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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 나라 브라질
이 현 진 명예교수(사범대학 유아교육과)
오랜만에 M과 통화하던 중 17년 전에 함께 갔던 멕시코 얘기가 나왔다. 그때 난 멕시코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멕시코에서 느꼈던 감흥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M은 멕시코를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 이상했다. 그래서 M에게 어떻게 그토록 기억 못 하는지를 다그쳤다. M은 17년 전 멕시코에 가기 전에 브라질을 갔었는데, 브라질 도시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해서 멕시코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M의 이 대답과 7년 전에 남미 여행 시 이구아수 폭포를 못 간 것에 대한 아쉬움이 브라질 여행을 촉발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라 브라질, 친숙한 이름의 나라지만 생각해 보니 그 나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마존 열대우림, 축구로 유명한 나라 그 정도, 브라질 여행 전에 브라질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서 브라질 역사를 가볍게 살펴봤다.
투피-과라니계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브라질은 1500년도 포르투갈 탐험가 카브랄(Cabral)에게 발견되면서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초 유럽 곳곳이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침략당할 때 포르투갈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르투갈 왕실은 나폴레옹 군대가 침공하자 저항하는 대신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도망하였다. 이때가 1808년이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포르투갈 왕실은 1821년 황태자 페드루(Pedro)를 남겨놓고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남겨진 페드루는 황제로 즉위하며 1822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식민화된 것도 독립한 것도 모두 포르투갈에 의해서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그 후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고 노예제도 폐지요구 등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면서 1889년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공화제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에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어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여러 번의 또 다른 쿠데타에 의해 정권이 계속 교체되다가 1985년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이런 파란만장한 브라질 역사를 들여다보니 우리나라만이 격동의 시기를 겪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흔을 눈앞에 둔 나이에 브라질 여행을 꿈꾸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감행하기로 했다. 우선 브라질 여행 동반자를 구해야 했다. 이것은 쉽게 해결되었다. 최근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대학 친구와 미국에서 교수하고 있는 대학원 후배에게 얘기하니 둘 다 반갑게 수락해 주었다. 예순이 넘은 세 여자가 감히 꿈꾸는 브라질 여행! 막상 가려니 생각할 게 많았다. 너무 먼 나라였다. 또 너무 넓은 나라였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것도 또 다른 걱정거리였다. 우선 장소 선택부터 해야 했다. 브라질은 남미에서 가장 넓은 나라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이 넓은 나라에서 제한된 일정 안에 여행 장소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브라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아마존이지만 이곳은 과감히 포기했다. 20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이곳까지 넣는 것은 무리였다. 브라질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이구아수 폭포를 중심으로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고려하며 여행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결정한 코스를 브라질 지도에 표시해 보니 ‘鳥足之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1 브라질에서 다녀온 장소
여행계획을 짜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천천히’, 그리고 ‘무리하지 않기’였다. 하지만 이 다짐은 시작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5월 어느 날 인천공항에서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시간 정도 지나 LA 공항에 도착했다. ‘무리하지 않기’를 실행하기 위해 도착한 날 여행 동반자인 후배 집에서 묵었다. 다음 날 12시경에 비행기를 타고 중간 경유지인 댈러스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경, 댈러스에서 2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상파울루행 비행기를 탔다. 10시간 정도 걸려 상파울루 과룰류스 공항에 도착해, 공항에서 4시간 이상을 기다렸다가 '포즈 두 이구아수(Foz do Iguazu)' 행 비행기를 탔다. 이구아수 공항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미국에서 이구아수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을 계산해 보니 19시간 정도였다. 이 대단한 여정을 예순이 넘은 세 여자가 감당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브라질 치안이 불안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차라 위험요인을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가이드를 미리 섭외해서 공항에서 픽업부터 가능하게 계획을 짰다. '포즈 두 이구아수' 공항에 도착하니 섭외해 둔 가이드가 피켓까지 들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풀숲 사이로 구불거리는 좁은 시골길을 지나니 낮은 건물들이 어우러진 소도시의 거리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브라질은 험할 것이라는 걱정을 비웃기나 하듯이, 여행의 시작인 '포즈 두 이구아수'는 시골 정취가 가득한 정감 가는 소박한 도시였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이구아수 폭포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고대하던 이구아수 폭포로 출발한다. 폭이 3km, 높이가 80m 이상이 되는 폭포가 275개나 되는 이구아수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다. 가끔 두 곳 중 어느 곳을 보는 것이 좋은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답은 절대로 두 곳을 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이란 그 먼 나라까지 가서 어느 한쪽만 보고 온다면 아름다운 조각상의 반만 보고 오는 아쉬움을 갖게 될 것이다. 브라질 쪽에서는 폭포의 탁 트인 전망과 광활한 풍경을 볼 수 있고,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폭포에 더 가까이 다가가 폭포의 강렬하게 몰아치는 힘을 체험할 수 있다.
오늘 일정의 첫 번째 장소는 이구아수 폭포가 있는 브라질 국립공원이다. 1939년에 조성된 브라질 국립공원에는 이구아수 강기슭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1.2km에 달하는 이 산책로로 들어서면 사진에서 많이 보던 아기자기한 폭포들이 눈에 들어온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물보라와 무지개는 덤으로 즐길 수 있다. 이 산책로는 폭포의 가장 장관을 이루는 악마의 목구멍(Devil’s Throat) 아래에서 끝난다. 악마의 목구멍은 이구아수 폭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한 감동을 주는 곳이다. 악마의 목구멍의 장관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 쪽으로 가야 하지만 브라질 쪽에서도 약간의 간을 볼 수 있다. 악마의 목구멍 가까이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강 한가운데로 나가면 초입에서 보았던 아기자기한 모습 대신 분노를 토해내듯이 내뿜는 거세고 웅장한 물줄기로 어느 샌가 바뀌어 있다. 이 산책로 끝에서 거센 물줄기 파편에 무방비 상태로 몸을 맡기면서 이 광대하고도 눈부신 광경에 흠뻑 취해 볼 수 있다.
그림 2 브라질 국립공원 입구에서 본 이구아수 폭포
그림 3 악마의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다음날 아르헨티나 쪽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국경을 넘는 절차는 비교적 간단했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은 브라질 국립공원보다 산책로도 다양하고 볼거리가 많다고 알려져 있기에, 가능하면 여러 산책로를 걸으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폭포를 감상하고 싶었다.
아르헨티나 쪽 폭포를 보기 위한 출발점은 카타라타스(Cataratas)역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 입구에서 카타라타스역까지 기차가 30분마다 운행되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낮은 산책로(Circuito Inferior)와 높은 산책로(Circuito Superior)로 진입할 수 있다. 낮은 산책로를 걷다 보면 브라질 국립공원에서 멀리 보았던 아기자기한 폭포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높은 산책로로 올라가면 강에서 모여든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1986년에 개봉한 영화 미션(The Mission)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림 4 낮은 산책로에서 본 이구아수 폭포
그림 5 높은 산책로에서 본 이구아수 폭포
카타라타스 기차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리면 악마의 목구멍으로 향하는 산책로가 시작된다. 한동안 철제 다리의 유실로 악마의 목구멍으로 갈 수 없다는 여행객들의 아쉬움에 찬 원성을 들었던 차라 이 산책로의 재개는 행운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세찬 물줄기가 온몸을 부딪친다. 눈을 들어 보니 악마의 목구멍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구아수 폭포에서 최고의 절정은 여기서 보는 악마의 목구멍이다. 2km 정도의 높이에서 U자형 틈새로 우렁찬 굉음과 함께 맹렬히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자연의 절대적인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악마의 목구멍이란 이름에 걸맞게 분노를 뿜어내는 듯이 맹렬하게 퍼붓는 물줄기가 부딪쳐 일으키는 물보라를 흠씬 맞으며 바라보는 이 장엄한 광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억 속에 꼭 붙잡아 놓고 싶었다. 악마의 목구멍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뒤로 역으로 내려오니 너구리과에 속하는 콰티(Coati)와 매혹적인 색을 입은 다양한 새들이 반겨준다. 국립공원은 이과수 폭포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열대우림과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기에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림 6 악마의 목구멍
그림 7 콰티 (Quati)
그림 8 영롱한 색의 새
파라티 (Paraty)
다음 여행지는 파라티다. 브라질에서 가야 할 곳을 구글에서 찾았을 때 목록에서 2번째로 올라와 있던 곳이었다. 생소한 곳이었지만 식민지 시대의 도시라는 역사성도 있고 해안 도시라는 점에도 끌렸고 또한 리우데자네이루를 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이어서 중간에 들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가려니 교통이 편치 않았다. 비행기로 갈 수 없었고 육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포즈 두 이구아수로부터 육로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포즈 두 이구아수에서 상파울루까지는 비행기로 가고 상파울루에서부터 육로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상파울루 과룰류스 공항에서 파라티까지 가는 밴을 이용할 수 있었다. 파라티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그 밴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밴이 출발하자 피곤이 몰려왔다. 한참 졸다 보니 밴이 경사가 심한 비탈진 산길을 따라 브레이크를 열심히 밟으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상파울루의 고도가 이처럼 높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시간쯤 지나 파라티에 도착했다.
숙소가 있는 역사지구(Centro Historico)로 들어갔다. 정말 작은 도시였다. 포즈 두 이구아수보다도 작았다. 조약돌이 깔린 구시가지 바닥은 굴곡이 너무 심해서 자동차가 속도를 내지 못했다. 걷는 것이 빠를 정도였다. 웬만하면 바꿀 만도 한데 17세기 도시가 조성될 때 깔았던 도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단다. 구시가지의 건물들은 매력적이었다. 흰색 벽에 다양한 색상의 문틀, 격자 창문, 약간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장식들은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브라질 식민지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도시의 역사는 17세기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르투갈인들이 인근 미나스 제라이스 지역의 금을 수출하기 위한 항구로 설립한 것이 그 기원으로 식민지 시대에는 금과 기타 물품을 유럽으로 운송하는 주요한 항구의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식민지 스타일의 건물과 교회가 남아 있다.
그림 9 역사지구 거리
그림10 조약돌길
그림 11 흑인 노예를 위한 교회
위 교회는 흑인 노예들을 위한 교회였단다. 금으로 치장한 다른 교회와는 달리, 너무도 단출한 장식과 흑인 성인상이 놓여 있는 내부 모습이 누구를 위한 교회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식민지 시절에는 흑인 노예나 원주민들을 위한 교회와 지배계층인 유럽계통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구별되어 있었단다. 교회에서까지 이처럼 철저히 차별적이었다는 것이 기독교의 위선을 보여주는 듯해서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림 12 보트여행
그림 13 골드 트레일
파라티는 그림 같은 해변과 수많은 섬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해안 도시이다. 그래서 보트 투어는 빼놓을 수 없는 놀거리 중 하나다. 해안에 나가면 보트 투어 호객 행위가 많은 것으로 보아 여행사들뿐만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투어도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전문 여행사가 제공하는 보트 투어를 선택했다. 이 투어는 인근 몇 개의 섬에 정박하여 수영, 스노클링, 카약 등을 즐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활동에 익숙한 외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즐기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던 우리는 다음번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파라티 인근에는 다양한 동식물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세라 다 보카이나 국립공원(Parque Nacional da Serra da Bocaina)이 있다. 이 공원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브라질 내륙에서 포르투갈로 금을 운반하기 위해 건설한 포장도로인 골드 트레일 (Gold Trail)이 남아 있다. 이끼에 뒤덮인 돌길은 사람이 걷기엔 무척이나 불편했다. 울창한 숲속에 있는 이 트레일을 걸으면서 식민 시절의 브라질을 상상해 보는 것도 이번 여행의 묘미 중 하나였다.
리우데자네이루 (Rio Dejaneiro)
다음 행선지는 리우데자네이루이다. 파라티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역시 자동차로 움직여야 했다. 상파울루에서 파라티까지는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기에 끊임없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산길을 내려왔다면 리우까지는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가는 길이기에 푸른 바다의 정취를 즐기며 갈 수 있었다. 파라티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가니 (물론 버스로 가면 시간은 더 걸린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독특한 형세의 산과 깊고 푸른 바다를 품은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코파카바나(Copacabana) 해변
리우의 치안이 안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코파카바나(Copacabana) 해변 근처로 숙소를 정했다. 숙소에서 몇 블록 걸어가니 코파카파나 해변이 나온다. 독특한 형세의 산과 황금빛 바다로 둘러싸인 코파카바나의 해변은 약 4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해변으로 나가면 Avenida Atlântica로 알려진 산책로를 중심으로 한쪽 편에는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과 초현대식 빌딩이 교묘하게 섞여 있고, 반대편 황금빛 모래사장에는 비치 발리볼 코트와 작은 노천 바들이 줄지어 있다. 코파카바나 해변은 자연의 아름다움, 문화적 활력, 레크리에이션 기회가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리우데자네이루를 상징하는 매혹적인 곳이다.
그림 14 코파카바나 해변
구세주 예수상(Christ the redeemer)과 슈거로프(Sugar Loaf)산
리우의 랜드마크라고 한다면 티주카 국립공원에 있는 코르도바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구세주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이다. 해발 710m의 산 정상에 세워진 30m 높이의 예수상은 해안가 도로를 지나다 보면 어느 방향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1922년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설계가 시작된 후 거의 10년 후에 개막된 아르데코 양식으로 조각된 세계에서 가장 큰 작품이다. 현대 인류가 만든 새로운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숲을 지나 220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는 듯이 양팔을 벌려 맞이하는 인자한 모습의 예수상을 만나게 된다. 예수상 주변을 돌면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리우시의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다. 또 다른 랜드마크는 슈거로프 산(Sugar Loaf mountain)이다. 케이블카로 올라가야 하는데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부족하다. 산을 둘러싼 해변과 그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고층 건물의 스카이라인은 숨 막힐 정도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림 15 구세주 예수상
그림 16 슈거로프산에서 내려 다 본 풍경
하지만, 많은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런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빈곤, 마약, 범죄, 계층 간 불평등의 많은 사회적 문제가 가려져 있다. 리우의 사회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파벨라로 불리는 빈민촌이라 할 수 있는데, 이곳이 리우의 관광지 중 하나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파벨라(Favella)
파벨라는 가파른 언덕에 조밀하게 형성된 주택 단지로 이곳의 주택들은 토지 소유권이 없고 법적인 허가 없이 지어진 것들이 많아 주택 환경이 불안정하다. 또 수도, 위생, 전기와 같은 기본 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고, 인구 밀도가 높고, 기본적인 인프라가 부족하다.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파벨라 안에서는 빈곤, 폭력, 범죄 등 사회적 문제에 쉽게 노출된다. 이번 여행 중 갑자기 큰 굉음이 들렸다. 놀라서 무슨 소리인지를 가이드에게 물으니 멀리 산등성이에 있는 파벨라에서 마약범들이 신호를 위해 쏜 총소리라고 하는 거다. 이런 얘기를 들으니 범죄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고 산 능선을 따라 들어서 있는 집들을 멀리서 보기만 했기에 이러한 어두운 면을 충분히 체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도시 이면의 이런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리우데자네이루는 전 세계 여행객을 사로잡는 여전히 매혹적인 도시이다.
그림 17 능선 따라 지어진 파벨라
그림 18 파벨라 건물들
셀라론 계단 (Selarón Steps)
칠레 출신인 조지 셀라론(Jorge Selarón)은 1990년부터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타일, 도자기, 거울 등을 조합해 리우데자네이루 산타 테레사 지역에 있는 노후된 계단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력한 색상과 다채로운 디자인으로 장식된 계단이 점점 늘어났고 이것들은 시각적으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작품에는 브라질 국기, 종교적 상징, 유명인의 초상화 및 수많은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림 19 셀라론 계단
그림 20 셀라론 계단 타일
그림 21 셀라론이 살던 집
셀라론은 계단을 예술적 걸작으로 바꾸는 데 20년이 넘는 시간을 바쳤지만 애통하게도 2013년에 그의 집 앞 셀라론 계단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셀라론 계단은 그의 독창적인 예술적 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요한 관광지로 계속해서 여행객과 예술 애호가를 끌어들인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Metropolitana Cathedral)
최대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뿔 모양의 거대한 이 성당은 12년의 공사 끝에 1976년에 개관되었다. 브라질은 규모로 승부를 거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예수상이나 대성당에서 받았다. 마주한 건물 벽면에 성당 모습이 반사되는 것은 특이했다. 이를 계획하고 빌딩의 벽 처리를 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니 60m에 달하는 아름다운 네 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천장의 십자가 창과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당 앞 벤치에 노숙자 조각상이 있었다.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이 조각상이 예수라는 말에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듯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마태복음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림 22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그림 23 건물에 비친 대성당
그림 24 노숙자 조각상
왕립 포르투갈어 도서관(Real Gabinete Portugues Da Leitura)
리우데자네이루 중심가에 있는 이 도서관은 왕립이라는 말에 걸맞게 고풍스러우면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나폴레옹 침입으로 포르투갈을 떠나야만 했던 지식인들이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이주하여 고국의 역사와 문학을 유지하기 위해 1837년에 설립한 도서관으로 역사적, 문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리우데자네이루는 정말 아름답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일정을 조금 더 길게 잡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 했다. 다음 여행지는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주의 주도(州道)인 벨루오리존치(Belo Horizonte)이다. 이 도시는 미나스 제라이스 여행에서 허브의 역할을 할 곳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이 미나스 제라이스주에 있는 오루프레투(Ouro Preto)였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루프레투를 가기 위해서는 벨루오리존치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은 인듯했다. 그렇게 일정을 잡다 보니 벨루오리존치까지 가서 오루프레투 한 곳만을 갔다 오기 아쉬웠다. 근처에 갈 다른 곳을 찾다가 이뇨칭(Inhotim)이라는 야외박물관을 발견하였다. 야외박물관이 다소 생소하기는 했지만 추천글을 읽다 보니 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벨루오리존치에 숙소를 잡고 거기에서 오루프레투와 이뇨칭을 하루씩 갔다 오기로 했다.
이 두 곳을 소개하고 설명해 줄 가이드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생각지도 않게 좋은 가이드를 만났다. 오루프레투 출신으로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가이드 Suelli의 도움을 받아 이 두 곳을 다녀왔다. 자신의 고향인 오루프레투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Suelli는 오루프레투, 더나나가 브라질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려 했다. 또한 이뇨칭에서는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심도 있게 설명해 주었다.
이뇨칭(Inhotim)
이뇨칭은 400만평이 넘는 넓은 열대우림 숲속에 조성된 야외미술관으로 800여 개 이상의 회화, 사진, 조각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숲속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잘 다듬어진 정원, 물보라를 일으키는 호수, 자연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다. 곳곳에 예술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독창적으로 지어진 갤러리들이 있는데, 이 갤러리들에는 전 세계 작가들의 회화, 사직, 설치 미술 등 다양한 양식의 독창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 내면의 문제, 빈곤과 같은 사회적 문제, 자연과의 조화와 같은 환경 문제들에 대한 작가들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애석한 점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없다는 것? 그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Claudia Andujar의 사진들이었다. Claudia Andujar는 브라질 아마존 열대우림에 사는 원주민 그룹인 야노마미족의 권리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유명한 사진작가이다. Andujar의 사진은 야노마미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 그들의 영적 믿음 등을 보여주며,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삼림 벌채 등으로 위협에 직면한 야노마미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상으로 물려받은 땅의 보존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야노마미족의 투쟁을 담은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인종 차별 및 환경파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림 25 이뇨칭 야외미술관
그림 26 Anduja의 야노마미족
오루프레투(Ouro Preto)
이뇨칭을 간 다음 날 고대하던 오루프레투로 향했다. 18세기 오루프레투 근처 산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유럽인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금광의 발견으로 부유한 도시가 된 오루프레투는 1897년 벨루오리존치로 옮길 때까지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주도였다. 검은 황금이란 의미의 ‘Ouro Preto’라는 도시 이름이 이곳이 식민지 시대 금광의 중심지였음을 잘 보여준다.
오루프레투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었기에 거리의 모습은 파라티와 비슷했지만, 규모가 컸고 건축물도 다양하여 볼거리가 많았다. 오루프레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만난 곳이 티라덴티스 광장(Place of Tiradentes)이었다. 미나스 음모(Inconfidência Mineira)라고 알려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도한 티라덴티스를 기리는 광장이다. 유럽 광장과는 달리 나무 한 그루 없이 건물만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티라덴티스 동상이 서 있는 이 광장은 조금은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미나스 음모 관련 문서를 들고 서 있는 티라덴티스 동상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해 준다.
미나스 제라이스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7세기까지 브라질은 세계 최대 금 생산국 중 하나였다. 특히 금과 귀중한 광물이 발견된 미나스 제라이스 지역은 포르투갈이 부를 축적하는 주요한 원천이었다. 하지만 17세기 말부터 금 생산량 감소로 세금으로 징수되는 금의 양이 줄어들자 포르투갈은 그러한 손실이 지역 주민들의 불법적인 세금 탈루 때문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강력한 통제법을 실시하여 할당된 세금을 내지 못 하는 주민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강압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같은 강압책은 식민지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저항은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한 지식인들이 포르투갈 통치에서 벗어난 자치 국가에 대한 염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갈망은 미국의 독립 쟁취로 더욱더 고취되었다. 이 움직임의 중심에는 치과의사이자 군인이었던 티라덴티스가 있었다. 1789년 티라덴티스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포르투갈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발각되었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결국, 티라덴티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1792년 4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미나스의 음모는 실패로 끝났지만, 식민지 시대 브라질 사회가 염원했던 자유, 사회 정의, 정치적 자율성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사후 티라덴티스는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되어 그가 처형당한 4월 21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오루프레투는 언덕의 지형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었기에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다. 좁은 골목길을 오르기도 내려가기도 하며 도시를 즐길 수 있었다. 오루프레투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가 많이 남아 있어 교회 탐방은 필수였다. 방문했던 교회들은 나름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며 식민지 시대 건축의 예술적 가치와 종교적 헌신, 그리고 그 시절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었다.
파라티 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루프레투 교회에서도 제단 중앙에 예수상이나 십자가 대신 어린 예수를 안은 마리아상과 성인상이 놓여 있었다. 열심히 찾지 않으면 교회 내부에서 예수의 흔적을 보기 어려웠다. 기독교의 핵심이 예수의 십자가라고 알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가서 본 어느 성당이나 교회의 제단 앞에 예수상이나 십자가 대신 마리아상만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브라질 교회가 왜 이런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은 초기 선교사들이 브라질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때 마리아의 헌신과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이들을 설득시키기 쉬웠기에 마리아 중심의 선교를 했고 이것이 브라질 기독교의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원주민의 관습과 혼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종교적 전통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인간의 본성인 모성보다 더 큰 무기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점은 교회들이 극명한 계급 간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기둥의 성모성당(Basilica of Our Lady of Pilar)은 오루프레투에서 가장 화려하고 상징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는 벽, 천장, 제단이 오루프레투 금광에서 생산된 400kg 넘는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기에 "황금 교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바로크 양식의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제단의 정 중앙에는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오루프레투의 찬란했던 황금시대의 부, 종교적 헌신, 그리고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던 이 교회는 유럽계통의 지배계층을 위한 예배 장소였다.
그림 27 기둥의 성모성당
그림 28 묵주의 성모교회
이와 대비되는 교회는 묵주의 성모교회(Igreja Nossa Senhora do Rosario)였다. 묵주의 성모교회는 오루프레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로, 아프리카 노예들의 예배 장소였다. 흑인 노예들의 예배 장소이어서인지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교회들과 달리 제단 장식이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였다. 제단 중앙에는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안은 성모상이 있었지만, 측면에는 흑인 성인의 조각상이 있었다. 이 교회는 아프리카와 브라질이 혼합된 종교적 특성을 보였다. 한 지역 내에서 인종 및 계급 간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식민지 시절의 교회 모습은 지금의 현실 속에서 교회 모습을 반추하게 해준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식민지 시대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식민지 시대의 주거 형태를 볼 수 있는 주택들, 조약돌이 깔린 울퉁불퉁한 거리의 오루프레투를 마지막으로 브라질 여행을 마쳤다.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몇 개의 도시만을 간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즐겼던 독특한 자연의 아름다움, 미처 알지 못했던 브라질 역사 속에서 느꼈던 공감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아쉽다면 환경의 쟁점에 놓여 있는 아마존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기후 변화를 체감하면서 아마존의 삼림 벌채가 주요한 환경파괴의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던 터라 그런 아쉬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또 다른 여행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브라질과 이별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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