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리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김해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을 개창한 김수로왕(金首露王)이며, 중시조는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 장군이다. 김해김씨는 김유신 장군을 중시조로 하여 대소 146
파로 분파되었는데, 대전리 하대마을의 김해김씨는 김관(金管)을 파조로 하는 삼현파(三賢
派)이다. 김관은 고려 충목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을 판도판서
김해김씨 염수재(念修齋, 위치 : 대전리 하대)
공파라고 하며, 조선시대에 극일(克一), 일손(馹孫), 대유(大有) 등 세 명현이 나왔다 하여 삼
현파라고도 한다.
영남의 청도 일대에 살고 있었던 김해김씨 삼현파가 호남에 들어오게 된 것은 김일손의 양
자(養子)였던 대장(大壯) 때이다. 대장은 원래 김일손의 형인 김준손(金駿孫)의 둘째 아들이었
으나 김일손이 후사가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무오사화로 참혹한 가화(家禍)를 당해 생
부와 백형인 대유(大有)와 함께 호남지역에 유배되었는데, 중종반정 이후에도 그대로 남원에
거주하였다. 이후 대장의 아들 장()도 남원에 거주하였으나, 손자인 치삼(致三) 때에 청도로
돌아갔다.
이후 삼현파의 일부가 다시 남원으로 들어왔다. 치삼의 증손 성서(聲瑞)가 종숙부 득( )을
따라왔던 것이다. 성서의 묘가 주천면 수래치(水來峙)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성서가 들어온 곳
은 남원의 주천면 일대이며, 입향 시기는 1700년 전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성서가 활동하던
시기가 이후 아들 14세 태장(兌章)과 손자 15세 정혁(挺赫)도 묘가 모두 남원 송치(松峙)에 있
는 것으로 보아 남원 주천면에서 세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삼현파가 구례 대전리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정혁의 아들 16세 현언(顯彦) 때이다. 배위는 밀
양박씨 성학(性學)의 딸이었다. 입향 시기는 현언이 영·정조 때에 살았고, 아들 재의(再義)가
1778년(정조 2)에 태어났으므로, 대체로 1700년대 후반기로 추정된다.
대전리에 들어오게 된 김해김씨 삼현파는 현언의 아들 재의(再義)와 손자 국안(國安) 대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대전리에 정착하였다. 재의가 국안과 국경(國慶), 국우(國禹), 국흥(國興),
국형(國亨) 등 5형제를 두어 이들의 후손들이 마을에서 번창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구례 용방면과 광의면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 5형제의 후손들이‘광룡종친회(光龍宗親會)
를 결성하여 위선(爲先)사업을 비롯해서 효행이나 선행 표창, 종친간의 상부상조하는 일을 주
도하고 있다.
대전리의 김해김씨는 종손을 중심으로 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내에 문중 제
각인 염수재(念修齋)를 건립하여 묘사를 비롯해서 각종 문중의 일을 논의한다. 묘사는 염수재
에서 하루 전날 제수를 장만하여 다음날 산소에 가서 지낸다. 종손인 김종식 씨를 기준으로
남원 입향조인 10대조 성서와 할머니, 8대조 할머니는 10월 9일 남원시 어현동 선산에서 지내
고 비가 오면 망배를 한다. 그리고 9대조 태장과 8대조 정혁, 7대조 현언, 6대조 재의, 5대조 국
안은 음력 10월 11일 염수재에서 제사를 지낸다. 묘사 때에는 경향 각지에 흩어져 있는 후손
들이 참여하며, 11시경에 모시고 있다. 국안을 제외한 4형제와 4대조까지 지내는 기제사는 집
안에서 지내고 있다.
광의면지(광의면홈페이지) http://www.gurye.go.kr/gwangui/guide/07/index.jsp
구례군청(광의면지) http://www.gurye.go.kr/pro/ebook/03/index.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