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현장
그동안 몇 해에 걸쳐 주제가 있는 여행을 해보았다. 그 결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서원(書院)과 사찰(寺刹)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매화(梅花)가 있는 곳을 순방하였다. 또한 왕릉(王陵)과 고가(古家)/종가(宗家)의 탐방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번에는 우리 가사 문학(歌辭文學)의 근원지를 찾아보았다. 문학과 정치 그리고 인생을 논하던 사림(士林)들은 하나같이 원림과 정자를 지어 세상사를 논의하고 유유자적하며 인생을 노래하였다. 문학은 인간을 살찌운다. 희로애락에 고통 받는 이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다. 내면에 깊이 간직한 연민의 소리를 밖으로 표현하는데 문학만큼 효과적인 장치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동생 부부와 여정을 함께하였다. 금번 여행에 원래 합류하기로 한 친구는 급작스런 사정으로 빠지고 다음 기회를 갖기로 하였다. 대신 동생의 친구 부부일행이 비슷한 일정인지라 구경은 앞서거니 혹은 뒤서거니 했으나 숙식은 함께하고 지냈다.
원래 토요일은 시제 행사가 있는 날인지라 먼저 그동안 미뤄왔던 성모암(聖母庵)을 찾았다. 여러 가지 기행으로 유명했던 「진묵대사(震黙大師)」가 그의 모친을 모신 무덤이 있는 곳에 세운 곳으로 전국도처에서 참배객이 찾는다.
원림(園林)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일본의 정원이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스런 상태를 그대로 조경대상으로 삼아 적절한 위치에 더불어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의 3대 원림으로 담양의 소쇄원과 보길도의 부용동, 서울 부암동의 석파정(石坡亭)을 꼽았다. 그 중에서도 소쇄원과 부용동, 월출산 남쪽에 위치한 백운동 원림은 호남지역을 대표한다.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 명승)은 1530년경에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를 당하고 죽게 되자 출세를 접고 여기에 조성한 별서(別墅)원림이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주된 일상을 위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다.
부용동(芙蓉洞) 정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이 있어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을 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 밑에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는 섬의 이곳저곳에 세연정(洗然亭) 등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그는 이곳에서 「어부사시사」 등의 작품들을 남겼다.
백운동(白雲洞) 원림은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전해진다. 송림사이로 보이는 월출산능선이 마치 용이 하늘로 나는듯하여 선경처럼 아름답다.
이번에 새로 처음 찾은 곳은 명옥헌(鳴玉軒)이다. 명옥헌 원림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었던 정원이다.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정자 옆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본 「송시열」은 이 정자를 '명옥헌'이라 이름 짓고 바위에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정자 옆의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7월경에 활짝 핀 배롱나무 꽃이 연못과 어우러진 풍광은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담양 일대의 정자 중 먼저 봉산면에 있는 면앙정(俛仰亭)을 찾았다. 이를 만든 「송순(宋純 1493~1582)」은 90년이라는 긴 생애 가운데 50년 세월을 관직에 종사한 관리로 한글 가사(歌辭)문학 면앙정가(俛仰亭歌)를 비롯해 시조와 한시 560여수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 1401년 ~ 1481년)」의 ‘상춘곡’(賞春曲)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면앙 송순」의 나이 87세(1579년)때 과거급제 60돌을 축하하는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회방(回榜)은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해가 된 때를 이르는 말이다. 선조가 꽃과 어주(御酒)를 내려 축하했다. 성황을 이뤘던 자리가 파하고 “선생을 위해 직접 가마를 메어드리자!”는 「정철」의 제안에 따라 「송강 정철」과 「백호 임제(白湖 林悌)」,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제자들이 스승을 가마에 태워 언덕길을 내려왔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어서 송강정(松江亭)을 찾았다.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어우러진 작은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송강」은 1584년 동인 세력이 주도해 탄핵을 당하자 담양으로 내려와 죽록정(竹綠亭)을 짓고 이곳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 국문학사 최고의 작품을 썼다. 지금의 송강정은 1770년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송강정에는 '松江亭'과 '竹綠亭' 편액이 모두 걸려 있다. 송강정 앞에서 내려다보면 도로 뒤편으로 개울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정철」의 호가 연유한 죽록천(竹綠川), 일명 '송강(松江)'이다.
을사사화(1545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소년 「정철」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에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김윤제(金允悌)」의 도움으로 공부도 하고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였다. 「송강」은 「송순」에게 가사를, 「김윤제」에게 정치와 행정을, 「임억령」에게 한시를, 「김성원」에게 거문고를 배우는 등 각 분야에 조예가 깊은 이들에게 배우며 남도의 풍류를 익혀갔다. 순창에 있는 훈몽재(訓蒙齋)에서 「하서(河西) 김 인후(金麟厚)」에게 배우기도 했는데 냇가에는 「정철」이 썼다는 대학암(大學巖)의 글씨가 암각 되어 남아 있다.
1562년 27세 때 문과 별시에 장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정철」은 평생 네 번 이나 낙향하는 정치적 불운을 겪는다. 「정철」은 스스로 물러나거나 탄핵당해 담양으로 낙향할 때마다 주옥과 같은 가사문학(歌辭文學)을 남겼다. 이 때문에 「정철」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가사 문학의 일인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정철」은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상소가 있은 후 선조의 명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실제는 선조의 광기어린 조종과 묵시적인 암묵에 따른 정적 제거의 허수아비 역할을 한 것인데, 다만 그의 개인적인 원한이 더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死)라 한다. 역대 명문가인 「이발(李潑)」을 비롯한 동인 중 다수가 희생되었다. 이 옥사로 나라의 동량이 대거 사라짐에 따라 곧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처할 심각한 인재의 부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사실 담양 일대에 산재한 정자의 중심은 환벽당(環碧堂)이다. 나주목사를 역임했던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현재 광주호로 흘러드는 증암천(甑巖川)〔옛 이름은 자미탄(紫薇灘)〕옆 언덕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기른 인물이다.
어느 여름날 「정철」은 현재 식영정(息影亭)이 있는 성산(星山) 앞을 지나다 자미탄에 들어가 멱을 감았다. 이때 개울 옆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던 「김윤제」는 개울에서 용 한 마리가 노니는 꿈을 꾼다. 깨어나 즉시 개울로 눈길을 돌리자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는 것이었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그는 순천부사로 있는 백부를 만나러 가는 「정철」을 만류하고 자신의 문하에 두었으며 외손녀의 사위로 삼았다. 이에 정철은 당대 명현인 「송순」,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고경명」, 「김성원」, 「임제」, 「이후백」 등과 교유했다.
식영정(息影亭)은 환벽당에서 개울 건너에 있는 성산에 자리한다. 「김윤제」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어 가는 정자’라는 뜻이다. 바로 이곳이 「송강」의 ‘성산별곡’의 산실이다. 「정철」은 이곳에 머물며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棲霞堂)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외에 취가정(醉歌亭)을 들러보았다.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에 있다. 임진왜란 시 조선 의병 총 지휘관이었던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의 혼을 위로하고 충정을 기리려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이 몽학」의 난이 일어나면서 무고(誣告)로 선조가 6차례나 국문(鞠問)하여 죽임을 당했으나 훗날 복위되었다. 「김윤제」가 그의 증조부라고 한다.
이어서 『산동 마을』에 들려 철지난 산수유 꽃을 구경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한 「황현(黃玹)」의 순국 장소에 세워진 『매천 사당』을 보았다. 이어서 천은사(泉隱寺)에서는 「창암 이 삼만(蒼巖 李三晩)」의 보제루(普濟樓)글씨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쓴 일주문 글씨를, 화엄사(華嚴寺) 일주문에서는 「석전 황욱(石田 黃旭)」의 현판글씨와 홍매 및 구층암에 있는 야매(野梅, 천연기념물)를 구경하였다. 이어 만발한 쌍계사(雙磎寺) 벚꽃을 완상(玩賞)하고 섬진강을 따라 매화마을에 들렸으나 역시 때늦은 뒷북을 치고 말았다.
다음 날 『돌산도』의 『향일암』과 『오동도』를 한 바퀴 돌아보고 기차로 상경하는 일정을 소화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종종 역사적 교훈을 잊고 지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부족하면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예로부터 수치를 모르거나 부모의 원수를 잊는다면 이는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배웠다. 이는 제 과오를 자기 후손에게까지 전가한 사람들이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 어느 젊은이가 조부의 죄과에 대해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언젠가는 준엄한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조부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편 식영정(息影亭) 뒤편에 있는 「송강」의 후손이 쓴 비문을 여러 번 읽어 보았다.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하여 다시 읽기를 반복하였다. 다른 행적은 기록을 했으나 유독 기축옥사(己丑獄死)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졌다. 아마도 후손으로서 조상의 과오에 대한 평가를 기록하기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는 「김병연(金炳淵)」이 과거 시험에서 「홍경래」의 난(1811년, 순조11) 에 항복한 조부인 「김익순(金益淳)」을 비난한 행적과 대비되었다. 훗날에 그가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서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곳에서 가까운 화순의 동복 땅에서 사망했다. 그는 선조의 불충과 자신의 불효에 반성하면서,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무리 곤혹스러울 지라도 과오를 저지르면 그 후손까지도 역사의 사실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식해야 한다. 과오와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후손들도 떳떳하게 사는 길이다. 이들은 마치 「이완용」의 자손이 파묘(破墓)를 하여 아픈 상처를 봉합한 교훈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여하튼 『무등산』이 바라보이는 담양 일대에는 원림과 정자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 속에서 문학이 무르익고 사람 간의 진솔한 교유와 역사가 만들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절정에 달한 봄기운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면서 지난 역사가 안겨준 다양한 교훈을 되새겨보는 유의미한 여행이었다. 동행하여 수고한 동생부부와 맛 갈 나는 음식을 제공해준 친구 부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2023.4.6.작성/4.10.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