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7. 09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분노와 화염에 직면할 것.” (2017년 8월 8일)
“우리가 ‘즉각 비핵화를 시작할 것’이라고 적힌 합의문에 서명했다.” (2018년 6월 23일)
“이제 요리가 되고 있고 여러분은 행복할 건데 서두르는 것은 칠면조를 오븐에서 빨리 꺼내는 것과 같아 좋지 않다.” (2018년 6월 29일)
모두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은 대북제재 연장을 승인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자신의 케미가 너무 잘 맞는다고 얘기한다. 미군 유해가 송환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200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를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아무것도 시행하지 않았음에도 한미훈련을 중단한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 말만 듣고 있노라면 북한 비핵화가 엄청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국방정보국(DIA)이 6·12 미북정상회담 후 새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나서지 않고, 핵탄두와 관련 장비·시설의 은폐를 추구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최근 펴냈다고 6월 30일 보도했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의 핵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고 핵탄두와 미사일, 핵개발 관련 시설의 유형과 개수를 줄이려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DIA가 결론을 내렸다는 보도인데, DIA는 ‘강선(Kangson)’에도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을 파악했고 이곳의 농축 규모를 영변의 2배로 보고 있다고 한다. 이 보도가 신뢰가 가는 이유는 보고서가 지적한 북한 강선이라는 지역 때문이다. 강선은 평양에서 25㎞ 정도 떨어진 곳인데 여기에는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가 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라늄 농축을 통한 우라늄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원심분리기를 돌려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상당한 전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기존 공장 지역에 원심분리기를 위치시키는 것이 은폐와 전력 확보를 위해서는 당연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DIA 보고서는 매우 신빙성이 높다.
미국 NBC 역시 지난 6월 29일 미국 관리들 발언을 인용해 ‘최근의 대화 분위기 속에서도 북한이 핵무기를 위한 농축 우라늄 생산을 늘렸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추론해본다. 트럼프 대통령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키워드는 중간선거를 위한 ‘쇼’와 ‘돈’인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것을 돈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모양이다. 한미연합훈련도 돈이고 림팩(다국적환태평양훈련)도 돈으로 보이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어떻게 쇼를 할까 생각만 하는 듯하다. 여기서 손해란 트럼프 자신의 정치적 손해를 의미한다. 그러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 유권자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쇼의 피디와 사회자를 뽑은 셈이다.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 조선일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명실상부한 ‘21세기 술탄’으로 등극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6월 24일(현지 시간) 치러진 대선 1차 투표에서 52.6%를 득표해 2차 투표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은 42.7%를 득표해 과반을 확보했다.
터키는 지난해 국민투표를 통해 건국 이후 94년간 유지되던 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새로운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있고 중임 임기 중 대통령이 조기 선거를 실시해 당선되면 5년 임기를 추가 보장받는다. 이론적으로 계산해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권력의 정점에 머무를 수 있다. 또한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에게 의회 동의 없는 공직자 임명, 의회 해산권, 대법관 15명 중 12명 임명권을 부여한다. 기간만이 아니라 대통령 권한을 보더라도 술탄이라 부를 만하다.
에르도안이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이유, 그것도 과반 이상 득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는 이슬람 세속주의에 맞서 이슬람주의를 전면에 내걸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 민족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에르도안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 정부에 대항해 싸우는 시리아의 반정부 세력을 지지한다. 또한 에르도안은 국경지대에서 이슬람 수니파 과격 무장 세력인 ‘이슬람국가(IS)’ 전투 요원들과 전투를 벌이는 쿠르드인 돕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터키 내 무슬림으로 하여금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화와 터키의 강력함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에르도안은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지지 기반인 서민의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올해 들어 달러화 대비 20% 이상 떨어진 리라화 가치, 12%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 2014년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성장률 2.9%, 실업률 10%) 등으로 서민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는 나빠지는데 서민의 지지를 받는 아이러니가 지금 터키의 두드러진 정치적 특징이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 과대포장을 통한 ‘느낌의 창조’ 때문이다. 과거 제국 시절을 재현해 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과 과거에 비해 강력한 터키가 됐다는 느낌의 창출이 에르도안 대선 승리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 됐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지금 전 세계에서 집단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을 보여준다. 집단이성은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법치주의의 근간이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언사를 거리낌 없이 한다든지, 이성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사안을 ‘자신 있게’ 추진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미국과 터키의 사례를 보면 집단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정권 차원에서 벌이는 ‘쇼’를 꼽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국민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국민이 열광하는 것은 순전히 여론을 호도하는 ‘쇼’ 때문이다.
쇼를 통한 과대포장 혹은 여론의 오도는 그다지 오래갈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상품을 고를 때 포장이 잘된 상품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그런 상품을 사려고 한다. 그래서 제조사는 포장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다. 일부 품목은 포장이 너무 예뻐 그 제품을 구매하고 난 이후에도 일정 기간 포장지를 뜯지 않은 채 집에 모셔두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포장지 혹은 포장은 언젠가는 뜯어버리게 돼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포장이 너무 예뻐 물건을 샀는데 막상 포장을 뜯어보니 제품이 형편없을 경우 소비자는 실망한다. 질소과자가 그 좋은 예다. 봉지가 큰 과자를 살 때 소비자는 그 봉지 크기만큼 과자가 들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막상 봉지를 뜯었을 때 포장의 3분의 1 정도만 과자가 들어 있다면 실망은 커진다.
지금 미국 트럼프 행정부나 에르도안 정권의 경우가 바로 이런 질소과자 같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내용물은 형편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국민이 알아버리면 그때부터 국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지게 된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show must go on).”
이 말은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퀸의 리드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남긴 말이다.
쇼가 계속돼야 하는 분야는 예술이다. 정치는 되도록 쇼는 배제하고 내용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분야다. 정치에서 자꾸 쇼를 하고자 한다면, 이는 결국 스스로를 패배자로 만드는 길이다. 더구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과대포장하는 쇼를 한다면 반드시 피해자가 생긴다. 예를 들면 지금 트럼프가 벌이는 쇼에서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66호 (2018.07.11~07.17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