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2박 3일 여행을 다녀 왔다. 올해부터 경제 활동을 시작한 딸아이가 여행을 위해 넣은 적금을 탄다고 동행을 제안했고, 누구에게도 신세 지는 걸 편히 여기지 않는 성격이라 자식 덕도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몇 번 거절하다가 강권에 이기지 못해 함께 했다. 이른 아침 분주함을 지나 도로에서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첩첩이 둘러싸인 산과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유명 관광지에 도착했다. 널리 알려진 곳이라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였지만 역시 자연의 넓은 품은 기대 이상의 여유를 선물했다. 딸과 함께 연신 감탄하며 가을 풍경을 만끽했다.
특히나 좋았던 곳은 계곡물이 딱 맞춤맞게 고여있는 00탕이었다. 계단을 상당히 내려가야 볼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다른 관광객이 한 명도 없었다. 그 적막함이 우선 좋았다. 아무리 매력적인 곳이라 해도 나는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라 시끌벅적함이 즐거움을 반감시키기 일쑤이다. 아무도 없는 곳, 계곡물소리만 가득차 있고, 노랗고 빨갛게 변한 여러 나뭇잎들이 동동 떠있는 물을 보고 있자니 짧지만 내 마음과 정신이 꽉 차는 값진 시간이었다. 좀더 여유를 부리고 싶었지만 젊음이 넘치는 아이의 스케쥴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음 일정을 위해 발길을 돌리면서 한 번쯤은 엄마, 혹은 언니와 함께 오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다.
대도시를 벗어나면 우선 어마어마한 소음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집안의 소음을 모두 없앤 후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차소리, 다른 여러 소리들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어든다. 이런 이유로 귀촌의 욕망이 스물스물 생겨나기도 하는데 아직 발목을 잡고 있는 여러 일들이 있어서 욕심을 접을 수 밖에. 평소와는 다른 풍광들도 기분을 들뜨게 하고 나도 모를 설레임을 선물한다. 아직 산들의 단풍이 완성형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초록을 포함한 여러 색들이 어지러히 섞인 자연은 그저 감탄만 자아낸다. 인간이 만든 물감이나 기타 다른 것들로는 표현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더 그렇다. 커다란 호수를 돌다가 주차가능한 곳에 차를 잠깐 대고 물을 바라보던 시간은 완벽한 쉼이었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25쪽)
낯선 곳에 나를 던지는 행위, 그게 바로 여행일테다. 동행한 이와 좀더 세밀한 관계로 나아가고, 이와 더불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갖게 되며, 새로운 장소에서 스친 새로운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쌓아가는 것. 여행의 모든 시간이 찬란하고 감사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낯선 곳에 선 나를 내가 돌아보는 걸 더 많이, 자주 하고 싶다. 표현이 부족해서 아쉬울 뿐이다. "너무 좋다"는 단어 만으로는 내 안에 가득찬 희열을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언어는 감성을 나타내기에 늘 모자르다.
하룻 밤을 책임지는 텅 빈 숙소를 보면 살면서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깨달음이 선명해진다. 여행지에서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순간순간 충실하지 못한 평소의 삶을 돌아본다. 좋든 나쁘든 그 지역만의 특색이 느껴지는 모든 순간들이 나에게 자극이 되어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인간의 삶을 딱 정해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진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다. 책과 마찬가지로 한 발짝 좀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내가 이전에 알던 것과 다른 것을 알고 나서 찬찬히 살피다 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마련일테니.
첫댓글 독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죠. 명언이네요. 경주 가보고 싶어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