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함께 숙고해 봅시다
지난주 예배 때 목회자가 설교 중에 신명기 23장 20절을 함께 읽자며 스크린에 뜬 신명기 23장 20절을 교우들과 함께 낭독했습니다.
“…여호와 그대의 하나님께서 그대가 들어가 차지하는 땅에서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 낭독을 마치자마자 회중을 향해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찰나에 복이 축복으로 바뀐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복을 빌어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며칠 지나 호형호제하는 아우를 만났는데 대화 중에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가 축복과 복에 대해 말하면서,
성경에는 축복과 복을 그 뜻을 분명히 구분해서 썼지만, 모든 사람이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니까 교회에서도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통탄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지하는 대로 복은 복의 근원인 하나님만이 줄 수 있고,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복을 받도록 비는 게 축복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이 복과 축복을 구분해 썼습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복과 축복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면,
하나님을 복이나 빌어주는 신으로 폄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목회자는 하나님 위에 하나님보다 더 상위의 신인 돈, 명예, 권력, 출세의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말로도 변명이나 해명이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지오웰은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세상 사람들의 언어 관습을 따르다 보면 크리스천들의 의식이 오염돼 하나님을 복이나 빌어주는 신으로 믿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상위의 신인 돈, 명예, 권력, 출세의 신에게, 그런 것들을 이룰 수 있도록
빌어달라고 꽤 능력 있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이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더 큰 문제는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성경을 떠나 이렇게 세상에 오염된 말을 사용하면 교인들도 목회자를 따라서 오염된 말을 사용해,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마 5:14).
이런 목회자는 교인을 실족시키는 것이니 차라리 목에 연자매를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게 나을 것입니다(마 18:6).
목회자가 하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을 세상 관용어로 사용하면 왜 안 되는지 필자의 생각을 좀 더 피력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까지를 요약하면 창조 전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며, 만물이 그분(말씀, 하나님)으로 인해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고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의 언어 관습에 따라 변질시키면 하나님이 정체성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정체성이 무너지면
생명이 무너지며, 생명이 무너지면 빛이 어둠이 되고 맙니다.
즉 정체성이 무너진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인도한 사람만 구덩이에 빠지는 게 아니라, 인도받은 사람도 구덩이에 빠진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축복이라는 말이 사전에도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복을 내림”이라고 수록했기 때문에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전에는 은어와 속어는 물론 관용어도 수시로 수록합니다.
“축복”을 예로 들면 1997년에 발행된 사전에는 “행복을 빔” 하나만 수록했지만, 1999년에 발행된 사전에는 추가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복을 내림”이라는 내용도 수록했습니다.
즉 추가로 수록한 건 많은 사람이 관용으로 그렇게 사용하니까 수록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이 축복과 복의 뜻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하나님이 주는 것은 “복”으로 사람이 복 받도록 비는 것은 “축복”으로 쓴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허무는 관용어를 따르지 말고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바른말을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 단락의 글이 맞는 내용이라면 축복과 복을 관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혹시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해당하는 건 아닌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 모독죄는 현세와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막 3:29).
열왕기서를 보면 선한 왕과 악한 왕의 판단 기준이 무슨 큰일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께 여쭈어보았느냐가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하나님의 정체성을 폄훼하는 건 아주 큰 문제인데, 복과 축복을 세상 사람들처럼 같은 뜻으로 사용해도 되는지,
아니면 성경 말씀대로 사용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괜찮다.” 또는 “안 된다.” 둘 중 하나일 텐데 어떻게 답하실까요?
교인은 언젠가는 모두 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그때 하나님이 심문하는(하나님께 해명해야 하는, 하나님께 진술해야 하는) 내용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육신을 덧입고 살 때 말한 무익한 말(터무니없는 말, 함부로 내뱉은 말)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명에 따라 하나님이 무죄냐 유죄냐를 선언한다고 합니다([마 12:36~37]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3장 2절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약 3:2).
말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이방인들은 그 변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쓴다고 해도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는 말인지를 심사숙고해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건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면 하나님 말씀에 불복종하는 것입니다(출 23:2).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변덕을 부리지도 않으시며,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시고 말씀하신 건 꼭 이루신다.’ 내가 축복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그분이 복 주신 걸 내가 바꿀 수 없습니다.” (민수기 2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