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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9. 30
한국과 미국 프로야구에는 최근 비보가 잇따랐다. 9월 8일 야구 해설가 하일성 씨가 서울 송파구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끈으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하 씨의 휴대전화에서 부인에게 보내려고 작성했던 문자 메시지가 발견됐다. 그는 그 메시지 전송 버튼을 끝내 누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KBO 사무총장까지 지냈던 해설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에 야구계는 놀라고 비통해했다.
메이저리그에선 앞날이 창창한 투수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마이애미 에이스 호세 페르난데스가 9월 25일 마이애미비치에서 보트를 타다 사고로 숨졌다. 2011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돼 마이애미에 입단한 그는 2013년 신인상을 수상하고 올해 16승을 올린 미래의 에이스였다. 메이저리그 전체가 슬픔에 빠지고 애도를 표현했다.
▲ 2011년 9월 ‘안타 제조기’ 장효조가 간암 합병증으로 숨진 일주일 뒤 ‘불멸의 투수’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최동원 빈소. / 임준선 기자
# 프로야구 초기 감독들의 수난사
그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많은 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프로야구 초창기 감독들 가운데는 갑자기 세상을 등진 비운의 사령탑이 적지 않다. 서영무 삼성 초대 감독은 1983년까지 2년 동안 삼성 지휘봉을 잡은 뒤 1984년 OB 관리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5년 5월 대구 출장 중에 숙소인 수성관광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오랜 투병 끝에 1987년 53세의 젊은 나이로 결국 눈을 감았다.
해태 초대 사령탑인 김동엽 감독은 1997년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 감독은 MBC 감독까지 역임했고, ‘빨간 장갑의 마법사’로 불렸던 인기 감독이었다. ‘아시아의 철인’으로 통하던 박현식 삼미 초대 감독은 숙환으로 2005년 8월에 7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01년 7월에는 롯데 김명성 감독이 경기가 없던 날 남해로 바다낚시를 떠났다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삶을 마감했다. 유일하게 재임 도중 세상을 떠난 현역 감독이었다. 1988년 태평양 감독대행을 맡았던 임신근 전 쌍방울 수석코치는 1991년 9월 전주 경기를 앞두고 구단 버스에서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하다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 전설의 스타들과의 안타까운 작별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 스타들도 너무 일찍 팬들의 곁을 떠났다. 특히 2011년 9월에는 일주일 사이에 투타에서 큰 족적을 남긴 별들이 졌다. ‘안타제조기’ 장효조와 ‘불멸의 투수’ 최동원이다.
▲ 우정사업본부는 올해부터 우리 시대 각계 영웅들을 추억하기 위해 근현대 유명인물을 분야별로 선정해 ‘추억의 인물 시리즈’ 우표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묶음으로 2011년 9월 나란히 우리 곁을 떠난 한국 야구의 영웅 고 장효조 선수와 고 최동원 선수의 경기모습을 우표에 담았다.
▲ 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스타플레이어들이 격돌한 명승부와 수많은 기록, 다양한 화젯거리를 낳으며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사랑받고 있다. ‘프로야구 레전드’는 우리나라 프로야구를 빛낸 최고의 선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획된 시리즈이다. 최준서 지음, 한스미디어 / 동아일보
삼성과 롯데를 거친 장효조는 역대 3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타자들 가운데 통산 타율 1위(0.331)에 올라 있다. ‘영원한 3할 타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55세였던 그해 9월 7일 위암과 간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롯데에서 한국시리즈 4승 신화를 썼던 최동원 역시 ‘천재는 단명한다’는 속설을 피해가지 못했다. 장효조의 부고가 들려오고 일주일이 지난 9월 14일에 대장암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 10번을 뒤늦게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 장명부의 30승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 동아일보
1983년 한 시즌 30승 신화를 남긴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는 마지막이 서글펐다. 그는 팀당 100경기를 치르던 시즌에 혼자 60경기(선발 44경기)에 등판해 완투만 36번을 했던 ‘철완’이었다. 김시진과 나란히 25승씩을 거둬 ‘50승 합작 원투펀치’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가 어둠의 세계에 빠져 들었고, 2005년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하우스에서 숨진 채로 발견돼 한국 야구계에 충격을 안겼다.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1982 World Baseball Championship Series) 우승 후 어우홍 감독을 헹가레치고 있는 선수들 / 일간스포츠
한국 야구사에 잊지 못할 명장면을 남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 가운데서도 벌써 6명이 하늘로 떠났다. 장효조와 최동원은 물론, 심재원 김진우 김정수 조성옥 등이 모두 이 세상에 없다. 역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로 평가받았던 심재원은 LG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1994년 5월에 폐암으로 눈을 감았다. 김진우는 삼미, 청보, MBC에서 공격형 포수로 활약했지만, 은퇴 후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2008년 세상을 떠났다. 김정수는 MBC 시절이던 1986년 11월 병역특례 보충역 훈련을 마치고 김경표, 안언학과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다 시내버스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김경표는 당시 목숨을 건졌지만, 1989년 다시 교통사고를 당해 끝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조성옥도 동의대 감독 시절인 2009년 7월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뿐만 아니다. 1982년 원년 개막전에서 MBC 선발투수였던 이길환은 2007년 6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던 삼성 선발투수 황규봉도 갑작스러운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2개월 만인 2016년 1월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당시 MBC 포수였던 김용운도 2005년 12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프로야구의 출범을 함께한 스타들도 안타까운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 교통사고와 병마가 그들을 데려갔다
해태의 기둥투수로 주목 받았던 김대현은 1988년 승용차로 광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다가 변을 당했다. 천안휴게소에 들어서는 순간 화물트럭을 들이받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조수석에 있던 이순철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안전벨트를 맨 상태라 화를 면했다. 휘문고 시절 공주고 박찬호에게 3연타석 홈런을 날려 유명해졌던 LG 박정혁은 은퇴 후 개인 사업을 하다 1999년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고, 광속구로 이름을 날렸던 롯데 출신 투수 박동희도 2007년 3월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임수혁의 쾌유를 비는 묵념을 하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에 대한 보도를 한 당시 신문 / 스포츠조선
그런가 하면 해태 김상진은 22세의 젊은 나이였던 1999년 6월 위암으로 숨을 거둬 동료들과 팬들을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다. 롯데 임수혁은 2000년 경기 도중 그라운드에 쓰러져 뇌사 판정을 받은 뒤 10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2010년 2월 끝내 운명했다. 한화 진정필은 은퇴 후 아마추어 지도자 생활을 하다 2003년 7월 백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안타까움을 남긴 선수들도 있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 결번(54번) 선수인 OB 김영신이 그랬다. 그는 1984년 LA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듬해 OB에 입단했지만, 프로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1986년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그의 시신은 잠수부를 동원해 수습했다. 경찰은 급류에 휘말려 변을 당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성적비관으로 인한 자살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OB는 영구결번 지정으로 그를 애도했다. 빙그레 2군 투수였던 권근한도 1995년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2004년 12월에는 현대 입단 예정이던 서울고 임효상이 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 한국 야구와 인연을 맺었던 인물들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국 야구와 인연이 깊었던 인물들의 사망 소식도 큰 슬픔을 안겼다. 대만 프로야구의 쉬성밍 감독은 2013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쉬 감독은 그해 8월 24일 슝디전을 끝낸 뒤 귀가해 부인과 산책을 하다가 돌연 쓰러졌고, 그대로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쉬 감독은 대만 문화대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야구 유학을 왔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5년을 뛰었다. 1988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2개 리그 6개 팀 감독을 역임하고 통산 715승을 올렸다.
▲ 한국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투수로 활약하던 당시의 쉬성밍(徐生明) / 엠스플뉴스
2003년 11월에는 대만 야구 대표팀을 이끌고 2004 아테네 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린 일본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해 한국을 5-4로 꺾었다. 한국은 ‘삿포로 참사’의 충격과 함께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쉬 감독은 사망 당시 대만팀 이따 시니우를 이끌고 있었다. 매니 라미레스를 영입해 전반기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최종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대만 야구계도 깊이 애도했다.
그런가 하면 한화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호세 카페얀은 2015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카페얀은 2010년 한화에 입단했지만, 불운과 부진이 겹치면서 단 1승도 챙기지 못하고 11패만 남긴 채 한국을 떠났다. 이후에는 도미니카 윈터리그와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에서 뛰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메이저리그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사망 직전 해에 출전 기록이 없어 자살 의혹이 고개를 들었지만, 카페얀의 아내는 “최근 수면제를 많이 복용했던 게 원인인 것 같다. 절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2004년과 2005년 롯데에서 활약한 외국인선수 이시온(마리오 엔카르나시온)은 2005년 대만에서 뛰다 금지약물 과다복용으로 심장발작을 일으켜 숨졌다.
▲ 호세 리마의 사망소식을 전한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캡처
한국 프로야구 역대 외국인 투수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던 호세 리마도 2010년 5월 미국 패서디나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한 채 발견됐다. 리마는 1999년 21승을 올려 그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투수였다. 메이저리그 통산 89승을 올린 뒤 2008년 KIA에 입단했다. 그러나 정작 성적이 썩 좋지 않아 7월 웨이버 공시됐다. 이후 독립리그 생활을 하다 결국 생을 마감했다. KIA 시절 리마와 절친했던 에이스 양현종은 리마의 사망 소식 이후 완봉승을 거둔 뒤 승리 소감에서 리마를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273호]
메이저리그에선…레이 채프먼, 경기 도중 얼굴에 공 맞고 숨져
역사가 긴 메이저리그다.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로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1903년 세상을 떠난 ‘빅 에드’ 에드 델라헌티의 죽음은 끝까지 비밀이 풀리지 않았다. 델라헌티는 내야와 외야를 모두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였고, 19세기의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거포였다. 16년 동안 4할 타율만 세 차례 해냈고, 1899년에는 타율 0.410로 타격왕과 타점왕을 동시 수상했다. 그의 통산 타율 0.346은 메이저리그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945년에는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은 영광스럽지 않았다. 그는 1903년 7월 기차 안에서 위스키를 마신 뒤 면도칼을 휘두르며 승객을 위협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 일로 기차에서 쫓겨났다. 그 후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망 원인은 추락사였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명확하지 않아 의문이 커졌다.
레이 채프먼은 1920년 경기 도중 얼굴에 공을 맞고 숨졌다. 뉴욕 양키스 에이스였던 칼 메이스가 던진 몸쪽 높은 공이 타석에 서 있던 채프먼의 왼쪽 관자놀이를 그대로 강타했다. 타자들이 헬멧을 착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채프먼은 1루 쪽으로 발을 두어 걸음 옮기다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나 12시간을 버틴 끝에 다음 날 새벽 숨을 거뒀다. 경기 도중 공에 맞아 사망한 역대 최초의 선수였다. 이때부터 헬멧의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결국 16년 뒤 명포수 미키 코크란이 머리에 공을 맞고 은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헬멧 착용이 의무화됐다.
히스패닉계 야구선수들의 영웅인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1972년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클레멘테는 그해 12월 23일 강진이 발생한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 구호품을 보냈다. 그러나 부패한 관료들이 그 물품 일부를 중간에 빼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화물 수송기에 올랐다. 그 비행기는 12월 31일 클레멘테를 실은 채로 바다에 추락했다.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클레멘테는 이듬해인 1973년 바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메이저리그도 그해부터 사회 공헌에 앞장선 선수에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양키스 역사상 유일하게 MVP와 신인왕을 동시 수상했던 서먼 먼슨은 1979년 8월 자신의 경비행기로 착륙 연습을 하다 기체가 나무에 걸리면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빅리그 통산 82승을 올린 투수 코리 라이들도 2006년 10월 자신이 몰던 경비행기가 뉴욕 맨해튼의 한 콘도에 충돌하면서 자신과 비행교관이 모두 숨지는 비운을 겪었다. 사고 원인은 기체 결함으로 밝혀졌다.
스티브 올린은 1993년 보트 사고로 사망했다. 1992년 29세이브를 올리며 한창 상승세를 탔지만, 1993년 초 팀 동료들과 보트를 타고 놀러 나갔다가 만취 상태로 배를 몰아 부두에 충돌했다. 당시 함께 배에 올랐던 동료 가운데 팀 크루스도 올린과 함께 사망했다. 밥 오헤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후 충격에 빠져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세인트루이스 불펜 투수였던 조시 핸콕은 2007년 4월 자신의 차를 운전하다 갓길에서 사고 차량을 옮기고 있던 견인 차량을 들이받아 즉사했다. 부검 결과 혈중 알콜 농도 적정 기준의 2배가 넘는 수치가 검출됐다. LA 에인절스 유망주였던 닉 아덴하트는 2009년 4월 지인들과 차를 타고 가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온 음주 차량과 충돌해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루이스 유망주 오스카 타베라스도 2014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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