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5. 18
김정수의 진흥고, 조계현의 군산상고, 그리고 성준-유중일의 경북고와 박노준-김건우의 선린상고까지. 그 뒤로 십 수년간 한국야구를 주름잡았던 이름들이 앳된 얼굴로 그라운드를 누비며 환호성과 눈물로 그라운드를 적셨던 1981년은 고교야구시대의 황혼기이자 절정기였다. 그리고 그 절정의 에너지는 그대로 이듬해 개막한 프로야구 성장의 씨앗이 되고 거름이 되었다. 그 해, 3학년생 성준이 이끌었던 경북고는 고교야구 무대의 '메이저 전국대회'(대통령배, 봉황기, 청룡기, 황금사자기) 우승컵 4개 중 3개를 휩쓰는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2인자'로 새겨지고 말았던 것은 그들의 업적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거나, 누구 탓이라고 할 수 없는 야구라는 드라마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바로 그 해 눈물의 영웅으로 떠오른 박노준과 김건우의 선린상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노준에 가린 우승컵 3개 대구중학 시절부터 전국무대에 알려져 있었지만, 성준이라는 이름이 맨 윗줄에 놓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성준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선린중학 1학년 때 리틀야구 국제대회에서 당시로서는 '넘지 못할 벽'으로 여겨지던 대만을 깨뜨리며 등장해 선린상고 1, 2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투수' 윤학길과 선동열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는 경악스러운 행로를 걸어온 '천재' 박노준의 이름이 언제나 비교 불가능한 1등이었고, 그 다음 줄부터가 평범한 선수들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박노준은, 그 시절 또래 중에 '라이벌'로 생각했던 선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박노준을 라이벌로 생각했던, 아니면 목표로 생각했던 선수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중 가장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있었던 것이 바로 성준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3학년으로서 '마지막 승부'를 벌였던 1981년은 그 날카로운 날을 세워 휘둘렀던 한 해였다. 그 해 청룡기 결승에서 경북고는 연장접전 끝에 박노준을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하는 작은 이변을 연출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을 '선린의 불운'이자 '경북의 행운'으로 생각했고, 박노준이 이끄는 선린이 최강이라는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람들의 반응은 '한 번 더 붙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정도였다. 강했던 자의 강함이 증명되는 데는 한 판이면 충분하지만, 강해진 자의 강함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그 두 배의 증거가 필요한 법이다.
청룡기 결승에 이어 봉황기 결승에서도 맞붙은 선린-경북
▲ 성준이 공을 던지고 있다.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그래서 그 둘이 다시 한 번 맞부닥친 봉황기 결승은 그 해 고교야구의 최강자 결정전이었고, 야구팬들이 경험할 수 있는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 대회에서 박노준은 준결승까지 16이닝동안 단 한 점만 내주며 14개의 삼진을 뽑는 여유를 보여주었고, 성준 역시 20이닝동안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투구로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주한 결승전. 경북고의 선발로 등판한 성준은 1회부터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준결승까지 팀 경기의 절반 이상을 던져온 무리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친 긴장 탓이었는지 성준은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박노준을 비롯한 선린의 타자 여섯 명에게 안타와 볼넷을 내주며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구사에 길이 남을 반전이 나온 것이 그 다음 순간이었다. 선린의 6번 이경재의 안타 때 홈으로 파고들던 2루주자 박노준의 스파이크가 전날 비로 젖은 그라운드에 박히며 발목을 꺾어버렸고, 마지막 투혼으로 엉금엉금 기어 석 점째를 득점한 박노준은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 나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마운드에 서있던 것이 성준이었다. 중심을 잃은 선린은 더 이상 성준을 허물어뜨리지 못했다. 성준은 6회말까지 한 점만 더 내주며 버텼고, 7회부터 1학년생 잠수함투수 문병권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경북은 문병권의 독특한 투구폼으로 선린의 타선을 완전히 봉쇄했고, 8회 선린 내야진의 연속 실책과 집중안타를 묶어 거뜬히 경기를 뒤집어냈다. 결승전에서 떠오른 샛별 문병권 대신 최우수투수의 영광을 차지한 것은 그 대회를 이끌었던 성준이었다.
그리고 성준은 인터뷰에서 어떤 각오로 대회에 임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박노준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증거와 변명의 여지가 없을 두 번의 승리. 더구나 응원과 환호의 함성을 모두 1인자에게 빼앗긴 채 어둑한 곳에서 갈고 닦아 올린 감격적인 승리의 소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에 귀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송은 대신 박노준의 발목이 돌아가는 장면을 수십 번이고 되풀이해서 비추고 있었고, 사람들의 발길은 박노준의 병실로 이어졌다. 오히려 그 날의 경기는 성준과 경북고의 강함이 아니라 선린상고에서 박노준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증명한 사건으로 남고 말았던 것이다.
"박노준에게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 롯데 자이언츠 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성준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성준은 그 해 가을 황금사자기까지 휩쓸었지만, 세 개의 전국대회 우승컵보다도 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박노준의 발목 깁스였다. 그리고 박노준을 잡기 위한 연, 고대의 스카우트 전쟁이 남긴 자욱한 포연 뒤끝에서 성준은 한양대로 입학했고, 그곳에서 다시 선배 이상군과 후배 김종석의 사이에 끼어 별다른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졸업을 맞이했다. 1986년 프로야구는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이름값의 신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투수로만 보아도 우선 박노준이 있었고, 그 뒤로 각기 '2인자'로 불렸던 김건우, 김정수, 성준이 있었으며 대학에서 기량이 급성장한 한희민과 한 두 해씩 늦게 뛰어든 선배 윤학길과 이상군이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성준의 자리는 한참 뒤쪽이었다. 야수요원으로 선발된 박노준이 '역대 타자 신인 최고액'인 5천만 원으로 자존심을 지켰고, 윤학길과 김건우가 3천만원 가까운 계약금으로 대접을 받은 반면 성준에게 쥐어진 것은 여느 '2인자'들의 절반 수준인 1,500만원이었다. 그에 대한 기대치가 딱 그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일융의 부상을 틈타 선발진에 진입한 성준은 그 해 15승에 2.36의 훌륭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일약 에이스로 떠올랐고, 사람들 사이에서 '저 선수가 바로 5년 전 봉황기 결승에서 박노준 발목 부러질 때의 경북고 선발투수'라고 새삼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1인자'라 불려도 좋을 기막힌 활약이었다. 그러나 그 해 역시 그는 2인자였다. 초등학생시절부터 박노준의 '그림자'였던 김건우가 선동열과 맞서서도 한 치 꿇리지 않는 기백으로 잠실구장을 열광시키며 18승과 1.80의 평균자책점으로 포효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해 겨울의 신인왕 투표에서는 12승에 불과했지만 홀로 243이닝을 버티며 최약체 신생팀 이글스의 버팀목이 되었던 이상군에게 '2인자'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다.
프로무대의 영원한 '2인자'
그 뒤로도 성준은 14년간 프로무대를 지키며 어느 해도, 그리고 승수건, 평균자책점이건, 세이브건, 혹은 탈삼진이건, 어느 부문에서도 '1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심지어 팀 내에서도 그는 김시진, 김성길, 박충식과 김상엽으로 이어진 에이스의 계보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해마다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컨디션이 좋으면 2점대, 부상이 겹치면 3점대의 꾸준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안정된 투수였다. 그래서 해마다 에이스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라이온즈 마운드를 조망하며 주축 투수로서 성준이라는 이름이 빠진 적은 없었다.
▲ 성준의 투구모습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그는 14시즌동안 경기당 3.32점만을 허용했고 97번의 승리를 기록했다. 지금에 와서 그에 대해 남는 기억은, 지겹도록 길었던 투구간격과, 당연히 징그럽도록 지루했던 경기시간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한 번 포수와 사인을 교환하기 시작하면 길게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에 다녀오곤 했지만, 돌아와 이제 경기가 어떻게 진전되었나 살펴보다가 볼카운트 하나 바뀌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경악하던 기억. 그 사이 로진 백 한 번 만지고, 모자 한 번 고쳐 쓰고, 견제구 두어 번 던지며 마음을 가라앉힌 끝에 다시 포수와의 사인협상을 시작하던 모습.
그래서 한 이닝을 45분간이나 무실점으로 막아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비공식기록까지 만들어낸 투수 성준. 심지어는 언뜻 한줄기씩 새나오는 홈팀 팬들의 야유마저 이겨내던 단단한 마음으로 가다듬어 겨누던 시속 130km대의 직구는 그 한없이 늘어지던 시간의 벽을 뚫고 나와 난데없이 상대타자의 눈앞을 통과했고, 그렇게 빈손으로 타석을 돌아서던 타자의 머리 속에는 내공 깊은 초식에 유린당한 깊숙한 내상이 새겨지곤 했다.
느리게, 더 느리게 빈틈을 파고들다
역시 그의 경기는 맥주 한 캔 들고 웃고 떠들고, 때로는 욕설 섞인 고함까지 쳐가며 볼 전형적인 '야구'의 장면은 아니었다. 혹 컴퓨터 동영상으로라도 구해서 돌려볼라치면 이런 단상이 떠오른다. 그 느릿느릿한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새겨지는 긴장, 용기, 속임수, 결심, 그리고 야구와 삶에 대한 묵직한 존경심과 경외심. 차라리 그걸 다시 느린 화면으로 전개해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호흡과 땀방울들. 끝내 1인자가 되지 못했고, 끝내 100승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또한 끝내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던 불운한 투수 성준.
그러나 끝까지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자신과 상대의 호흡이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을 노렸던 고독한 승부사 성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른하고 깊숙한 또 다른 승부의 세계로 이끌리는 그는, 우리 야구사에서 가장 곱씹을 것이 많은 이름이기도 하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