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진성면 반야재는 진주강씨 박사공파 파조인 박사공 강계용 선조님의 8세손 창령공 강우덕 선조님의 유덕을 기리는 재실로 그의 아들 수헌공 강숙경 공과 손자 사과공 강인범 공, 증손 목계공 강혼 공의 세사를 모시는 곳이다. 반야재 창건 일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1924년 姜台秀(1872-1949) 공의 주도로 중건했다. 강태수는 수곡 원당 사람으로 면우 곽종석의 문인이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고, 변을 맛보아 그 병든 정도를 헤아렸다. 어머니가 중풍을 앓아 수족을 쓸 수가 없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곁에서 숟가락을 들어 식사 시중을 들었다.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매일 성묘하니,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동받아서 성묘하는 길을 닦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재실이 낙후되자 1985년 다시 중건을 착공해 1987년 완공을 했다. 박사공의 7세손 통정공 강회백 선조는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은 장령공 강종덕(姜宗德) 공으로 고려가 망하자 사헌부 감찰을 사직하고 안동으로 낙향한 분이다. 차남은 창녕공 강우덕(姜友德)으로 1385년 태어났다. 어려서 자질이 남달랐으며 6세에 모친상, 18세에 부친상을 당해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렀다. 1405년 음사로 출사해 의영고 주부, 그해 가을 예안현감을 지냈다. 곡성군수 이천현감 영춘현감 등을 지내고 1434년 9월 창녕현감을 지냈다. 1439년 가을 55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11월 10일 진주 반성현 반야동 신산 술좌 진향에 장사 지냈다. 공의 별장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이다. 부인은 지보주사 재령이씨 이혜의 따님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남은 맹경(孟卿), 숙경(叔卿)이다. 삼남은 승지공 강진덕(姜進德)이며 사남은 대민공 강석덕(姜碩德, 1395-1459)으로 호는 완역재(玩易齋)이다. 심온(沈溫)의 둘째사위이다. 개성유수와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오남은 감찰공 강순덕(姜順德) 공이다. 강인범(姜仁範, 1447∼1501) 공은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 공의 아버지이며 어득강(魚得江)의 장인으로, 별제(別提)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강혼(姜渾, 1464년-1519년) 공의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동고(東皐)이다. 강우덕(姜友德) 선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議) 강숙경(姜叔卿)선조이고, 아버지는 정략장군(政略將軍) 강인범(姜仁範) 공이다. 어머니는 성주인(星州人) 여씨(呂氏)로 호군(護軍) 여인보(呂仁甫) 공의 딸이다. 부인은 삭령 최씨로 예조참판(禮曹參判) 웅(雄)의 딸이다. 강혼(姜渾) 공은 연산군과 중종 대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1483(성종 14)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고, 1486년(성종 1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에 풀려났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궁인 애희(愛姬)가 죽자 궁인애사(宮人哀詞)와 제문을 지어 왕의 총애를 받고 도승지에까지 올랐다. 중종반정(1506년)이 일어나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朴元宗) 등이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유순(柳洵)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고, 이후 반정에 가담하였다. 반정에 가담한 공훈으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의 공신호를 받고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에 대제학·공조판서를 거쳐 1512년(중종 7)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이어 우찬성·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진주시 진성면 중촌리 반야동 진주강씨 선영묘역에 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저서로 『목계일고(木溪逸藁)』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