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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성의 피해상황
전봉준을 추격하면서 내려 온 관군과 일본군은 12월 1일 갈재를 넘어 장성으로 들어와 전봉준을 수색하는 한편 동학농민군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전봉준이 입암산성과 백양사에서 일박씩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관군은 백양사 부근 마을을 수색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으니 북하면 용두리 궐전마을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전봉준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전술한 바와같이 11월 29일 입암산성에서 1박하고 30일에 백양사에서 1박한 후 태인을 향해 순창으로 떠난 뒤여서 그 화풀이로 궐전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관군은 북이면 원덕리에 있는 전일귀효자비에 전봉준이 제사를 지내고 무운을 빌었다고 하여 그 보복으로 비각을 불태우고 비신을 두동강 냈다.
또한 동학농민군토벌의 총사령관인 이규태는 장성이 무장, 영광, 광주, 담양, 장흥, 무안, 함평, 동복, 흥양, 고부 등과 같이 동학농민군의 큰 소굴이어서 설사 전봉준이나 김개남이 체포된다 하더라도 그밖의 거괴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말하여 장성의 동학농민군 활동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피해도 컸던 것이다.
장성은 동학농민혁명의 본거지인 정읍이나 동학조직이 가장 성했던 무장과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도 많았고 장성 황룡싸움터가 있는 곳이라 동학농민혁명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고을이다. 그리고 이춘영이 일찍부터 장성의 접주로 활약했던 지방이며 유수한 향족들이 세를 떨치며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항심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지역보다 피해가 컸으니 장성부사 민상호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3월 19일에 부임하여 9월에 엄찰사 엄세영으로부터 동학농민군 관계로 금구현령 김명수, 고부군수 박원명, 정읍 오학영, 부안 이철화와 함께 파면당하고 그들의 죄를 해당 부서에서 다스려 줄 것을 품의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군수로 이병훈이 12월 12일에 부임하였으니 3개월 이상이나 수령이 없는 상태에서 장성의 행정은 마비되었고 공백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장성에서 3월 봉기에 참여했던 김주환, 기우선, 기동도, 박진동, 강성중, 강서중 등이나 장성 접주로 활약했다는 이춘영 등이 어떤 활약을 했고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박내원과 김복환, 김진환 형제의 활동은 기록이나 증언을 통해 약간은 알 수 있다.
박내원은 1859년에 장성군 황룡면 관동에서 출생했는데 본관은 밀양이며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가 11월에 관군에 체포되어 형사했다.
김복환, 김진환 형제는 장성군 서삼면 금계리 신평출신으로 장성에서 동학접주로 활약하다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는데 공주패전 후 남하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의 살육작전에 맞서 함평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특히 이 마을은 울산김씨 자가일촌으로 전동네가 동학농민혁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김진환, 김복환 형제가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순무선봉진등록」에서 장성지역의 동학농민군 피해상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 12월 2일 장성에 주둔하면서 방을 붙였는데 그 내용은 병정들이 혹 폐를 끼쳤다면 눈비로 추워서 그랬으며 아직 안정되지 못한 때문이니 앞으로 단속을 잘 하여 폐가 없게 할 것이니 관속들이나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군에게 먹을 것을 잘 공급해 달라고 했다.
◦ 12월 5일 선봉진에서 첩보한 것에 의하면 각 부대를 인솔하여 별 폐단 없이 장성에서 밤을 지냈다. 정읍의 동학거괴 손덕수는 손화중의 일가인데 고을사람들이 잡아왔다. 그는 용이 그려진 큰 깃발과 손깃발 1개씩을 가지고 손화중의 곤장수 정정칠과 장성 아곡에서 붙잡은 이봉학 등 3인을 어제 점심때쯤 장터에서 군민을 모아놓고 효수시켰다.
◦ 12월 14일 좌선봉의 첩보에 의하면 장성 한 고을은 이미 군기를 잃었으며 4개월이나 수령이 부재중이어서 동학군이 만연하여 소굴이 되었으므로 사상자가 많았고 마을마다 당을 이루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본진이 주둔한 후 방을 붙이고 효유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각 면리에 독촉하여 동학거괴들을 붙잡아 경중에 따라 처리중이다. 장성부의 동면 용두리는 본래가 동학의 소굴로 이민(吏民)이 접근하지 못해 병정과 별군관 이재화, 황범수 등을 파견하여 동학거괴 3인을 체포하여 민원에 따라 현장에서 죽였다. 별군관들이 깊은 소굴에 들어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분전하였으니 가상하므로 포상하는 것이 좋겠다.
◦ 12월 19일 장성 수성별장의 첩보에 의하면 장성부의 북일면 금곡접주 한덕일과 김사문 등을 현봉호가 잡은 과정을 보고하였으니 그 처리를 지시해 달라 했다.
◦ 1895년 1월 2일 장성부사의 첩보에 의하면 군무와 창고의 관리가 막중한 일인데 본 읍의 장리(掌吏) 이양구의 부정행위를 심문하기 위해 구속수감했다.
◦ 1895년 1월 2일 장성부사겸 소모사 첩보에 의하면 본부의 경내에 강일음은 본부의 동학거괴인데 읍내를 지킨다고 하면서 관장을 위협하고 본부의 군기를 빼앗아 민간의 전곡을 겁탈하여 빼앗았다. 손의영 포 무리들은 다른 고을에까지 가서 백성들의 재물을 겁탈했으며 정하표는 접사로서 민간에게 폐를 끼쳤고 기강을 문란시켰으며 강유음은 강일음의 동생으로 접사가 되어 그 형의 횡포에 빌붙어 불의하게 행패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손홍모는 본부 북하면 신촌 접주로 또한 행패가 많았는데 관을 속여서 자수했으나 그 일당들을 숨기고 총과 창을 반납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공치선은 본부 북이면 상곡 접주로 이 또한 크게 나쁜 놈인데 곡성현의 군기를 빼앗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며 본부 북이면 목란리의 유광오는 정읍 등천접주로 두 고을에 출몰하면서 많은 폐를 끼쳤고, 추영시, 손기환은 태인현에 사는 접주 유복만의 접솔로 흉폭하고 패륜하여 용서할 수 없다. 백태일, 오영기는 본부 북일면 재암접솔로 횡패한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달 27일 장날 거리에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일음은 효수하고 손의영, 정하표, 강유음, 손홍모, 공치선, 유광오, 추영시, 손기환, 백태일, 오영기 등 10명은 죽여 대중에게 경종을 울리겠다.
◦ 1895년 1월 2일 장성부사겸 소모사의 첩보에 의하면 본부 장내에 공기노, 김종익, 이기주, 공치환, 남나구, 이궁궁, 한덕일, 김사문 등은 모두가 동학의 악질로 군기를 빼앗고 국가의 공납을 방해하여 군수로 사용했으며 백성들의 부담을 없애고 남의 도조를 늑탈하고 겁략하기를 노소나 남녀를 가리지 않았으므로 부사 도임하는 날 듣고 해괴하고 패악하게 생각하여 모두 심문하여 공기노, 김종익 등 양인은 효수하고 이기주, 공치환, 남나구, 이궁궁, 한덕일, 김사문 등 6인을 죽여셔 대중에게 경고하였으며 나머지 잡지 못한 사람은 체포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겠다.
◦ 행 장성도호부사 겸 소모사의 첩보에 의하면 본부 경내에 머물러 있는 충청인 황범수는 순무영별군관이라 칭하고 두루 마을에 돌아다니며 죄인을 잡는다고 하면서 돈과 재물을 토색하고 소를 빼앗고 곡물을 약탈하는데 근거할 공문도 없고 지방관에도 통지하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하며 폐단을 일으켜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북하면 용두리에 사는 김낙주는 또한 군관이라 칭하면서 같은 무리들과 함께 평민들을 체포하여 돈과 곡식을 약탈하여 백성들의 동요를 걷잡을 수 없으니 그 하는 행위를 생각하면 심히 통탄한다. 참모 군관 유회(儒會) 상사(商社)의 이름으로 함부로 날뛰는 자들을 엄하게 금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미 순무영의 전령으로 민보(民堡)나 의병(義兵)을 모두 없애어 엄금하게 했는데 이것을 하부까지 하달하여 다시 되풀이해서 옛날의 폐단을 저지르지 않게 하여야 하며 이러한 무리들을 즉시 처단하게 하여 무고한 생민(生民)들은 안심하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황범수와 김낙주를 우선 엄하게 구속하고 그 사유를 보고한다.
◦ 행 장성도호부사 겸 소모사의 첩보에 의하면 본 읍은 큰 길이 되어 경군(京軍)이 왕래할 때 군대나 마필이 왕래하는 날 그 급식에 어려움이 언제 그칠는지 모르겠다. 병정이나 짐을 싣고 다니는 말. 그리고 금군(禁軍) 8․9명, 말들이 6․7마리가 이 고을에 이르러 백성들을 침략하여 많은 폐단을 낳는데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쉽게 죽임을 당하여 그대로 따르게 되니 이렇게 계속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매번 병정의 횟수나 병마의 인원과 마필 수를 공문으로 적어 공급하게 하면 그에 따라 지급하게 되어 자연히 갈등이 없어지고 민폐를 막을 수 있다.
또한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將領姓名並錄成冊)에서 장성지역의 피해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장성의 동학도 신석만은 1895년 1월11일에 잡혀 우진영에 압송되어 심문하게 됐다.
한편 당시대를 살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변만기의 「봉남일기(鳳南日記)」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계있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1894년 10월 26일 오후에 동학도인 4․5명이 말을 타고 왔다. 그들은 군수전 100냥 표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략질을 하려 하여 동학본부에 사람을 보내 물침령소(勿侵令書)를 얻어다가 피해를 면했다.
◦ 10월 28일 고창접주가 본부에 와서 점심 4상을 본촌에서 갖다 바쳤다. ....... 각리 면에서는 소위 쌀과 군수전을 자기 마음대로 내게 하거나 또는 개인감정으로 약탈하는 폐가 많아서 원망의 소리가 높다. 석양에 고창접 1,000여명이 황룡장터에 옮겨 진을 쳤다.
◦ 10월 29일 오후에 고창접주 신정옥은 손화중의 급한 기별을 받고 월평으로부터 돌아갔다고 한다. 많은 왜선(倭船)이 법성포에 정박한다고 하는데 일전에 왜병과 경병이 최시형의 소재지에 불을 질러 도인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한다. 아침에 들으니 홍대장이 경군과 왜병을 거느리고 나주에서 동학군과 접전하여 동학도인이 많이 다쳤다고 한다. ........ 인심의 소요는 갈수록 심해가고 있다.
◦ 11월 6일 본도의 도백 이도재가 선무사를 겸하여 나주목사에게 글을 보냈는데 경군 1,000여명이 이미 본도에 왔으니 나주 역시 군대를 발동하여 동학농민군을 소멸할 것이며 그러나 귀화자는 속죄(贖罪)할 것이라는 윤음이 왔다고 한다. 지금은 도순무사는 신정희요 우초토사는 나주목사 민종익으로 13고을의 군대를 거느리고 좌초토사는 순창군수 이성렬이며 소모사는 장성 원님 이병훈이라 한다.
◦ 11월 7일 우리 고을과 인근 고을에서 동학도인을 피하여 온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면서 잠을 잤다. 나주목에서는 속인(俗人)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귀화자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친 자에 대하여는 용서하여 준다고 한다. 수성군 4․5천명을 지휘하여 성루를 수축하고 루에 막을 치고 성벽에 포를 묻었다 한다.
◦ 11월 9일 광주에 갔더니 동학도인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려 적적했다. 어제 나주의 오중문이 황룡장에서 자고 광주로 갔다고 한다.
◦ 11월 10일........ 밤에 사람을 급히 보내 당숙댁에 동학도인의 토색폐가 있다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가서 구해 주었다.
◦ 11월 13일 나주 수성군이 어제 나주에서 출진하여 북창근처의 접주집에 불을 질렀다. 새벽에 오중문을 쫓아 용진산 아래에서 대한포를 쏘아 뇌성같은 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오중문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거처를 알 수 없다 한다.
◦ 11월 14일 황룡장터를 돌아보았더니 인심이 뒤숭숭하다. 광주와 나주의 경계지역은 연기가 구름 같아서 물어 보았더니 집을 불태우는 연기라 한다. 그곳 남녀들은 산으로 올라가고 들로 도망을 가는데 꼭 냇물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본읍 동학도인들이 성을 지킬 뜻이 있어 모여서 잠깐 황룡장터를 거쳐 곧 부내로 들어갔다.
◦ 11월 15일 나주목사가 영장을 보내 수성군의 방화죄를 엄하게 다스리고 돌아왔다. 정읍 등내의 접주가 와서 우리 읍 북면에 자리잡아 그곳의 작폐가 있을 것 같다하여 우리 고을의 동학도인이 모두 부내의 도회소에서 밤 늦게까지 경비를 하여 부근 마을에서 밥상을 나르느라고 분주하였다.
◦ 11월 16일 원근의 마을에서 포 소리와 군대 움직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제 새벽에 이생원이 동학도인에게 화를 입고 마침내는 스스로 목을 졸라 죽었다 하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이날 고창 칠암 도인과 우리 고을의 재암접 수백명이 모여 있다한다. 영신의 동학도인 수십명이 저녁밥을 먹은 후에 도착하여 다시 밥을 지어 바쳤는데 닭이 울 때 쯤되어 어떤 사람이 제각 비탈길에 올라가 나주 수성군이 방금 광주 비아산에 이르러 죽이겠다고 하자, 영신의 동학인들이 모두 가버렸다.
◦ 11월 17일 근읍의 동학도인들이 황룡장에 모였는데 만 여명이라 한다. 우리 마을에서 아침 저녁 400상을 바쳤다.
◦ 11월 18일 우리 면의 면임이 동학도소의 명령문을 가지고 경내에 통지하기를 집집마다 쌀 한 말, 콩 한 되, 짚신 2켤레씩 거두어 보내자 하였다. 본래의 동학도인 역시 대접의 명령을 감히 어기지 못하고 황룡본부에 갔다고 한다.
◦ 11월 19일 동학도인은 짚으로 어치(소의 추위를 막기 위해 짚을 엮어 만든 것)를 만들어 입고 또한 종이연을 만들어 각기 고춧가루를 연에 숨겨 뿌렸다한다. 영광 사창장(현재는 장성군 소속) 광주 아산장, 본 읍의 황룡장 세 곳에 모인자가 몇만 명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 11월 21일 어떤 이가 고창에서 와서 말하기를 무수한 왜선이 법성포에 이미 정박해 상륙하였다 한다. 그곳 남녀들이 흩어져 피난민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사창장과 황룡장의 동학도인 역시 일제히 철거했다 한다.
◦ 11월 22일 고창 임천서가 기포하여 함평으로 갔다한다 장터를 돌아보니 장은 서지 않고 장사꾼이 드문 별 같고, 동학도인만 운집하여 모두 창을 가진 사람과 포수뿐이다. ........ 앞 가게에는 읍 사람들이 소를 잡았다.
◦ 11월 23일 식전에 동학도인 6․7명이 갑자기 사랑에 들이닥쳐 요기를 시켜보냈다. 전봉준이 4차 패전했다 한다.
◦ 11월 24일 저녁때 고부의 동학도인 300여명이 깃발 일곱 개를 세워 우리 마을에 들어와 음식을 제공하는데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고부사람들에게서 들어보니 전봉준이 여섯 번 패전했다고 하고, 일곱차례 패전했다고도 하는데 부하들은 거의 죽고 간신히 몸만 죽음을 면했다 한다.
◦ 11월 25일 동학도인이 나주에서 패망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니 근읍에 몇 만명인지 알 수 없고 마치 봇물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창 신정옥이 이달 15일부터 황룡장에 도소를 설치하고 쌀을 억지로 거두어 들여 각 면․리 사람들의 원망소리가 높다.
◦ 11월 27일 그제 경군이 원평으로 왔다고 한다. 광주에서 온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손화중이 수만명을 이끌고 덕산에 진을 쳤다한다. 최경선과 이씨는 나주에서 혼이 빠져 다른 고을로 달아나서 본 고을의 남쪽 4개 읍에서 민폐를 끼치고 있다한다. 나주에서 삼덕이가 와서 말하기를 박산(박뫼)의 일촌은 남녀가 하나도 없이 전부 비어 있다고 한다.
◦ 11월 29일 태인에서 패전한 동학도인의 말에 의하면 27일 새벽에 경군과 왜군이 전주에서 와 조반 때 원평에 있던 동학도인과 접전하여 동학도인이 죽고 다친 사람이 수백명이요 살아남은 자가 수만명인데, 봇물처럼 흩어져 태인읍으로 갔는데, 그날 경군이 추격하여 접전하니 동학도인이 또 패하여 다친 사람이 무수하고 사방으로 도망하여 전봉준은 겨우 몸만 살아 났다 한다.
경군은 불과 100명으로 지나는 고을마다 폐를 끼치지 않고 가마솥을 지고 자취하여 밥을 먹는다 한다. 전주 밖 송접주집을 불태우고, 원평도소를 불태우고 태인 동동에서 사람을 죽인 것 외에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패전한 동학도인 수백명이 거의 과거에 본읍에서 살던 사람이요 경기와 호남의 전주인이 탄환을 맞아 싸메고 다니는 자가 수를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은 광주 덕산의 손화중 진중으로 갔다고 한다.
◦ 11월 30일 그저께 28일에 경군은 태인읍에서 식사를 끝내고 29일 정읍으로 행군했다고 한다. 부내 동산 손오위장 집에 갔는데 이방 손경숙과 호장 손윤홍 등이 때마침 왔기에 경군이 지연된 까닭에 대해서 몇마디 이야기 하고 나와서 들으니 어제 전봉중이 갈재를 넘어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왼쪽 골자기로 도주하였다 한다. 경군이 정읍의 등내촌을 불지르고 새재를 넘어 황룡강에 유숙하였고 후군은 천원역에 유숙했다 한다.
◦ 12월 1일 감사는 이도재로 연안인이요 군수는 이병훈으로 광주이씨이며 선봉장은 이규태인데 덕수이씨이다. 본리 동임이 이방의 사신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경군의 선진이 방금 읍으로 왔다고 하였다. 땔감과 짚신을 걷어 보냈는데 오후에 도착한 경군은 모두 1,000명에 가깝고 그 가운데는 왜인이 100명이라 한다. 이날밤 군량과 군전 말먹일 콩을 걷어 오라는 지령이 있어 밤 늦게까지 걷어보냈다.
◦ 12월 2일 본부의 관속과 본관 이병훈은 새해 인사차 이른 새벽에 전주로 갔다. 초토선봉 이규태가 군대를 이끌고 유식하면서 전령을 보내 효유했다. 부내의 접주집 3동을 초토소에서 군대를 풀어 각처의 죄인을 잡아 들였다. 본읍의 장교가 군수품의 준비차 나와서 본읍의 농우를 끌고 가려 하므로 좋은 말로 사정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날 밤 군량미와 콩을 보내라는 지령이 또다시 내려 즉시 보냈다.
◦ 12월 4일 경군과 왜군 100여명이 마을을 떠나 사창으로 갔다고 한다. 접주 3인을 붙들어 본부 시장에서 죽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손덕수라 한다. 경군 10여명이 신평김씨가에 들어가 소와 말을 끌고 갔으며, 돈과 재물을 뒤져 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내동에다 땅을 파고 막을 쳤는데 10여명은 충분히 숨을 수 있다고 한다.
◦ 12월 5일 경군과 왜군 수백명이 영광으로 가고 다만 선봉대장만 100명정도를 거느리고 유숙했다고 한다. 수일 전에는 나주 수성군이 광주 서창에 출진하였고, 광주 선봉 수성군이 후진하여 총을 쏘아 동학당은 흩어졌다한다. 스스로 기포했다는 접주들을 촌락을 뒤져 잡아갔다고 한다. 광주 수남접주 정지학이 남평관아에 들려 남평원님은 사경에 이르렀다 한다. 경군 한 사람이 본리에 들어와 짐끄는 소 한 마리를 끌어갔고 경군은 또한 각 접주집의 소를 뒤져다가 부중에 팔아 소 값이 지극히 헐값이라고 한다.
◦ 12월 7일 오후에 향교에 가는 길에 시가를 지나다가 경군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시장에서 죄인 세 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한다. 향교에 이르러 보니 향중의 선비들이 유생대회를 하는데 대청과 양사재에 가득 차 있고, ...... 관군의 식사와 왕의 군대를 올리고 동학도를 숙청하는 일을 의논했다.
◦ 12월 8일 북에서 선비 한 사람이 소 한 필, 쌀 두 섬을 대장에게 바쳤고, 경내의 사민은 모두 밥을 지어 바쳤다. 각 고을의 죄인은 이제 잡혔고, 전봉준은 순창 현지에서 잡혔다고 한다. 이날 밤 수성군이 영광댁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갔다. 김몽치가 잡혀갔다고 한다.
◦ 12월 9일 향교에서 소 한 필과 쌀 3섬을 선봉장에게 바쳤다고 한다. 고산리 기참봉은 그 문생들을 거느리고 군사들이 먹을 쌀과 소를 바치고 갔다고 한다. 향교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고, 선봉장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주에 갔다 한다.
벽사(장흥) 찰방이 어제 본부에 와서 말하기를 장흥 원님과 찰방이 동학도가 쏘는 총에 맞아 빨리 관군이 와주기를 청하므로 급히 떠나면서 분부하기를 수성장이 죄인 세 사람을 시장에서 태워 죽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북일면 구해의 김선오로서 기선달 우제이 동생이 칼을 뽑아 목을 치고 배를 갈라서 쓸개를 싸가지고 갔다 한다. 석양에 집으로 돌아오니 수성군 2명이 갑자기 두암댁에 와 돈을 토색질해 갔다 한다.
◦ 12월 10일 금곡 한덕일과 김명달 공기노가 모두 현지에서 잡혀갔다고 한다.
◦ 12월 11일 통내의 김백명이 현지에서 잡혀갔다 한다.
◦ 12월 15일 마을에서 수탉이 한 마리도 없어 읍촌에서 수탉 한 마리를 빌려와 새벽과 저녁을 분간하기로 하고 일관문부를 주었다. ...... 왜대인이란 자가 일인을 거느리고 모든 공청과 동헌을 주장하고 나주 목사는 노반청(奴斑聽)에 물러나 있었다. 일본인이 4대문을 지키고 있었고, 수성군은 울분만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 12월 15일 어제 한덕일과 김명달을 시장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 한다.
◦ 12월 22일 시장을 지나는데 원님이 수성군 수백명을 거느리고 위엄을 떨치면서 죄인 6명(말무정 공치선 형제, 오현 전접주, 그 밖에 3인은 누군지 성명을 모르겠다.) 중 김.공 두 사람은 참수하고 네 사람은 총을 쏘아 죽여 불태웠다.
◦ 12월 23일 수일전부터 고을의 전령이 내려와 각 면임․서원․하유사․이동임에게 병기를 수집하여 관가에 가져 올 것이며, 소위 접주 역시 각자의 병기를 빠짐없이 바치라 했다 한다.
◦ 12월 27일 본 고을 원님이 경군과 수성군 그리고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사장에서 무위를 갖추었는데 군인은 칼과 총을 소지하였고, 노령(奴令)은 깃대를 잡거나 쇠북을 울려 자못 엄숙했다. 병정을 좌우로 나누었는데 왼쪽 앞에는 수성군이고 뒤에는 삼반을 점고하여 관속은 땅에 엎드렸는데 3반 가운데 죄인을 골라내어 법을 집행하였다. 강계중은 목베어 효수하고 강서중, 손경숙, 정별장의 조카, 손학모, 공치선 등 16인을 총으로 쏘아 죽여 모두 17인을 법대로 처리했다.
◦ 1895년 1월 4일 지난 초하루 일인 30여명이 고개에서 동학군을 붙들어와서 본부에서 자고 나주로 떠났다고 한다. 지난 초이튿날에는 경군 100여명이 동학군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홍낙관과 수성장 박문달과 함평원님은 문을 열고 적을 맞은 죄로 이들을 데리고 나주로부터 올라와 본 읍에서 자고 서울로 떠났다고 한다.
◦ 1월 5일 매 8호에 장정을 한 사람씩 차출하여 성을 지키게 하겠다는 면임의 전령이 왔다.
◦ 1월 13일 본부의 5거리 병정과 수성군은 밤까지 지키기를 세전부터 지금까지 하룻밤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 1월 14일 선봉장 이규태가 경군을 이끌고 나주로부터 올라 왔는데 일인이 전진으로 본부에 왔다고 오후에 곧 서울로 갔다. 오늘밤 마을에서 일곱집이 뗄감을 향청에 갔다 주었다.
◦ 1월 17일 길에는 일인과 경군이 광주로부터 인접된 담양 쑥다리 30리에는 만여명이 끊이지 않고 위로 올라 갔다고 한다. 본 읍에 잡혀 있는 죄수들이 많이 풀려났다 한다.
◦ 1월 18일 초토선봉 이규태가 일인과 경군 1,000여명을 거느리고 오전에 본부에 왔는데 각 동리에서 짐을 지려고 다투는데 줄을 지어 있거나 빈 지게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군인의 짐도 지면 경군으로부터 한 사람에게 5전씩을 받는다고 한다. 호남일성이 갑오년 봄부터 겨울을 지날 때까지 동학당들의 소동에 놀래고 겁을 내어 가뭄에 땅은 거칠어지고 밭갈고 씨뿌리지 못하여 제 시기를 잃고 모두 굶주림 때문에 이제 위로부터 은총이 내린 것이다. 본 읍의 지난해 미수금도 따라 정한 각 면유원(面儒員)에 걷우어 들이고 서리의 손을 가까이 못하게 하고 근년 도결을 걷는 것도 읍에는 향원, 면에는 면원이 걷되 역시 그 사이는 이서배가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1월 25일 그제부터 본 읍 수성군 300명을 채우려고 점검을 하는데 오늘까지 3일동안 일을 했다고 한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에 동학에 가담하였는데 살려달라는 장성 북일면 오산부락의 변창연과 이문현 등의 호소문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장성부에 내린 공문에 정정국, 국오묵, 정석원, 이영진, 이달용, 백만조, 정찬문, 박준명, 정성삼, 김일순 등 10명을 부에서 염격하게 가두어 취조를 한 후 제반조치를 전후의 지시나 명령에 따라 처리하라는 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장성 북이면 금량리에서 백성들이 저녁에 진정했는데 어떤 동학도인 수백명이 마을에 들어와 밥과 돈을 빼앗아 가지고 도망갔는데 그들의 말 7필을 버리고 갔으니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밖에 동학의 소란시 어쩔 수 없이 가담했거나 불안했는데 이제 경군이 와서 평안해 졌으니, 지난날을 모두 용서해 달라는 수많은 진정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장성읍 월평의 문초계댁 종 춘광이 자기주인이 주관하는 명례궁전의 토지세 조세 32석을 사음집에 쌓아 놓았는데, 병정들이 동학의 곡물로 오인하여 본 읍으로 가져갔으니 돌려달라고 진정하기도 했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