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엄마학생 / 백봉기
얼마 전에 《우렁각시의 꿈》이라는 시화집 한 권을 받았다. 표지에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길 차마고도의 사람들’이라 쓰여 있고, 수줍다 못해 대문 뒤로 숨으려는 순박한 산마을 여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첫 장을 넘기니 ‘백봉기 교수님께, 김한하 드림’이라는 글씨가 보였고, 출판기념회 초대장까지 들어 있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책의 저자가, 내가 아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 1학년 학생신분으로 차마고도에 다녀와서 시화집을 냈다는 것이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백제예술대학 방송시나리오극작과 강의실에서였다. 그녀는 강의실의 맨 앞 줄, 강의하는 내 바로 앞에 앉아 있었고, 그 뒤 학기를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그 자리에만 앉아 강의를 듣던 학생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20여명 학생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강의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항상 집에서 준비해온 홍차나 발효차를 가지고와 나에게 한 잔씩 따라주곤 했었다. 나는 그녀가 30대 초반쯤 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43세에 군대 간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강의내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적었으며, 질문과 답변도 가장 활발했던 학생이었다.
그날의 강의는 다큐멘터리작품의 구성과 제작기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새로 쓴 작품, ‘차마고도’를 구입해서 보여주었다.
차마고도(茶馬古道)는 2007년에 KBS에서 제작 방송한 것으로 제작 때부터 세계 방송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프로그램이다. 티베트에서 중국 윈난성까지 장장 5,000Km, 세계에서 가장 높고 험하고 위험한 길을 따라 마방들이 교역하는 것을 동행 취재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다 중도에 포기한 일도 있었다. 이 작품은 제작 전에 이미 11개 나라와 방송계약을 했고, 제작 후에도 20여개 나라로 수출한 프로그램으로서 대자연의 웅장함과 문명을 등진 채 처절하리만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생활을 소개한 작품이다.
그녀는 그날의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고 질문도 많이 했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올 여름에 차마고도를 다녀오겠다는 의지를 밝혔었다. 결국 방학기간에 차마고도를 다녀와서 ‘우렁각시의 꿈’이라는 시화집을 발표했나 보다.
또 그녀는 대단한 의지의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한 번은 그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어떤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전주 남문시장에서 정육점을 하는데, 같은 학과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같아 집으로 초대해서 삼겹살 파티를 해주려고 한다.”며 나도 함께 참석할 것을 부탁했었다. 나는 다른 일이 있어서 못 갔지만 그녀의 엄마 같은 마음씨, 아니 엄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정말 아름다운 일을 한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었다. 그 뒤 나는 그녀를 ‘엄마학생’으로 생각하기로 했었다.
내가 엄마학생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2009 전라북도민속예술축제」를 주관하는 관계로 휴강을 하고, 학생들에게 보강날짜를 잡아달라고 했었다. 사실 나는 일이 많아서 보강수업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짜 정하기가 어려우면 그냥 쉬자고 했더니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엄마학생이 “교수님 안돼요, 다른 과목이라면 몰라도 교수님 강의는 꼭 들어야 해요, 학생들이 다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좋은 기분이 올라왔다. 내 강의를 꼭 듣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 뒤로 나는 정성을 다해 강의를 준비했고, 학기가 끝날 때까지 하루 4시간씩의 강의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학생에게 전북예총에서 관리하는 ‘사랑티켓 모니터요원’으로 위촉했었는데, 이번 시화집을 보고는 그가 온글문학 회원이고 예술집단 부지땡이 대표이며 풍남문예술제제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사진전을 가졌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학생은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었다. 내가 맡은 과목은 ‘방송의 이해’와 ‘영상기초’였는데, 엄마학생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모두 A+를 받았다. 내가 맡은 과목뿐만 아니라 아마 모든 학과에서 A+를 받아 학과에서 수석을 차지했을 것이다.
엄마학생이 펴낸 시화집에 대한 백제예술대학 김동수 교수의 평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우렁각시의 꿈’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제2의 고향, 곧 그가 꿈꾸는 미지의 이상적 처소(處所)로서의 또 다른 고향일 것이다. 제1의 고향이 그가 태어난 생래적이고도 원초적인 호남평야에서 생성된 ‘아(我)로서의 들녘이라면, 제2의 고향은 그가 사회적으로 새롭게 태어날 보다 큰 ’비아(非我)의 가치 지향적·이상적 동경의 세계일 것이다."
맞다, 내가 본 엄마학생은 웅크리고 있는 개구리가 한 순간에 뛰어오르듯, 연어가 강한 물줄기를 타고 높고 넓은 강으로 솟아오르듯, 분명히 제2의 처소를 향해 힘차게 날개를 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거품 나는 비누로 남루한 집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맛있는 한 끼의 식탁을 차리는 '우렁각시의 꿈'이 꼭 이뤄지리라!
마지막 시험을 끝났을 때 나에게 다가와 아쉬운 마음으로 말하던 엄마학생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서 맴돈다. “교수님 잘 가세요, 언제나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열심히 들어줘서 고마워, 잘 있어!” 몇 몇 학생들과 악수를 나누다 눈시울이 뜨거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던 나에게 “교수님,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라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