후에는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해 있었다. 발해가 망한 뒤부터 고려 후반기까지 외세의 지배 하에 있었다가, 고려 공민왕 시대에 이르러 고려의 영토로 수복되어 두목리에 만호(萬戶)를 설치하였다. 조선왕조가 건립된 이후 1402년(태종 2년)에 이주(理州)라 하였으며 1413년에 이산군(理山郡)으로 개편하였다. 1443년에 이르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위원군(渭原郡)을 설치하였다.
1724년(경종 4년)에 초산으로 개칭하고 후에 초산부로 되어 부동변면(府東邊面), 부서변면(府西邊面), 동면(東面), 건면(乾面), 고리산면(古理山面), 판막면(板幕面), 우장면(牛場面), 별하면(別下面), 아이진면(阿耳鎭面), 차령진면(車嶺鎭面), 우현진면(牛峴鎭面), 동건면(童巾面) 등 12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5년에 강계부 초산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에 평안북도 초산군으로 되면서 군면(郡面), 동면, 유면(楡面), 서상면(西上面), 서하면(西下面), 남면(南面), 충상면(忠上面), 충하면(忠下面), 고성면(古城面), 백면(柏面), 고중면(古中面), 풍면(豊面), 판상면(板上面), 송상면(松上面), 송하면(松下面), 약산면(藥山面), 판하면(板下面), 부숭면(富崇面), 별상면(別上面), 별하면(別下面), 강면(江面), 도원면(桃源面) 등 22개 면을 개편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유면은 동면에, 충상면·충하면은 남면에, 판상면 일부는 풍면에, 별상면·별하면은 강면에 각각 편입되고 서상면과 서하면 일부를 병합하여 서면(西面)을, 판상면 나머지 일부와 판하면·부숭면을 병합하여 판면(板面)을, 고성면과 서하면 나머지 일부를 병합하여 성면(城面)을, 백면·고중면을 병합하여 고면(古面)을, 송상면·송하면·약산면을 병합하여 송면(松面)을 각각 신설하여 1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8년에 군면이 초산면(楚山面)으로 개칭되었다. 1939년에 서면과 성면을 병합하여 성서면(城西面)으로 개편하였고, 1940년에 성서면 일부가 초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광복 직후에 성서면이 초산면, 벽동군 오북면, 우시면에 분리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1949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자강도 초산군으로 개편되었다.
차. 이명수 처 남원김씨(李明秀 妻 南原金氏) 태종 / 양녕대군파 / 함양군파 13대
이명수 처 남원김씨(李明秀 妻 南原金氏) | ||
이명수(李明秀), 전주이씨(全州李氏) | 태종 / 양녕대군파 / 함양군파 13대 | |
이명수(李明秀) 처부(妻父) | 김광필(金光弼), 訓鍊判官, 종5품 | |
조부 이형엽(李亨燁) | 三馬洞子坐 | |
부 이태환(李泰煥) | 1855년(철종 6년) 을묘생(乙卯生) | |
본인 이명수(李明秀) | 1876년(고종 13년) 병자생(丙子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當宁丙子九月三日生娶南原金光弼女己卯生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汀浦洞 僧臥隅壬坐 |
① 승정원일기 2704책 (탈초본 128책) 고종 3년 7월 15일 신미 24/24 기사
1866년 同治(淸/穆宗) 5년
○ 兵批, 判書李圭徹, 參判姜㳣, 參議趙埰, 參知金昌秀進 以李裕膺爲副摠管, 韓元植爲同知, 李舜器爲宣傳官, 鄭完默爲內禁將, 金弼求爲公事官, 白樂三爲宣傳官, 柳冀大爲尙州營將, 具駿鉉爲晉州營將, 李鍾龍爲西原營將, 金東稷爲三陟營將, 李尙權爲黃海中軍, 申祖顯爲五衛將, 孫海遠爲慶州營將, 吳鶴善爲羅州營將, 安錫麒爲慶尙中軍, 南宮鈺爲神光僉使, 權永秀爲副摠管, 李邦鉉爲訓鍊都正, 徐光復爲訓鍊正, 李奎參爲都摠經歷, 李種完爲公忠兵虞候, 李本修·金翊相·金益和爲五衛將, 李賢運爲忠壯將, 李魯洙爲訓鍊判官, 金景道·高鎭衡爲五衛將, 車敬栻爲景福將, 邊成龍·車道亨爲慶熙將, 田重民爲平薪僉使, 金錫恒爲蝟島僉使, 車元模爲古今島僉使, 金晉炯爲棃津萬戶, 鄭弼寬爲黑山島別將, 金亨達爲所斤僉使, 田基靑爲西林僉使, 金宗範爲乶下僉使, 金學素爲柔遠僉使, 李星敎爲多慶浦萬戶, 李允亨爲臨淄僉使, 金得弼爲老江僉使, 李宗培爲包伊萬戶, 玉乃錫爲位羅萬戶, 鄭在璣爲金城別將, 朴震楗爲潼關僉使, 公尙文爲伐登僉使, 崔膺烈爲在德萬戶, 李弘允爲撫夷萬戶, 韓範一爲鳥嶺別將, 金義敍爲慶尙中軍, 李鍾元爲全羅兵虞候, 金尙祿爲柔院僉使, 康孝良爲靑水萬戶, 朴昌愼爲森森坡萬戶, 金萬祥爲景福將, 金敎明·洪永疇爲慶熙將, 金薰性爲訓鍊僉正, 李鼎九爲主簿, 李圭浩爲兼司僕將, 鄭周默爲訓鍊判官, 洪萬燮·金錫輔爲文兼, 李經權爲守門將, 金學默·張鳳喆爲五衛將, 洪鍾倫爲忠壯將, 金禹圭爲訓鍊主簿, 金敬禧爲所安島別將, 宋禧來·劉致祐爲五衛將, 金泰麟爲訓鍊副正, 李奎遠爲守門將, 金正煥爲景福將, 尹啓煥·朴宗賢爲慶熙將, 任憲禹爲議政府公事官, 張泳汲·趙希永爲五衛將, 李根豐爲宣傳官, 邊晉奎爲武兼, 李建鎰爲御營從事官, 李敎春·王殷疇爲五衛將, 李奎參·李秉淑爲禁衛把摠, 任元模爲右捕從, 殷德珉爲景福將, 權起燮·金胤興爲慶熙將, 尹宜鉉爲中樞經歷, 李根周爲都摠經歷, 張繼燮爲五衛將, 李謇熙爲都摠都事, 尹錫莘爲訓鍊判官, 李經權爲主簿, 沈魯錫爲武兼, 高宅寬爲景福將, 梁鶴聲·趙顯禹爲慶熙將, 林基春爲訓鍊主簿, 趙瑋顯爲議政府公事官, 李儒行爲五衛將, 朴齊恒爲訓鍊僉正, 金文彦·鄭東明爲守門將, 李基養爲景福將, 趙東鉉·洪文羲爲慶熙將, 具寅熙爲都摠都事, 金善弘爲訓鍊主簿, 李冀周·元度常·李世鎬·權敎應·李赫周·柳箕東·李奎鳳·李秉奎爲宣傳官, 具然湜·李圭秀·金漢杓爲武兼, 朴命漢爲部將, 景元明爲部將, 加設李完根, 金炳烋爲守門將, 朴興植爲守門將, 加設平南權管單李章權, 馬馬海權管單趙羲斗, 舊KC00032坡知權管單李寅KC01687, 吾村權管單□□□, 楸仇非權管單胡允臣, 大吉號里權管單咸應周, 於汀灘權管單許怔, 聖頭里權管單鄭芝溶·梁永萬, 洞權管單康永運, 以上竝單付, 訓鍊判官陳景祥·金光弼·李一遠, 以上加設, 依定式減下, 潘羲淵爲訓鍊判官加設, 林守喆·元世哲·趙載明爲訓鍊主簿加設, 訓鍊主簿單安正民, 五衛將高啓正加設, 依定式減下, 尙州營將柳冀大, 晉州營將具駿鉉, 三陟營將金東稷, 西原營將李鍾龍, 黃海中軍李尙權, 以上竝加折衝加資事, 承傳。同知十四單安重鎭·車敬栻·邊成龍·車道亨·金萬祥·金敎明·洪永疇·金正煥·劉致浩·朴宗賢·權基燮·金胤興·尹啓煥·殷德珉。僉知十單, 金益和·李賢運·申祖顯·李本修·金翊相·金景道·高鎭衡·金學默·張鳳喆·宋熙來。副司果趙羲仁·金德潤·韓圭稷·趙載觀·李冕鎬·柳丞魯·尹致稷·孫珪憲·吳正善·李漢龜·金商鎭·白益洙·黃宗秀·朴昌運·李明鉉·徐學錫·池禹洪·金龜喜·張禹喆·閔致駿。傳曰, 守令·邊將·初仕人, 皆令明日待令。上入小次。少頃, 通禮跪, 啓請乘輿。上乘輿, 出靑陽門, 由協陽門, 入宣化門還內。諸臣以次退出。
◎ 고종 3년 병인(1866) 7월 15일(신미) 맑음 03-07-15[23]
춘당대에서 칠석제 시취를 하고 도목 정사를 행할 때 행 도승지 조석원 등이 입 시하였다
○ 진시(辰時).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 시취를 하고 그대로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행 도승지 조석원(曺錫元), 좌승지 정현덕(鄭顯德), 우승지 박도빈(朴道彬), 좌부승지 이원규(李源珪), 우부승지 이연응(李沇應), 동부승지 정운귀(鄭雲龜), 가주서 - 원문 빠짐 -, 별겸춘추 남일우(南一愚)ㆍ홍원식(洪遠植)ㆍ조정섭(趙定爕), 검열 홍만식(洪萬植), 검교직제학 이재원(李載元), 검교직각 이순익(李淳翼)ㆍ민승호(閔升鎬)ㆍ이승순(李承純), 검교대교 정범조(鄭範朝)ㆍ조영하(趙寧夏)ㆍ이재면(李載冕)ㆍ조경호(趙慶鎬), 부제학 서대순(徐戴淳), 검교전한 민승호(閔升鎬), 이조 판서 이재원(李載元), 참판 김보현(金輔鉉), 참의 이순익(李淳翼), 병조 판서 이규철(李圭徹), 참판 강노(姜㳣), 참의 조채(趙埰), 참지 김창수(金昌秀)가 차례로 시립하였다.
때가 되자, 통례가 꿇어앉아 의장과 호종을 제자리에 정돈시키기를 계청하였다. 상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을 나서니, 약방 제조 김세균(金世均), 부제조 조석원(曺錫元)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아침 일찍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그리고는 춘당대 강여소(降輿所)로 나아가니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어좌에 올랐다. 승지가 표신을 내어 둘러친 포장을 열기를 계청하니, 상이 이미 내려준 표신으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승지가 입문 단자(入門單子)를 읽기를 마치고 나서 아뢰기를,
“따라 올라온 사람 중에도 시관으로 낙점된 사람이 있는데, 내려가서 함께 행례(行禮)하게 할까요?”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독권관 홍순목(洪淳穆)ㆍ김세균(金世均)ㆍ김보현(金輔鉉), 대독관 이재면(李載冕)ㆍ조영하(趙寧夏)ㆍ이순익(李淳翼)ㆍ엄세영(嚴世永) 등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차례로 자리로 나아갔다. 상이 명하여 부(賦)의 제목을 쓰게 하였는데,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 하여 목소리와 얼굴 빛을 바꾸지 않으니, 천하를 태산같이 안정된 곳에 둔다.[垂紳正笏 不動聲色 措天下於泰山之安]’라는 내용이었고, 마감 시간은 신시라고 썼다. 홍순목 등이 꿇어앉아 쓰고는 읽기를 마치자, 엄세영 등이 받들고 나가서 글제를 내걸었다.
상이 이르기를,
“전 황해 감사는 앞으로 나오라.”
하니, 홍순목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신이 해서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금천(金川) 조포(助浦)의 일과 관련하여 바로잡아 고친 것이 있었습니다. 이 포구는 해서(海西)의 상선이 왕래하는 한 도회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사로이 세금을 나누어 매기는 제반 명색(名色)이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없지 않았던바, 상업이 이로 인하여 침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본 고을 민고(民庫)에 붙여서 관에서 세를 거두어 공적인 경비에 보태게 하였습니다. 근래 듣건대 모리배가 다시 넘보고 있다 하니, 이것을 만약 엄히 금단하지 않으면, 금천은 일로의 으뜸가는 역참 고을이므로 허다한 책응(責應)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관문을 보내 신칙하여 길이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擧條)를 냄 - 홍순목이 또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또 우러러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포구의 폐단만 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도내 백성들의 들과 어장은 섬과 육지의 생민이 의뢰하여 살아나가는 밑천인데, 경향(京鄕)의 무뢰배가 여러 경로를 통해 청촉을 꾀하거나 함부로 가탁하여 차지하고 빼앗아 마침내 실업(失業)에 이르게 되니, 원통하고 억울한 정상은 진실로 빈궁한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체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하는 방도에 대해 신이 이미 절엄한 자교(慈敎)를 받들었는데, 3년 간 안찰하면서 조금의 보탬도 드리지 못했으니, 삼가 황송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거듭 밝혀서 금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일체 관문으로 신칙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시관은 임시로 물러가라.”
하였다. 승지가 사알을 통해 여쭙기를,
“먼저 제출한 시권이 이미 들어왔으니, 표신을 내어 포성을 연 다음 시권을 바친 유생들을 차례차례 내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사알을 통해 거두어진 시권 단자를 아뢰고, 이어 고시(考試)를 계품하니, 상이 고시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번에 몇 사람을 뽑을지를 계품하니, 상이 20명을 뽑으라고 명하였다. 또 과차(科次)를 계품하니, 상이 과차하여 들이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칠석제(七夕製)의 부(賦)에서 수석한 초삼하(草三下) 유학 박관양(朴寬陽)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고 그 다음 초삼하인 유학 정인건(鄭寅健) 등 2명에게는 2분을 주고, 그 다음 초삼하인 유학 조인승(曺寅承) 등 2명에게는 1분을 주고, 그 다음 차상(次上)인 장철수(張喆秀) 등 15명에게는 각각 《규장전운(奎章全韻)》 1건(件)을 사급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입격한 유생들을 내일 연영문(延英門)에서 시상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주서(注書)와 상서원(尙瑞院) 관원을 전례에 따라 승륙(陞六)하라.”
하였다. 주서 윤영신(尹榮信)을 일체 승륙하라고 탑전 하교(榻前下敎)하였다.
전교하기를,
“정사를 열라.”
하였다.
이비에, 판서 이재원(李載元), 참판 김보현(金輔鉉), 참의 이순익(李淳翼)은 나왔다. 김병연(金秉淵)을 양지 현감(陽智縣監)으로, 박제문(朴齊文)을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이병석(李秉奭)을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윤속(尹涑)을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신석희(申錫禧)를 대사헌으로, 이인설(李寅卨)을 대사간으로, 홍재신(洪在臣)을 집의로, 이규린(李奎麟)을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박정현(朴定鉉)을 사간으로, 남이복(南履宓)을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유치윤(柳値潤)을 금산 군수(金山郡守)로, 민응선(閔應善)을 교하 군수(交河郡守)로, 정숙(鄭塾)을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권한성(權翰成)을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조안섭(趙安爕)을 응교로, 홍원식(洪遠植)을 부응교로, 조석만(曺錫萬)을 헌납으로, 심의붕(沈宜朋)을 운산 군수(雲山郡守)로 신응조(申應朝)ㆍ신명순(申命淳)을 지의금부사로, 이종상(李鍾祥)을 강원도 도사로, 김봉(金鳳)을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이재현(李在顯)을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이규학(李奎鶴)을 개천 군수(价天郡守)로, 양주성(梁柱星)을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이풍익(李豐翼)을 동지 정사로, 이세기(李世器)를 부사로, 엄세영(嚴世永)을 서장관으로, 이한규(李漢奎)를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김성익(金性翼)을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이흥철(李興喆)을 거산 찰방(居山察訪)으로, 홍종만(洪鍾晩)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유석(柳奭)을 무산 부사(茂山府使)로, 최석규(崔奭奎)ㆍ홍희린(洪羲麟)을 장령으로, 서학문(徐鶴聞)ㆍ한준희(韓俊熙)를 지평으로, 정기회(鄭基會)를 대사성으로, 이원린(李源麟)을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최우기(崔遇基)를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안익풍(安翊豐)을 금교 찰방(金校察訪)으로, 이승수(李承洙)를 주서로, 이용만(李容萬)을 정언으로, 이익(李)을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홍종헌(洪鍾軒)을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여규익(呂圭益)을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서원순(徐元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망통(望筒)을 지체한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추고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해당 주서 방효린(方孝麟)을 추고하라.”
하였다.
이우회(李友會)를 정언으로, 홍순목(洪淳穆)을 판윤으로, 김보현(金輔鉉)을 동지춘추관사로, 김원식(金元植)을 좌윤으로, 정택선(鄭宅善)을 우윤으로, 유정환(兪貞煥)을 부교리로, 홍유명(洪裕命)을 동지경연사로, 이용우(李龍雨)를 주서로, 권경선(權敬善)을 장릉 참봉(長陵參奉)으로, 김학년(金學年)을 현릉 참봉(顯陵參奉)으로, 유치화(兪致和)를 영릉 참봉(永陵參奉)으로, 민종덕(閔種德)을 정릉 참봉(靖陵參奉)으로, 정준화(鄭駿和)를 의릉 참봉(懿陵參奉)으로, 홍찬주(洪瓚周)를 희릉 참봉(禧陵參奉)으로, 이이두(李以斗)를 장릉 참봉(蔣陵參奉)으로, 이만원(李萬遠)을 수릉 참봉(綏陵參奉)으로, 권응우(權應禹)를 경릉 참봉(景陵參奉)으로, 홍병균(洪秉均)을 예빈시 참봉으로, 황이주(黃履柱)ㆍ박성발(朴聖發)ㆍ김상효(金尙斅)를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으로, 황희룡(黃羲龍)을 가인의(假引儀)로 삼았다.
병비에, 판서 이규철(李圭徹), 참판 강노(姜㳣), 참의 조채(趙埰), 참지 김창수(金昌秀)는 나왔다.
이유응(李裕膺)을 부총관으로, 한원식(韓元植)을 동지로, 이순기(李舜器)를 선전관으로, 정완묵(鄭完默)을 내금위장으로, 김필구(金弼求)를 공사관(公事官)으로, 백낙삼(白樂三)을 선전관으로, 유기대(柳冀大)를 상주 영장(尙州營將)으로, 구준현(具駿鉉)을 진주 영장(晉州營將)으로, 이종룡(李鍾龍)을 서원 영장(西原營將)으로, 김동직(金東稷)을 삼척 영장(三陟營將)으로, 이상권(李尙權)을 황해도 중군으로, 신조현(申祖顯)을 오위장으로, 손해원(孫海遠)을 경주 영장(慶州營將)으로, 오학선(吳鶴善)을 나주 영장(羅州營將)으로, 안석기(安錫麒)를 경상도 중군으로, 남궁옥(南宮鈺)을 신광 첨사(神光僉使)로, 권영수(權永秀)를 부총관으로, 이방현(李邦鉉)을 훈련원 도정으로, 서광복(徐光復)을 훈련원 정으로, 이규삼(李奎參)을 도총부 경력으로, 이종완(李種完)을 공충도 병마우후로, 이본수(李本修)ㆍ김익상(金翊相)ㆍ김익화(金益和)를 오위장으로, 이현운(李賢運)을 충장위장으로, 이노수(李魯洙)를 훈련원 판관으로, 김경도(金景道)ㆍ고진형(高鎭衡)을 오위장으로, 차경식(車敬栻)을 경복궁 위장으로, 변성룡(邊成龍)ㆍ차도형(車道亨)을 경희궁 위장으로, 전중민(田重民)을 평신 첨사(平薪僉使)로, 김석항(金錫恒)을 위도 첨사(蝟島僉使)로, 차원모(車元模)를 고금도 첨사(古今島僉使)로, 김진형(金晉炯)을 이진 만호(梨津萬戶)로, 정필관(鄭弼寬)을 흑산도 별장(黑山島別將)으로, 김형달(金亨達)을 소근 첨사(所斤僉使)로, 전기청(田基靑)을 서림 첨사(西林僉使)로, 김종범(金宗範)을 볼하 첨사(乶下僉使)로, 김학소(金學素)를 유원 첨사(柔遠僉使)로, 이성교(李星敎)를 다경포 만호(多慶浦萬戶)로, 이윤형(李允亨)을 임치 첨사(臨淄僉使)로, 김득필(金得弼)을 노강 첨사(老江僉使)로, 이종배(李宗培)를 포이 만호(包伊萬戶)로, 옥내석(玉乃錫)을 위라 만호(位羅萬戶)로, 정재기(鄭在璣)를 금성 별장(金城別將)으로, 박진건(朴震楗)을 동관 첨사(潼關僉使)로, 공상문(公尙文)을 벌등 첨사(伐登僉使)로, 최응렬(崔膺烈)을 재덕 만호(在德萬戶)로, 이홍윤(李弘允)을 무이 만호(撫夷萬戶)로, 한범일(韓範一)을 조령 별장(鳥嶺別將)으로, 김의서(金義叙)를 경상도 중군으로, 이종원(李鍾元)을 전라도 병마우후로, 김상록(金尙祿)을 유원 첨사(柔院僉使)로, 강효량(康孝良)을 청수 만호(靑水萬戶)로, 박창신(朴昌愼)을 삼삼파 만호(森森坡萬戶)로, 김만상(金萬祥)을 경복궁 위장으로, 김교명(金敎明)ㆍ홍영주(洪永疇)를 경희궁 위장으로, 김훈성(金薰性)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정구(李鼎九)를 주부로, 이규호(李圭浩)를 겸사복장으로, 정주묵(鄭周默)을 훈련원 판관으로, 홍만섭(洪萬爕)ㆍ김석보(金錫輔)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이경권(李經權)을 수문장으로, 김학묵(金學默)ㆍ장봉철(張鳳喆)을 오위장으로, 홍종륜(洪鍾倫)을 충장위장으로, 김우규(金禹圭)를 훈련원 주부로, 김경희(金敬禧)를 소안도 별장(所安島別將)으로, 송희래(宋禧來)ㆍ유치우(劉致祐)를 오위장으로, 김태린(金泰麟)을 훈련원 부정으로, 이규원(李奎遠)을 수문장으로, 김정환(金正煥)을 경복궁 위장으로, 윤계환(尹啓煥)ㆍ박종현(朴宗賢)을 경희궁 위장으로, 임헌우(任憲禹)를 의정부 공사관으로, 장영급(張泳汲)ㆍ조희영(趙希永)을 오위장으로, 이근풍(李根豐)을 선전관으로, 변진규(邊晉奎)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건일(李建鎰)을 어영청 종사관으로, 이교춘(李敎春)ㆍ왕은주(王殷疇)를 오위장으로, 이규삼(李奎參)ㆍ이병숙(李秉淑)을 금위영 파총으로, 임원모(任元模)를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은덕민(殷德珉)을 경복궁 위장으로, 권기섭(權起爕)ㆍ김윤흥(金胤興)을 경희궁 위장으로, 윤의현(尹宜鉉)을 중추부 경력으로, 이근주(李根周)를 도총부 경력으로, 장계섭(張繼燮)을 오위장으로, 이건희(李謇熙)를 도총부 도사로, 윤석신(尹錫莘)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경권(李經權)을 주부로, 심노석(沈魯錫)을 무신겸선전관으로, 고택관(高宅寬)을 경복궁 위장으로, 양학성(梁鶴聲)ㆍ조현우(趙顯禹)를 경희궁 위장으로, 임기춘(林基春)을 훈련원 주부로, 조위현(趙瑋顯)을 의정부 공사관으로, 이유행(李儒行)을 오위장으로, 박제항(朴齊恒)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문언(金文彥)ㆍ정동명(鄭東明)을 수문장으로, 이기양(李基養)을 경복궁 위장으로, 조동현(趙東鉉)ㆍ홍문희(洪文羲)를 경희궁 위장으로, 구인희(具寅熙)를 도총부 도사로, 김선홍(金善弘)을 훈련원 주부로, 이기주(李冀周)ㆍ원도상(元度常)ㆍ이세호(李世鎬)ㆍ권교응(權敎應)ㆍ이혁주(李赫周)ㆍ유기동(柳箕東)ㆍ이규봉(李奎鳳)ㆍ이병규(李秉奎)를 선전관으로, 구연식(具然湜)ㆍ이규수(李圭秀)ㆍ김한표(金漢杓)를 무신겸선전관으로, 박명한(朴命漢)을 부장으로, 경원명(景元明)을 부장 가설로, 이완근(李完根)ㆍ김병휴(金炳烋)를 수문장으로, 박흥식(朴興植)을 수문장 가설로 삼았다. 평남 권관(平南權管)에 이장권(李章權)을 단부하고, 마마해 권관(馬馬海權管)에 조희두(趙羲斗), 구갈파지 권관(舊坡知權管)에 이인희(李寅), 오촌 권관(吾村權管)에 - 원문 빠짐 -, 추구비 권관(楸仇非權管)에 호윤신(胡允臣), 대길호리 권관(大吉號里權管)에 함응주(咸應周), 어정탄 권관(於汀灘權管)에 허정(許怔), 성두리 권관(聖頭里權管)에 정지용(鄭芝溶), 양영만동 권관(梁永萬洞權管)에 강영운(康永運), 이상을 모두 단부(單付)하였다. 훈련원 판관 진경상(陳景祥)ㆍ김광필(金光弼)ㆍ이일원(李一遠)의 가설은 정식대로 감하였다. 반희연(潘羲淵)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임수철(林守喆)ㆍ원세철(元世哲)ㆍ조재명(趙載明)을 훈련원 주부 가설로 삼았으며, 훈련원 주부에 안정민(安正民)을 단부하였다. 오위장 고계정(高啓正)의 가설은 정식대로 감하였다. 상주 영장(尙州營將)에 유기대(柳冀大), 진주 영장(晉州營將)에 구준현(具駿鉉), 삼척 영장(三陟營將)에 김동직(金東稷), 서원 영장(西原營將)에 이종룡(李鍾龍), 황해도 중군에 이상권(李尙權)을 단부하고,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 열 네 자리에 안중진(安重鎭)ㆍ차경식(車敬栻)ㆍ변성룡(邊成龍)ㆍ차도형(車道亨)ㆍ김만상(金萬祥)ㆍ김교명(金敎明)ㆍ홍영주(洪永疇)ㆍ김정환(金正煥)ㆍ유치호(劉致浩)ㆍ박종현(朴宗賢)ㆍ권기섭(權基爕)ㆍ김윤흥(金胤興)ㆍ윤계환(尹啓煥)ㆍ은덕민(殷德珉)을 단부하고, 첨지의열에 김익화(金益和)ㆍ이현운(李賢運)ㆍ신조현(申祖顯)ㆍ이본수(李本修)ㆍ김익상(金翊相)ㆍ김경도(金景道)ㆍ고진형(高鎭衡)ㆍ김학묵(金學默)ㆍ장봉철(張鳳喆)ㆍ송희래(宋熙來)를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조희인(趙羲仁)ㆍ김덕윤(金德潤)ㆍ한규직(韓圭稷)ㆍ조재관(趙載觀)ㆍ이면호(李冕鎬)ㆍ유승로(柳丞魯)ㆍ윤치직(尹致稷)ㆍ손규헌(孫珪憲)ㆍ오정선(吳正選)ㆍ이한귀(李漢龜)ㆍ김상진(金商鎭)ㆍ백익수(白益洙)ㆍ황종수(黃宗秀)ㆍ박창운(朴昌運)ㆍ이명현(李明鉉)ㆍ서학석(徐學錫)ㆍ지우홍(池禹洪)ㆍ김귀희(金龜喜)ㆍ장우철(張禹喆)ㆍ민치준(閔致駿)을 단부하였다.
전교하기를,
“수령, 변장, 초사인(初仕人)을 모두 내일 대령시키라.”
하였다.
상이 소차에 들어갔다. 잠시 후에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 오르기를 계청하니, 상이 여에 올랐다. 청양문을 나서서 협양문을 경유하여 선화문으로 들어가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카. 진사시 급제자 김이규(金履珪)
성명 | 김이규(金履珪), 자(字) 문경(文卿), 동지(同知), 종2품 |
[진사] | [진사] 고종(高宗) 7년(18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8위(98/140) |
생년 | 계묘(癸卯) 1843년 (헌종 9) |
합격연령 | 28세 |
본관 | 남원(南原) |
거주지 | 황해북도 중화(中和) |
전력 | 유학(幼學) |
부(父) | 성명 : 김학원(金學元), 관직 : 유학(幼學), 부모구존 : 구경하(具慶下) [안항] 형(兄) : 김이훈(金履𤪠), 제(弟) : 김이달(金履鐽), 김이정(金履𤦹), 김이매(金履玫) |
출전 | 『崇禎紀元後四[五]庚午式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
① 승정원일기 2819책 (탈초본 131책) 고종 12년 11월 20일 〈계축〉 24/29 기사
1875년 光緖(淸/德宗) 1년
○ 有政。 吏批, 行判書閔奎鎬, 參判林喜鎭牌招不進, 參議曺殷承進, 承旨缺。 吏批啓曰, 行判書閔奎鎬, 參判林喜鎭, 竝牌招不進, 小臣獨政未安, 何以爲之? 敢稟。 傳曰, 只出緊任。 以朴公鎭爲敦寧都正, 領議政單李最應, 陞拜領相事, 傳敎, 世子師單李最應, 世子傅單金炳國, 訓鍊都監都提調單李最應, 咸鏡監司單閔泳緯。 兵批, 行判書李載元承候進, 參判韓應國入直進, 參議朴海哲病, 參知張時杓病, 承旨缺。 同知單金履珪, 忠淸水使李泰鉉, 姑爲仍任事, 承傳, 兼咸鏡道兵馬水軍節度使單閔泳緯。
◎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을해(1875) 11월 20일, 12-11-20[28]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에, 행 판서 이재원(李載元)은 안부를 묻기 위하여 나왔고, 참판 한응국(韓應國)은 입직인데 나왔고, 참의 박해철(朴海哲)은 신병이 있고, 참지 장시표(張時杓)는 신병이 났고, 승지는 - 원문 빠짐 -
동지에 김이규(金履珪)를 단부하였다.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태현(李泰鉉)을 잉임시켰는데, 우선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겸 함경도병마수군절도사에 민영위를 단부하였다.
참고로, 동지(同知)는 조선시대 돈녕부(敦寧府)‧중추부(中樞府)‧의금부(義禁府)‧경연청(經筵廳)‧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삼군부(三軍府)‧훈련원(訓鍊院) 등에 속한 종이품(從二品) 관직이다. 돈녕부에 1원, 중추부에 8원, 의금부에 1∼2원, 경연청에 3원, 성균관에 2원, 춘추관에 2원, 삼군부에 약간 명을 각각 두었다.
이들의 직함(職銜)을 부를 때는 소속 관청 명을 관직 안에 써 넣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동지삼군부사(同知三軍府事), 동지훈련원사(同知訓鍊院事)라고 하였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는 조선시대 돈녕부(敦寧府)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인 동지사(同知事)로 정원은 1원이다. 동돈녕(同敦寧)이라 불리기도 한다. 위로 영사(領事:正一品), 판사(判事:從一品), 지사(知事: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도정(都正:正三品 堂上), 정(正:正三品 堂下), 부정(副正:從三品), 첨정(僉正:從四品), 판관(判官:從五品), 주부(主簿:從六品), 직장(直長:從七品), 봉사(奉事:從八品), 참봉(參奉:從九品)이 각 1원씩 있다.
타. 이시화 처 남원김씨(李時化 妻 南原金氏) 환조 / 의안대군파 15대
이시화 처 남원김씨(李時化 妻 南原金氏) | |||
이시화(李時化), 전주이씨(全州李氏) | 환조 / 의안대군파 15대 | ||
이시화(李時化) 처부(妻父) | 김광부(金光富), 明月萬戶, 종4품 | ||
조부 이순봉(李順奉) | 墓如草峯乾坐祔 | ||
부 이정엽(李禎燁) | 墓如草峯乾坐祔 | 1846년(헌종 12년) 병오생(丙午生) | |
본인 이시화(李時化) | 墓如草峯乾坐祔 | 1880년(고종 17년) 경진생(庚辰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庚辰三月二十七日生辛巳七月十六日卒 娶南原金光富女○墓上同祔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영변군 용산면(龍山面) 卯坐祔 |
① 승정원일기 2775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 4월 10일 계해 15/24 기사
1872년 同治(淸/穆宗) 11년
○ 以南啓輪爲敦寧都正, 鄭學默爲兵曹參議, 金世均爲判義禁, 閔致庠爲知經筵, 鄭昌東爲奉常正, 金奭根爲戶曹正郞, 李鍾恕爲公事官, 典籍單韓奭東, 文科甲科第一人司䆃主簿加設單李基燮, 武科甲科第一人分兵曹參議李載鵬·李昌漢, 分兵曹正郞李載純·李𨯶永已上減下。 濟州牧使單李宓熙, 東萊府使鄭顯德, 加一瓜仍任事承傳。 求禮縣監方孝涵, 陽德縣監洪淳學, 已上姑爲仍任事承傳。 兵曹參議崔尙儒, 年七十今加嘉善, 前令王錫疇年七十四, 今加通政, 前僉知林有廈年八十四, 今加嘉善。 前分敎官李時茂年七十五, 前參奉陳復元年七十三, 已上今超通政。 前五衛將禹世琮, 年八十四, 今加資憲, 張錫祚年八十六, 朴宗炯年七十, 已上今加嘉義。 李應相年九十二, 宋彦郁年八十六, 李齊寅年七十九, 閔就仁年七十二, 孫光泳年七十, 已上今加嘉善。 已上特爲加資事承傳。 再政。 以徐相敦爲刑曹參議, 李遇根爲健元陵參奉, 兵批, 判書姜㳣病, 參判尹滋承病, 參議未差, 參知李敦夏入直進, 以金貴鉉爲昇天堡萬戶, 金光富爲明月萬戶, 嚴龍煥爲臨津別將, 同知單金命煥, 訓鍊主簿加設三單, 尹昌根·尹光翼·金鴻求, 文殊別將申泰鉉, 限一瓜特爲仍任事承傳, 兼濟州鎭兵馬水軍僉節制使全羅道水軍防禦使單李宓熙, 判府事閔致庠, 回還正使依法典減下, 分副摠管李沇應·李寅卨, 分都事李根周·李圭泰, 以上減下。
참고로, 만호(萬戶)는 주로 연변의 요충지 등에 배치되어 그 지역을 수비하는 군대나 병선(兵船) 따위를 관장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임무를 띠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양계지역에 육군을 통솔하는 전임 지휘관으로서 병마만호를, 연해지역에는 수군을 담당하는 수군만호를 두었다. 조선의 초창기에는 3품 이상을 만호, 4품에서 6품까지를 천호라고 일컬었던 것을 1413년(태종 13)부터 3품직을 만호로, 4품직을 부만호로, 5품직을 천호로, 6품직을 부천호로 개칭하였다. 그 뒤에 몇 차례 변화를 겪으면서 종4품으로 고정되었다. 만호를 거친 자는 비록 수령을 지내지 않았더라도 경관직(京官職)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