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내가 읽은 좋은 시조
저물녘, 붉은 시
-캄보디아 와트마이 사원에서
김덕남
켜켜이 쌓여 있는 수천의 저 백골들
뻥 뚫린 눈과 코로 일제히 나를 본다
묵념도 사치스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이념이 돌아선 날 먹물 든 게 죄였을까
능숙한 칼잡이는 동족이 아닌 것을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내 허울이 저리다
저 백골 잠들 수 있게 커튼을 내려다오
그림자 드리우는 백골 탑 무릎 아래
노을도 울컥 젖는다, 저물녘이 온통 붉다
- 『거울 속 남자』 김덕남시조집, 2020
박경화 추천의 말
2015년 6월, 작은아들과 함께 첫 해외 여행지로 간 곳이 캄보디아의 앙코 르와트였다. 4박 5일 동안 자유여행을 하면서 그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섬뜩했던 곳이 바로 '작은 킬링필드 와트마이 사원'이었다. 층층이 쌓아 놓은 해골들이 쇼윈도의 장식품처럼 전시되어 있다. 뻥 뚫린 두 눈으로 쏘아보는 것 같아 소름이 확 끼치면서 한편으로는 슬픈 일이었다. 나는 너무나 끔찍해 서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악몽을 꾸듯 바라보았다.
당시 캄보디아는 프랑스에서 독립하고 난 후 이념의 대립과 쿠데타로 내전이 끊어지지 않았다. 와트마이사원은 공산당 조직인 크메르루주군의 대학살 당시 희생된 유골을 모아 둔 곳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량 학살은 부유층, 지식인 할 것 없이 막무가내로 총부리를 들이대었다고 한다.
작품의 첫째 수에서는 그런 감정을 지긋이 짓누르면서 눈에 보이듯 담백하게 그려 놓고 있다. 묵념조차 사치인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노라고, 읽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끌고 간다. 제주 4.3 사건이나 노근리 양민학살의 잔혹한 실상을 잘 알기에 더 가슴 저리게 다가왔을 것이다. 마치 내 죄인 양 그 허울을 벗기려고 한다. 이제라도 잠들 수 있게 제발 커튼이라도 좀 내려 주라고 저녁이 온통 핏빛으로 물이 들도록 피를 토한다.
- 《시조21》 2021.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