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에 관한 시
차례
시론 / 이정록
시론詩論 / 조동화
시론(詩論) / 조용숙
시론 / 이시영
반듯하다 / 박철
시를 위하여 · 4 / 윤효
시를 위하여 · 5 / 윤효
종이상자 시론(詩論) / 함민복
시詩, 처음부터 있는 / 정일근
시답잖은 시론 / 박제영
시론 / 이정록
천편일률(千篇一律)이라고
머리맡에 써놓았다.
천권을 읽어야
시 한편 온다.
편지봉투에 풀칠하듯
한줄 더 봉한다.
천편을 써야
겨우 가락 하나 얻는다.
이율배반(二律背反),
이천편을 쓰면
등 뒤에 눈을 단다.
- 이정록,『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시론詩論 / 조동화
가령 화폭에다 산 하나를 담는다 할 때
그 뉘도 모든 것을 다 옮길 순 없다
이것은 턱없이 작고 저는 너무 크므로
그러나 그렇더라도 요량 있는 화가라면
필경은 어렵잖이 한 법을 떠올리리
고삐에 우람한 황소 이끌리는 그런 이치!
하여 몇 개의 선線, 얼마간의 여백으로도
살아 숨 쉬는 산 홀연히 옮겨오고
물소리, 솔바람소리는 덤으로 얹혀서 온다
- 조동화,『낙동강』(초록숲, 2021)
시론(詩論) / 조용숙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은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물들에게
입을 달아준다
한낮에 안방 마당까지 몰래 기어든
햇살의 자백을 받아내고
이른 봄 늦잠 자는 목련 가지의 궁둥이를 두들겨
빨리 꽃 피우게 한
바람의 고백을 받아낸다
어쩌다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사물들은
주파수를 맞춰놓은 라디오처럼
사람의 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는 사물의 언어를 해석해주는
통역관인 셈인데
사물들에게 단순히 말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갈고 닦은
온갖 사유와 경험까지도 아낌없이 덜어준다
그가 지금껏
자기 이야기를 직접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사물들이 모두 그의 시편 속에 들어앉아
감춰둔 그의 속내를
대신 타전하는 중이란다
- 조용숙,『어디서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까』(북인, 2020)
시론 / 이시영
개나리가 막 피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아마 4월 초였을 것이다. 선생은 늘 교문 앞에 들어서면 언덕을 향해 고개를 길게 빼고 우리를 찾으셨다. 송과 내가 부리나케 달려내려가 가방을 받아들고 지팡이를 들어드렸다. “선생님, 날씨도 좋고 하니 오늘도 야외수업을……” “아 자네들도 그러한가? 하긴 이 좋은 날에 수업은 무슨 수업! 꽃구경이나 허면서 지내볼까.”
‘미라보 다리’를 지나 자리를 잡은 곳은 학교 앞 선술집. 선생은 커다란 생맥주잔에 소주를 콸콸 붓고 그 위에 활명수를 섞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메기입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내 젊었을 적 친구 중에 말이야, 장환이와 용악이가 있었어. 장환이는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잘나가는 댄디였고, 용악이는 밤에 잠잘 곳도 없는, 단도를 품고 다니는 함경도 출신의 꾀죄죄한 가난뱅이였거든. 그런데 억지로 꾸미지 않고 가슴에서 우러나온 그 질박한 서정시가 좋았어.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여즉 살아 있다면 나를 간절히 보고 싶어할 텐데 말이야. ‘북에는 용악, 남에는 정주’라고들 했으니……”
선생의 눈가는 어느새 가랑가랑한 무엇인가로 촉촉이 젖어드는 것이었다.
* 이용악「북쪽」.
- 이시영,『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반듯하다 / 박철
- 후배 K에게
나도 이제 한마디 거들 나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한마디 하마
시를 쓰려거든 반듯하게 쓰자
곧거나 참되게 쓰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기 앞에 설 때
우뚝하니, 반듯하게 서 있는 것이 멋쩍어서
일부러, 어거지로, 더욱 어색하게
셔터가 울리길 기다리며 몸을 움직인다
말 그대로 모션을 취하는 것이다
차라리 반듯하게 서자
촌스럽게, 어색하게, 부끄럽게
뻣뻣하게 서서 수줍으면 좀 어떠랴
이런 말 저런 이름 끌어다 얼기설기 엮어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아닌 모션 취하지 말고
그냥 반듯하고 쉽게 쓰자
- 박철,『험준한 사랑』(창비, 2005)
시를 위하여 · 4 / 윤효
시 공부 시작하던 스무 살 무렵
나중에 시론을 써서 낸다면
책 이름을 무엇이라 할까
생뚱맞게 이런 궁리를 하다가
정한 것이『언어경제학서설』
짧은말 속에 속울음을 담고 싶었다.
- 윤효, 『참말』(도서출판 시와시학, 2014)
시를 위하여 · 5 / 윤효
안양천 타고 내려와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23킬로미터
자전거 출퇴근치고는 무리인 듯싶어도
그 길에 원효대교 있어 가뿐하다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상판을 떠받치고 서 있는
그 다리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내 다리도 군더더기 없이 가뿐, 가뿐해진다네.
불끈, 다릿심 솟는다네.
- 윤효, 『참말』(도서출판 시와시학, 2014)
종이상자 시론(詩論) / 함민복
종이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상자는 겸손하다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글씨가 내용이 되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지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깨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채운다
종이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詩)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창작과비평』2016년 여름호.
시詩, 처음부터 있는 / 정일근
통도사 서운암 대안大眼스님 새벽마다 된장 장독 간장 장독 닦는다. 정성은 맛을 만든다고 한 말씀 건네자 스님 정색하신다. 아닙니다. 장은 사람이 만들지만 맛은 자연이 만들지요. 그 말씀 시 같다며 받아 적는데 스님 더더욱 정색하신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건 처음부터 다 있는 것이지요. 맛도 그렇고 시도 그렇지요. 처음부터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 쓰는 것이지요.
- 정일근,『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시학, 2006)
시답잖은 시론 / 박제영
시는 시(詩)다 말로 절을 짓는 거다 잘못 지으면 땡중 된다 이 말이렸다
시는 시(侍)다 사람이 절이고 사람이 부처다 그러니 모셔라 이 말이렸다
시는 시(市)다 구중궁궐이 아니라 책상머리가 아니라 시는 저잣거리에 있다 이 말이렸다
시는 시(視)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라는 거다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잠수함의 토끼처럼 세상이 무너지고 가라앉고 있는 것을 먼저 보고 짖어라 이 말이렸다
시는 시(矢)다 짖어도 안 되면 아예 쏴라 세상 무너뜨리고 망가뜨리는 놈들 가슴팍에 화살을 팍팍 꽂아라 이 말이렸다
이상의 것을 무시하면 어떻게 된다고?
시가 시(屎) 된다 된똥도 아닌 묽은똥 된다 이 말이렸다
아예 시(尸)가 되는 수도 있다 시쳇말로 죽은 시가 된다 이 말이렸다
[출처] 시 모음 936.「시론(詩論)」|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