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이라면 그나마 고통 없이 죽을 텐데 죽창에 찔려 죽으면 얼마나 아팠을까요? 북한 공산군과 좌익 세력에 의한 기독교회 신자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알고는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근 6·25 전쟁을 전후로 북한 인민군, 좌익 세력 등에 의해 종교인 1700여 명이 학살된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반공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북한이 종교의 자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탓도 있다. 본지는 학살 현장을 찾아 생존자와 유족의 얘기를 들었다. 이들은 “종교를 가졌단 이유만으로 무참히 학살당했던 70여 년 전 과거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더욱 슬픈 건 아무도 이런 학살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출처: 조선일보(2024.05.07.)
아래 기사와 사진을 보면 충남 당진의 성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기독교회이네요. 이 가슴 아픈 역사를 잘 기억하고 성도들은 믿음으로 무장하고 국가는 안보로 무장을 더욱 확실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여수 지역의 손양원 목사님과 아들의 순교는 위 지도에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
손양원孫良源 ...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
손양원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였던 애양원의 애양원교회에서 구호활동과 신앙 활동을 펼쳤고,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장남, 차남이 안재선 등 폭도들에게 순교당하였으나 폭도인 안재선마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아들을 삼았으며 6.25 전쟁 때 모교에서 끝까지 남아 목회를 하다가 1950.9.13 공산군에 투옥되어 9.28일 여수시 미평동에서 순교당하였다.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더 고귀하게 여겼던 손양원목사의 깊은 신앙심과 끝없는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기념관에는 성화 7점, 사진 액자 98점, 옥중편지 등 8점, 기타 유품 5종 1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주변에는 손양원목사 기념비 및 3 부자 묘지, 모교로 목회했던 성산교회가 있어, 매년 전국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 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 죽음 앞에서 찾은 답 "내가 널 용서했잖니…" 고 손양원 목사의 양손자 안경선 목사를 만나다 --
... 한참 후에 알게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안경선(54·사진) 씨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힘든 사실이었다. 안씨의 아버지는 지난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손양원 목사(1902~1950)의 두 아들을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죽인 안재선 씨다. 당시 손양원 목사는 아픔과 슬픔을 '용서'로 덮기로 했다. 도리어 아들을 죽인 그 청년을 평생 양아들로 삼아 품기로 했다. '안재선'은 그렇게 손 목사의 아들 '손재선'이 됐다. ...
알면 좋은 소식을 올려주셔서 유익하네요. 링크 글 잘 보았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으나 양자로 삼기는 쉽지 않은데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들을 죽인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네요. 안재선 씨가 유언으로 아들에게 신학공부 해서 목회자가 되라고 했던 게 감동을 줍니다. 용서 받은 몸이지만 자기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 틈에서, 그 지역에서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몰매도 맞고 했다니...평생에 걸쳐 죄의 짐에 짓눌리곤 했을 것 같아요.ㅠ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이토록 중차대한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공산군이 순교사킨 분 중에 이종덕 목사도 충남 논산에 있어야 하는데요. 이분은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초기 지도자입니다. ----------------------------------------
이 목사는 1937년 일제에 비협조한다는 이유로 4개월간 구속되었고 풀려난 후 만주에서 8년간 순회 목회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강경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이종덕 목사는 1946년 제36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49년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교’에서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고 오히려 목사 신분을 크게 적은 명함을 들고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갑시다.’ 전도하다가 9.28 수복 시에 퇴각하던 공산군에 체포된다.
이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이종덕 목사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사모에게 주며 “하늘에서 만납시다.” 말을 남겼고, 같이 끌려가던 김요한 집사에게 기회를 만들어 도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목사는 결국 옥녀봉 교회에서 잘 보이는 금강변 갈밭으로 끌려가 총살당해, 66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 안에 안겼다.
논산군 강경읍은 기독교한국침례회 기원 및 이종덕 목사의 순교 관련하여 의미 있는 지역입니다. --------------------------------
... 세 번째로 찾을 곳은 한국최초의 침례교회 최초 예배지이다.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폴링선교사가 지병석 집사의 옥려봉 자택에서 이들 부부와 아만다선교사 등 다섯 분이 1896년 2월9일 첫 주일예배를 드린 후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다음해인 1897년 기억 자(ㄱ) 교회를 세웠다.
그 후 일제는 신사를 짓기 위하여 교회대지를 강탈한다. 항의하는 교회지도자 32명을 체포하여 원산 헌병대로 끌고가 고문 끝에 전치규 목사 외 7명이 옥중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순교 후 일제는 교회를 방화하여 소실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예배 지는 그동안 방치해 오다가 2013년 논산시에서는 그 당시의 모습의 ㄱ역자 교회로 잘 단장하여 향토유적 38호로 보존되고 있다.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공산당들이 침례교 4대 담임 이종덕 목사를 강경천 갈대밭에서 총살되어 순교한 아픈 사건도 있다. ...
첫댓글 여수 지역의 손양원 목사님과 아들의 순교는 위 지도에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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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孫良源
...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
Daum 백과
네, 공산당에 의한 순교자 중 유명한 분인데 위 기사와 지도에 빠져 있네요.
@장코뱅 6.25 때 적군에 의해 희생된 분들이라서 제대로 집계를 안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적군과 좌익에 의한 희생도 포함하고 여타의 경우들도 포함하도록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네요.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산돌길 70-62
손양원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였던 애양원의 애양원교회에서 구호활동과 신앙 활동을 펼쳤고,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장남, 차남이 안재선 등 폭도들에게 순교당하였으나 폭도인 안재선마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아들을 삼았으며 6.25 전쟁 때 모교에서 끝까지 남아 목회를 하다가 1950.9.13 공산군에 투옥되어 9.28일 여수시 미평동에서 순교당하였다.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더 고귀하게 여겼던 손양원목사의 깊은 신앙심과 끝없는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기념관에는 성화 7점, 사진 액자 98점, 옥중편지 등 8점, 기타 유품 5종 1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주변에는 손양원목사 기념비 및 3 부자 묘지, 모교로 목회했던 성산교회가 있어, 매년 전국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 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Daum 백과
안재선 ---> 손재선
-- 죽음 앞에서 찾은 답 "내가 널 용서했잖니…" 고 손양원 목사의 양손자 안경선 목사를 만나다 --
... 한참 후에 알게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안경선(54·사진) 씨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힘든 사실이었다. 안씨의 아버지는 지난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손양원 목사(1902~1950)의 두 아들을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죽인 안재선 씨다. 당시 손양원 목사는 아픔과 슬픔을 '용서'로 덮기로 했다. 도리어 아들을 죽인 그 청년을 평생 양아들로 삼아 품기로 했다. '안재선'은 그렇게 손 목사의 아들 '손재선'이 됐다. ...
https://web.archive.org/web/20180726201731/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579165
아카이브에 있는 자료는 오래 된 것이라서 가치가 더 큽니다.
알면 좋은 소식을 올려주셔서 유익하네요. 링크 글 잘 보았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으나 양자로 삼기는 쉽지 않은데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들을 죽인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네요. 안재선 씨가 유언으로 아들에게 신학공부 해서 목회자가 되라고 했던 게 감동을 줍니다.
용서 받은 몸이지만 자기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 틈에서, 그 지역에서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몰매도 맞고 했다니...평생에 걸쳐 죄의 짐에 짓눌리곤 했을 것 같아요.ㅠ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이토록 중차대한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공산군이 순교사킨 분 중에 이종덕 목사도 충남 논산에 있어야 하는데요. 이분은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초기 지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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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는 1937년 일제에 비협조한다는 이유로 4개월간 구속되었고 풀려난 후 만주에서 8년간 순회 목회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강경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이종덕 목사는 1946년 제36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49년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교’에서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고 오히려 목사 신분을 크게 적은 명함을 들고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갑시다.’ 전도하다가 9.28 수복 시에 퇴각하던 공산군에 체포된다.
이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이종덕 목사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사모에게 주며 “하늘에서 만납시다.” 말을 남겼고, 같이 끌려가던 김요한 집사에게 기회를 만들어 도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목사는 결국 옥녀봉 교회에서 잘 보이는 금강변 갈밭으로 끌려가 총살당해, 66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 안에 안겼다.
출처: https://www.newsn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00
논산군 강경읍은 기독교한국침례회 기원 및 이종덕 목사의 순교 관련하여 의미 있는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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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로 찾을 곳은 한국최초의 침례교회 최초 예배지이다.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폴링선교사가 지병석 집사의 옥려봉 자택에서 이들 부부와 아만다선교사 등 다섯 분이 1896년 2월9일 첫 주일예배를 드린 후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다음해인 1897년 기억 자(ㄱ) 교회를 세웠다.
그 후 일제는 신사를 짓기 위하여 교회대지를 강탈한다. 항의하는 교회지도자 32명을 체포하여 원산 헌병대로 끌고가 고문 끝에 전치규 목사 외 7명이 옥중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순교 후 일제는 교회를 방화하여 소실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예배 지는 그동안 방치해 오다가 2013년 논산시에서는 그 당시의 모습의 ㄱ역자 교회로 잘 단장하여 향토유적 38호로 보존되고 있다.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공산당들이 침례교 4대 담임 이종덕 목사를 강경천 갈대밭에서 총살되어 순교한 아픈 사건도 있다. ...
출처: 강경 지역 문화 기행 https://jangtaibong.tistory.com
좋은 내용입니다. 순교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내가 순교하고 싶다고 다 순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순교는 귀한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의 희생을 순교로 이해했기 때문에 유족들과 기독교인들이 별도로 배상 청구를 하지 않고 기억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배상까지는 안 되더라도 기억과 기념을 잘 하면 좋겠습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