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는 신천지 근처에 위치해 있다. 낡은 건물 1층에서 임시정부청사의 설립 배경과 그동안의 과정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건물 입구에 태극 문양이 걸려 있다. 임시정부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이곳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했던 곳이다. 건물 안에는 당시 모습을 재현한 사무용품과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다.
중국 항저우(杭州), 닝보(宁波), 하이옌(海盐) 등에 한국 역사 유적지가 남아 있다. 당시 상하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주요 지역으로, 열강들의 조계지가 있어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활동할 수 있었다.
상하이 자연박물관에서 찾아가기
지하철 13호선 자연박물관(自然博物馆) 역에서 신천지(新天地) 역으로 이동한다(10분/元3). 6번 출구에서 왼편으로 약 10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2019년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3·1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사건으로, 남녀노소는 물론 계층 구별 없이 전국적인 참여로 전개된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특히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외교 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즉,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집결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우표포털
일제에 맞서는 3.1 운동, 물산 장려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8.15 광복
1.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 제국을 병합한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 경찰을 이용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조선 태형령을 공포하여 한국인에게 태형을 가하였고, 식민 교육을 통해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했죠.
이에 맞서 우리 민족은 1919년 3.1 운동을 일으켜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를 세우려는 민족적 열망속에 민족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2. 민족운동의 전개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물산 장려 운동을 통해 민족 기업을 양성하고, 대학을 설립하려는 등 민족의
실력을 키워 독립을 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김원봉 등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거 활동을 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에 일제는 친일파를 양성하는 등
민족 분열을 꾀하였으나, 민족 운동가들은 이념과 계층을 초월한 협동 전선 단체로 신간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의 단결을 도모하였습니다.
3. 독립을 위한 노력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신사 참배, 황국 신민 서사 암송, 일본식 성명 사용 등을 강요했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여 우리 민족을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하고자 했으며,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인력을 수탈하고 쌀과 금속 등의 물자를 수탈했습니다.
그리고 징용, 징병뿐만 아니라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죠.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하고 한국 광복군을 참전시켰습니다.
4.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8.15 광복 이후 연합국은 우리나라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하고,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점령 통치를 하였습니다. 이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 한반도의 신탁 통치를 결정했는데,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좌우 합작 운동이
추진되었고 김구 등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전개했습니다.
[출처] 일제에 맞서는 3.1 운동, 물산 장려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8.15 광복|작성자 지오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