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서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서천지역에서는 서천경찰서로 연행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 중 2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보내져 희생되었는데, 나머지 주민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조사되지 않았다. 한편, 이 시기에 서면에서는 주민 일부가 보령의 이어니재에서 희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후퇴시기에는 박규하를 포함한 240여 명의 주민들이 1950년 9월 27일 오전 1시경 좌익에 의해 서천등기소에서 불에 타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살은 당 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정치보위부에서 집행했다고 한다.
가해자로 알려진 서천군 노동당위원장 구씨 등 8명 중 빨치산 활동을 계속했다는 이씨 외 7명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부역혐의자로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서천 등기소사건에 대해 미군자료(G2, KWC)에는 희생자 수가 280명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KWC문서 내 서천경찰서에서 제공한 피살자명부에는 189명 명단이 있다.
한편, 1952년 공보처통계국 발행 명부에는 서천군 224명, 서천등기소 1명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목격된 시신은 100여구였고 희생자 수에 대한 목격담 중 최소의 것은 50여 명이었다. 한편, 창고의 크기로 보아 200여 명이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희생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 측이 떠난 후 서천경찰서가 1950년 10월 2일 공식 복귀했다. 복귀하던 서천경찰서 선발대는 10월 1일 종천면 장구리 수리너머재에서 80여 명의 주민을 학살했으며 이어 한산면 돼지고개에서 40여 명을 학살했다.
수리너머재에서는 10월 1일 성북리 박담갑(마을에서는 박종원으로 부름)이 비인지서로 연행되었다가 서천경찰서로 이송되어 종천면 수리너머재에서 희생되었는데, 이때 인민위원장 윤억상, 심모 등도 함께 희생되었다. 길산면에서는 1948년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서천군 대표 3인(구병정, 송재옥, 장영근) 중 한 명이었던 장영근이 한산면 돼지고개에서 희생되었다.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서천경찰서 외에 각 지서에 의해서도 희생되었는데, 시초면과 장항읍의 주민들 피해사실이 확인되었다. 시초지서는 일부 주민들을 서천경찰서로 이송하지 않고 지서인근에서 학살했다.
당시 근무자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장의 지시로 주민 5~6명을 시초면사무소 뒷산에서 학살당했다. 이와 별도로 서천군당위원장이었던 시초면 구재일이 1950년 11월 6일 천방산 토벌과정에서 사살당했다.
장항읍에서는 조선중앙일보 장항지국 기자였던 성주리 김승배(원래 이름은 이광용으로 마산면 벽오리가 고향임)가 9월 29일 집에서 연행되어 장항역 앞 옥산 정미소에 갇혔다가 희생되었다. 왕개산에서는 집단희생당한 사람들이 팔을 뒤로 하여 철사로 묶인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마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서천지역에서 인민군 점령기 미군의 폭격으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9월 10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판교면 판교장터(판교국민학교 뒤)에 모여 있던 주민 100여 명이 무장정찰 중이던 미 18전폭단의 F-51 전투기 2대의 공격으로 희생되었다.
폭격 당시의 인민군과의 전선은 낙동강에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서천지역에는 전략적 폭격의 대상이 될 만한 대규모 인민군 부대나 보급시설 등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이 폭격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저질러진 서해안 지역 교란작전의 하나 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서천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