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말로 영적 혁명이 필요한 때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지와 인식능력은 두뇌의 작용이다.
두뇌는 몸 전체의 신경망과 연결되어있고 그 신경망은 감각의 지각에 따라 그 정보를 두뇌에 전달한다. 몸은 수 십 조의 세포로 이루어져있지만 그 자체로 몸은 하나의 거대한 세포와 같다. 몸이란 하나의 세포는 생존하기 위해 존재하며 자기분열을 통해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단절성을 극복해나간다.
인간의 의식은 생각하고 사유함으로서 진화되어왔다. 죽음이란 시간과 공간의 단절을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죽음이란 현상을 인지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려는 의지를 사유화함으로서 영적인 진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생각의 힘, 사유의 의지가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본능에 잠식당한 감각의 장벽을 뛰어넘어, 영적 인간으로서 다른 사물을 인지하고 저 광대한 우주에서부터 극미의 양자세계까지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그를 포괄하는 신인류를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전혀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인지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인지 작용은 오히려 인간의 삶에 고통을 부과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순간순간만을 인지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인지하는 순간순간의 시간과 공간의 단절성은 인간처럼 지속적인 고통을 양산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고통은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혔을 때만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능력은 태어나 죽음의 순간에 이르도록 지속적인 시간성과 공간성을 인지함으로서 현재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늘 불안과 두려움에 기초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인지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인식 작용이 시간과 공간의 단절성, 즉 <죽음을 토대로 한 삶의 존재방식>을 예측하고 인지함으로서 심연에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원초적인 마음의 기재를 구축해놓은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현상, 즉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매 순간 관계 속에서 자기란 존재가 사라지고 사라져가는 현상에 대한 자각이나 각성이 없이는 그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마음의 동력으로부터 늘 억압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삶의 양식인 것이다.
인간의 파괴적 성향은 인간의 내재적인 불안과 두려움의 투영이다. 타인을 죽임으로서 자신을 보존하려는 성향이 폭력이다. 시간과 공간의 단절성, 즉 죽음을 극복해나갈 수 없다면 불안과 두려움의 투영으로서 인간의 내재적 폭력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란 삶의 존재조건을 더욱 공고히 구축하고 (권력, 권위, 부, 명예, 상대적 우월감 등등) 또 욕망이라는 마음의 기재를 더욱 더 부풀림으로서 인간과 인간 사이는 폭력적 쟁취를 피할 길이 없으며 그 삶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삶에 더욱 고통만을 양산할 뿐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인지하며 미래를 예측해나가는 인식작용은 인간이 영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진화시켜온 원동력이다. 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인간은 개별적인 죽음이란 현상의 지배를 벗어나 우주적 존재로서, 우주의식을 통해 우주마음으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이다!
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종교나 종교현상은 죽음이란 생의 단절로부터 벗어나고픈,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도피처이자 피난처이다. 따라서 그 누군가가 자신의 안식처를 비난하거나 붕괴시키려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존재근거를 말살하려는 파괴적인 폭력이기에 목숨을 걸고 그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 종교전쟁의 단초인 것이며 그것은 곧 <존재의 부재>가 불러오는 필연적인 마음과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욕망의 전쟁>인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시대가 불러오는 파괴성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망각한 채 오직 자본의 예속물로서 <존재의 가치>를 유린하고 있다.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인간이란 존재의 가치를 더불어 교감하고 공유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불러오는 자본의 지배력, 권력과 부의 불평등, 그를 통한 지배와 억압 그리고 착취, 폭력적 사회가 불러오는 파괴적인 인간관계, 소유적 가치관 등등이 인간이란 존재를 자연과 분리함으로서 인류의 삶은 오히려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수한 생명들이 서로 교감하고 감응하고 공유하면서 빚어내는 지구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즉 하나의 포태 내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파괴자인가 아니면 창조자인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하는가?
우리의 시대는 지금 새로운 혁명이 필요한 때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새로운 혁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신인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자본의 혁명이나 정치적 혁명을 뛰어넘는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다.
정치와 자본의 지배력은 종교의 가치마저 무력화시키고 첨단의 기술문명은 인간의 혼마저 유린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에 필요한 혁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심연에서 용광로처럼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웬만해서는 결코 그 속을 내 보이지 않는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일이다.
그를 자각하고 각성하면서 내면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길러내고 전환시켜내는 일이다.
그것은 종교라는 <절대화된 의존성>에 갇혀 있는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을 넘어서는 일이며
그 모든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심적, 물적인 억압과 그 토대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의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그를 마주하고 대면함으로서 스스로 <자유의 날개>를 두 어깨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개인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걷는 길이라면 그것은 결코 영적혁명을 불러낼 수 없다.
개인의 행복과 평안은 수평적 관계로 이루어진 <전체의 생명적 네트워크>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심연의 불안과 두려움 너머에는 공유, 공감, 교감, 공존이라는 아름다운 생명의 춤사위가 늘 펼쳐지기 때문이다.
영적 혁명은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각성 없이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