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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에도 정릉으로 가던 골목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다. 이후 이 동네는 자연스레 일상으로 돌아오게 됐고 현재는 서울의 여느 동네와 다를 바 없는 동네로 돌아왔다. 정릉으로 향하는 길은 지하철을 갈아탄 뒤 끊이지 않고 오르막길의 연속이었으며 언제 도착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왼쪽 방향에서 벅찬 호흡을 위로라도 하는 듯 저 멀리 정릉의 원찰로부터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표소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오며 능역이 보이기 전 바로 옆에 덩그러니 복원 공사가 끝난 산릉제례 당시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 복원되어 있었고 몇 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와는 다르게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계절의 매력을 가득 담은 채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 오늘도 어김없이 정릉 벤치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와중이었다.
1. 상반된 분위기
덩그러니 놓인 전각들 그 위로 잔잔하게 흐르는 구름은 정릉의 분위기를 상당히 평화롭게 만들어줬다. 시대의 변곡점을 살아냈던 그녀의 일대기를 그리며 이곳을 찾았던 나에게 적막감과 불쑥 들어온 분위기가 마치 부처님의 자애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했고 지나간 나날들은 잠시 뒤로한 채 이곳까지 찾아온 날 반가운 미소로 반겨주고 있었다. 그 환대에 화답하려 가방을 내려둔 채 자리에 앉아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본다. 흐르는 땀방울은 마르고 사라진 채 남은 자리에 다시금 활기가 돌았다.
코로나로 인해 본래 시민에게 개방된 정릉 내 도서관 건물은 굳게 닫혀 있었고 복원이 끝난 건물들만 온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는 고요함과 어우러진 채 한옥 특유의 정취를 맘껏 뽐내고 있었고 건물 출입구에는 정릉 산책길을 즐긴 뒤 돌아가기 전 에어건으로 신발을 정리 정돈할 수 있는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아담한 크기와 정갈한 한옥 특유의 선이 한번 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여말선초, 그녀가 살아왔던 시기는 4글자로 정의할 수 있다. 공민왕이 자주 개혁을 내세우며 쌍성 총관부를 탈환했으나 차던 달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기울던 시기. 이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이곳의 주인은 이성계를 만났으며 1392년 조선이 문을 열면서 최초의 왕비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골육상쟁의 단초를 제공하며 죽어서도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시기에 따라 극과 극이 분명했던 삶이었기에 그리고 태조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였기에 같은 중전의 자리에 있던 당사자라도 이곳에 깃든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과도기를 지나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왕조의 실체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들은 어느새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매김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된 그녀의 이야기는 사극과 각종 매체를 통해 소비되며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는 머무는 동안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며 나의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줬다. 지난 가을날 정릉을 찾았을 때 눈으로 담았던 빛 내림이 잊혀지질 않는다.
바람의 흐름에 따라 구름과 맑은 하늘의 변화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을 때 정릉 주변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들께서 한가로이 순간을 즐기고 계셨다. 여름에서 서서히 가을로 넘어가고 있을 시점에 따갑게 내리던 햇빛을 간간히 막아주면서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반가운 순간이다. 웅장함과 경 외로움과는 조금 거리를 둔 채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친숙함과 정자각 뒤쪽에서부터 발산된 색의 편안함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줬다. 주변을 둘러싼 채 도시의 소음들을 완벽히 차단시키며 외부로부터 독립된 공간감 또한 좋았다.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고 계시는 분들 덕분에 흔히 생각하는 그 무덤의 이미지와는 많이 상반된 분위기가 자연스레 연출된다. 좀 더 활발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릉 뒤쪽으로 조성된 산책길을 거닐며 산뜻한 풀내음도 함께 즐길 수도 있었고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볼 때 눈과 카메라에 담긴 편안한 장면들이 참으로 좋았다. 서울 곳곳에 자리한 고궁들과는 또 다르게 시민들의 일상과 잘 어우러진 그 자체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이 순간과 공간이 멀게나마 느껴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2. 경처
신덕왕후는 고려 시대 권문세족 집안 출신이다. 유력 가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당시 신궁이자 불세출의 무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는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우물가에 있던 한 여인에게 물을 떠주기를 청하며 이에 그녀가 물 한 바가지에 버들잎 한 줌을 띄워 줬다.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나무라며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묻더니, 냉수를 급하게 마시다 탈이 날 것을 대비해 버들잎을 불어 천천히 마시라는 뜻으로 그리 했다고 답을 한다. 이에 이성계는 그녀의 지혜와 미모에 푹 빠져 혼인까지 이르게 되니 그녀가 바로 신덕왕후 강 씨다.
당시 함경도를 근거지로 삼은 이성계는 향처로 신의왕후 한 씨를, 개경에는 신덕왕후 강 씨를 반려자로 삼게 되는데 이를 '경처'라 부르게 된다. 고려시대 당시 지방의 호족들을 견제코자 일정기간 그들을 개경으로 불러 생활하게 했던 제도 때문에 만들어진 풍습이다. 이후, 이성계는 처가의 도움을 받아 개경 중앙 정계로의 진출에 성공하고 변방과 전장을 돌며 쌓았던 명성을 중앙으로 가져오며 본인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성공이었지만,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당시 이성계는 요동 정벌과 관련하여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우왕과 최영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으나 묵살당한 뒤 정벌군과 함께 요동으로 향하게 된다. 이후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며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리며 고려 왕실과 조정에 칼을 겨누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경에 남은 식솔들이 걱정됐던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이방원에게 연락을 취해 대피시킬 것을 알리며 신덕왕후를 포함해 개경의 가족들을 경기도 이천으로 무사히 옮기는 데 성공하며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숨죽여 기다린다.
이후 이성계의 군대가 개경을 접수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후 우왕과 최영은 숙청당했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들과 왕조의 수명을 연장시켜보려는 수많은 신료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이후 우왕과 창왕이 고려 왕 씨의 후손이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 여기며 재위를 오랜 기간 지키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그 뒤를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이어받게 된다.
공양왕 당시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던 정몽주를 본인의 편으로 돌리려 했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하며 고려는 그 국운을 다하게 된다. 이후 이성계는 '감록 국사'라는 자리에 오르며 대비로부터 옥새를 전달받은 뒤 바로 다음 날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왕에서 내려온 공양왕은 원주로 쓸쓸하게 유배를 떠난 뒤 이후 왕세자와 함께 교살당하며 객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신덕왕후 강 씨는 새로운 나라가 문을 열게 됨에 따라 조선 최초의 왕비의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본래 함경도에 향처가 있었지만 개국 1년 전에 세상을 뜨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정리된다. 한 차례의 위기를 겪긴 했지만 잘 넘긴 뒤 중전의 자리까지 오른 신덕왕후. 더불어 그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을 연 '태조'가 버티고 있었기에 그녀의 권세와 위상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말 그대로 '탄탄대로' 그 자체였다.
3. 신덕왕후
조선 최초의 왕후로 들어서게 된 뒤 신덕왕후는 슬하에 2명의 왕자와(방번, 방석) 1명의 공주(경순 공주)를 두게 된다. 이후 신덕왕후는 정도전과 손을 잡고 본인의 자식을 이성계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왕자들과의 갈등의 골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다. 이성계와의 돈독한 관계 덕분일까? 결국 의안대군 방번이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 신덕왕후는 그 소원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보다 유약하고 여렸던 왕세자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얼마 되지 않아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눈을 감을 때까지 본인 소생의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전한다. 살아있을 당시 최고의 길만 걸어왔던 그녀는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지만 살아생전에 남겨놓은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결국 골육상쟁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후 왕세자 방번의 입지가 자연스럽게 좁아지게 되면서 하루하루가 위태롭게 됐고 태조는 이를 비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된다.
이후 태조는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에서 그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정동 자리에 신덕왕후의 릉을 조성한 뒤 이를 '정릉'이라 불렀다. 오늘날 덕수궁 주변에 자리해 있었으며 정동의 한자와 정릉의 한자를 확인해 보면 똑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상당히 약해진 왕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태조의 의미도 담겨 있었으며 신덕왕후의 존재를 부각하고자 하면서도 그녀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자료들을 살펴보면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죽어서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마치 무굴제국의 타지마할에 얽힌 샤 자한과 뭄따즈 마할의 이야기를 보는 듯했고 멀리서 봤다는 그 모습들이 아련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신덕왕후의 3년 상과 관련해 몸이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정을 충실히 행하던 이성계도 결국 병이 들자 회복을 위해 몸져누웠고 이때를 틈타 쌓이고 쌓인 갈등이 터져 제1차 왕자의 난이 터져버린다. 몸져누운 왕의 입장에서도 보이지 말아야 할 비극의 골육상쟁이 일어나버렸고 정안군은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왕세자 의안대군과 방석을 사로잡은 뒤 저세상으로 보내버린다. 신덕왕후와 이성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돼 버렸고 갈등을 봉합한 뒤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도 진압한 뒤 조선의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4. 수난 그리고 복권
왕의 자리를 차지한 뒤 태종은 성 안에 자리한 정릉의 이장을 명했고 오늘날 덕수궁 자리에 있던 능역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뒤 오늘날 성북구 정릉의 자리로 모시게 된다. 당시 정릉을 지키던 석조물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 청계천 광통교 복원 공사에 사용하게 하였고 그 흔적은 오늘날 청계천 광통교 자리를 지나게 되면 천 아래 세밀하게 새겨진 문양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땅 아래 있었기에 그 온전한 모습을 운이 좋게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방원은 종묘 정전에서도 신덕왕후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기일이 되면 이성계의 체면을 생각해 제사는 지내되 왕후의 예가 아닌 후궁의 예로 한 단계 격하시켜 거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1669년에 이르러서야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현종이 이를 가납 함으로써 그녀의 위패는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묘역도 본래의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1669년 8월 5일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이를 보고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본래의 자리를 되찾기 까지 268년이 걸린 셈이다.
살아생전에 무소불휘의 권세를 누렸던 그녀도 눈을 감은 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권력의 그 냉혹한 본질을 이겨내지 못한 채 달이 저물고 떠오르는 태양에게 잠식당했으며 오랜 세월 예기치 않은 핍박을 견뎌야 했다. 더불어 조상을 그 누구보다도 잘 모셔야 했던 시대적 정신을 담았던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었기에 그 모습을 생전에 병석에 누워 눈앞에서 바라만 봐야 했던 태조의 모습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수백년의 시간이 지난 뒤 정릉 가장 높은 곳에서 영면에 든 신덕왕후의 모습은 너무나도 편안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해 변을 당할 일도 없을뿐더러 가끔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안식처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릉에서의 시간을 마무리 한 뒤 수복방 주변에 앉아 맑은 하늘을 눈에 담아 본다. 하루하루 바삐 돌아가던 일상에서 벗어나 찰나의 휴식이 꿀 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