떫은 감 이랑
미술 선생님이 교무실에 감을 들고 오셨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시던 다른 선생님들이 감을 먹기 위해 테이블을 정리하고 차를 준비했다. 가을 햇살을 받아 단단하게 익은 감은 밝은 주황빛으로 윤기가 돌아 어느새 가을이 왔음이 실감났다. 보기 좋게 잘라진 감을 한입 베어 물자 탱글한 식감과 함께 달콤한 육즙이 입안에 돌았다.
선생님은 감을 자르며 직접 우린 감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감이 사골도 아니고 감과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다. 나는 입에 잘 붙지 않는 ‘우린 감’을 따라 말해보며 무슨 뜻인지 찾아보았다.
감 우리기는 감의 떫은 맛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다. 감을 40도 정도의 따뜻한 물에 일정 시간 담궈놓으면 떫은 맛이 빠져나간다. 그때 중요한 것은 물의 온도다. 물이 너무 미지근 하면 떫은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너무 뜨거우면 새까맣게 삶아진다고 한다. 또한 물 속에 너무 오래 두면 쉬어버린다. 물의 온도와 시간을 잘 맞추어야 떫은 맛이 사라지고 영양이 풍부한 감이 된다. 감 우리는 방법을 읽다보니 한 학생이 떠올랐다.
재작년 이맘 때쯤이었을 것이다. 2학년 1반 수업 시간에 떫은 감 하나가 책상을 모아 침대를 만들어 자고 있었다. 학생들은 기훈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기훈이 쪽으로 걸어가 한번 흔들어 깨웠다.
역시나 기훈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고 수업을 해야 할까? 끝까지 깨워서 지도를 해야 할까? 찰나의 순간 고민을 하던 나는 학생을 깨우기로 마음 먹었다. 가까스러 일어난 기훈이는 겨우 자리에 앉았지만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누우려는 기훈이를 잡아 자면 안된다고 지도했다. 계속해서 눕지 못하게 하자 기훈이는 “씨발, 귀찮게 하네”라고 말하며 나와 책상을 밀치고 교실 밖을 나가버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기훈이를 잡으러 가야할지, 학생들을 정리시키고 수업을 해야할지에 대한 생각에 복잡했다. 그리고 동시에 흥분된 나의 감정도 가라앉혀야 했다. 이대로 수업도 안하는 건 기훈이에게 지는 느낌이 들어 의연한 척 수업을 마무리하고 교실을 나왔다. 기훈이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났다. 그 당시의 교실 분위기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관계는 바짝 말라비틀어진 감말랭이와 같다. 학생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고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한다. 학부모님들은 교사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말만을 토대로 학교에 민원을 넣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교사들은 학생과 학부모와의 메말라 있는 감정의 골을 조심스레 펴가며, 관계 형성을 목표로 새학기를 시작하곤 한다.
교사들이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벌점이니, 생기부 기재와 같은 지도 방법은 대학 진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나 통하지, 소년원을 다녀왔던 기훈이와 같은 아이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곧바로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렸다. 기훈이는 한번의 징계가 더해지면 퇴학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현장을 다 지켜본 반장이 나에게 찾아와서 기훈이를 꼭 처벌해달라고 했다.
기훈이에게 올바른 지도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올라갔던 나의 감정의 온도를 낮추었다. 더 이상 학교를 못다니게 된다면 기훈이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칠 수 있을까? 학생이 교사를 밀치고 욕을 하다니,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생 앞에서 곤두박질 친 나의 교권은 매우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으며, 이에 대해 따끔하게 혼내고 싶기도 했다.
기훈이의 떫은 맛을 희석하기 위해 고심했다. 결국 기훈이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하였다. 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별다른 처분없이, 3자 대면의 자리에서 기훈이의 사과를 받고 3일간의 교내봉사를 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여기서 끝일 줄 알았던 기훈이와 나와의 인연은 얄궂게도 3학년 담임과 제자로 이어졌다. 다행히 기훈이는 위탁기관으로 가게되어 얼굴을 자주 볼일은 없었다. 점점 기훈이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싸늘히 식어 아무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위탁학생 담임으로서 위탁기관에 방문 및 점검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잊고 지냈던 녀석을 다시 봐야 한다니 마음이 참 불편했다. 머리로는 용서했으나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되었던 기훈이, 이미 식어버린 감정의 불씨를 살려 서울행 기차를 타서 기훈이를 만나고 왔다. 그 이후에도 기훈이를 위해 감정의 온도를 맞추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대학 입시를 돕고 면접준비를 시켰으며, 졸업여행을 보내기 위해 위탁기관에 공문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졸업식, 함께 사진을 찍고, 졸업앨범을 건내주며 그렇게 기훈이를 보냈다.
성숙하지 못한 학생들의 떫은 기운을 빼주도록 적절한 온도를 맞춰주는 물의 역할을 바로 선생님들의 해야 할 일이다. 하루 사이에도, 감정의 온도를 내렸다 올렸다 수많은 반복이 일어난다. 떫은 감의 떫은 기운을 빼는 데에만 관심을 갖지 물이 겪는 수고로움과 고통을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그 해, 스승의 날 기훈이는 나에게 연락을 하며 안부를 전했다. 부산의 한 호텔에서 요리를 배우며 일을 한다고 했다. 스승의 날이라고 전화도 할 줄 알게 된 기훈이가 기특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1인분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학생들이 달콤한 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다. 비록 멋지게 변한 학생들을 보지 못하더라도 잘 우려질 것을 기대하며,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교사들의 할일이리라.
우리 반 교실에는 스물 여섯명의 떫은 감이 앉아있다. 부모라는 감나무에서 힘들게 떨어져 나온 이 땡감들은 서로 크기와 모양도 다르고 떫음의 정도도 다 다르다. 이 아이들을 다 우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나는 이 스물 여섯명의 감을 탱글탱글하고 달콤한 감으로 만들기 위해 내 온도를 맞춰본다.
첫댓글 이랑선생님 수상을 축하드려요^^*
저는 올 초에 선생님의 '키다리 의자'란 글에 위로받고 올해 둘째 수능을 잘 치룰수 있었어요.
이번에 수상하신 글도 아이들 생각하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