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교회가 장비가 바뀌면 장비가 안정이 될 때까지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전에도 영상 관련된 것들 등등 아직 안착이 좀 덜 되어서 아마 한 한 달가량은 약간 그런 미스가 좀 있어 보일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양해하시고 또 말씀에 좀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 얼굴은 안 띄우는 걸로 했어요. 잘생긴 얼굴을 너무 크게 띄웠더니 문제가 심각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은 안 띄우고 그냥 이렇게 이 화면으로만 유튜버로 이제 얼굴이 송출이 되는데 화면상으로는 직접 제 얼굴을 봐야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저희가 조치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야고보 사도가 주장하는 명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런 거죠. 믿음의 본질의 문제를 시비를 거는 거 아니에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본질에 대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잘못된 그릇된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야고보 사도가 행위로 얻는 구원을 강조한다고 생각했어요.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야고보 사도는 행위를 강조해서 잘못 들으면 마치 우리가 노력해서 수고하고 땀 흘려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의 서신을 옛날에는 성경에 전경에 두지 않으려고 하는 그룹들도 꽤 있었어요.
이 성경은 문제가 있다 66건에 들어가지만 최대한 이 성경은 인용하지 말자 등등 이런 논의가 있었던 성경이 야고보입니다. 야고보서입니다. 근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잘못된 믿음 믿음의 본질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 특히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가 반박하고 있는 거예요.
행위와 믿음을 분리하는 것 이게 위험스럽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만 강조하고 또 믿음의 믿음만 강조하다 보니까 행위가 없어서 행위 없는 믿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그러니까 이 두 부류 다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와 믿음을 분리하는 건 잘못된 신앙 이원론적인 신앙이라는 겁니다. 어렵게 말하면 사변과 사실을 분리하는 거고, 물질과 영혼을 분리하는 거고, 실체와 관념을 분리하는 것이고,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말로는 분리가 되지만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우리의 삶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야고보 사도는 이런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을 나눈 거죠. 앞에 말했던 것처럼 물질과 영혼을 나누고 실체와 관념을 나누고 믿음과 행위를 나누는 이원론적인 신앙이 초대교회에 많이 있었고, 그래서 교회는 커나가지만 복음은 확장되어 가지만 잘못된 믿음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지금 교회의 대부분 문제는 뭐예요? 행위가 문제인 거잖아요.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라 점검하기가 한계가 있어요. 근데 행위는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드러나는 거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교회의 모든 문제는 행위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행위를 잘못하거나 그릇되게 해서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믿음과 행위를 나누는 것 이게 잘못된 신앙이다 생각이다 삶이다 신앙이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믿음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만 강조하는 이 믿음은 구원받은 진짜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과 행위가 함께해야 구원받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 십자가의 은혜가 고작 이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야고보의 생각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행위가 따르지 않을 만큼 그냥 약한 능력이 없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가 경험한 십자가의 은혜가 하늘나라의 영광이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아도 될 만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게 아니라는 거예요.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되는 것이 십자가의 영광이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행동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본 사람들은 삶이 뒷받침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가치를 때론는 잘 모를 때가 있어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고 능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평안히 가라 돕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이건 인사말이에요. 유대인들이 하는 인사 말이에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중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냐 하면 이렇게 인사하는 것으로 예우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초대교회는 당연히 유대인 개종자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 개종자들 때문에 문제가 항상 있었는데 특별히 특별히 이 사람들은 이렇게 인사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성도에 대해서 아이고 어려웠어 힘드셨죠라고 말하는 것으로 마침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랑이나 섬김을 다한 것으로 지급하는 일이 이때도 많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를 들면서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인사를 하는 것으로 구원받은 백성의 가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사가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구원받은 백성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구원의 가치가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평안히 가라는 인사와 함께 그 사람을 평안하지 않는 사람을 평안하도록 돕는 것 행동하는 것이 참 평안에 대한 평안을 구하는 인사인 거고 그게 성도들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유대인 개종자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이렇게 인사가 워낙 습관이 됐으니까 교회에 와서도 인사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 한 것으로 여겼어요.
지금의 교회들도 비슷하죠. 우리는 솔직히 인사하는 것으로 성도에 대한 본분을 다 한 것으로 여겨요. 그냥 지난주에 아파서 왔으면 힘드셨죠? 많이 아프셨죠? 물론 인사 안 하는 것보다 낫지만 진짜 믿음은 그런 인사한 인사의 내용들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거죠. 우리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다 온전히 섬길 수는 없지만 어떻든 내가 그렇게 인사를 하고 할 정도에 가까운 사이라면 서로를 행위로 잘 섬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너무 많은 십자가를 경험했어요. 왜냐하면 특히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거든요. 십자가는 반역자들이 아주 극하게 제약 죄수들이 지는 게 십자가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유대인 교정자들은 십자가도 평범하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이 유대인 교정자들을 닮아서 십자가를 그냥 평범함으로 여기기 시작한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는 평범한 게 아니에요. 십자가는 능력이고 십자가는 영광이고 십자가는 생명인 거예요. 근데 유대인 교정자들이 십자가를 너무 많이 봤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냥 동일한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게 한 구원의 십자가이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생의 십자가잖아요. 이 십자가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이것을 행위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은 행위로 나타내요. 우리가 자녀가 가치 있게 여기니까 자녀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나오죠. 우리가 돈을 가치 있게 여기면 돈 때문에 구체적인 행위가 나와요. 교회를 가치 있게 여기면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나오고 나와요. 구체적인 행동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의 우리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교정자들은 일상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맛봤기 때문에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가 그래서 이들에게 다른 십자가라고 전혀 다른 삶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사는 것 이 사람들은 믿는 것으로 다 한다고 여겼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평균으로 여겼고, 그래서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이게 믿음이 다 한 것이 이게 믿음의 전부라고 여겼어요.
근데 야고보 사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라서 그것은 반드시 행동을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행위가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전에 있던 많은 종교들처럼 믿음만 있으면 이념만 있으면 종교가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동반한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거예요. 반드시 행위가 따르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행위보다 믿음을 중요시 여겼어요. 그래서 행위의 가치를 좀 떨어뜨려 약하게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였어요.
그런데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전 다른 종류의 십자가고, 죄수들이 들은 십자가는 완전 다른 종류고, 예수님이 이 메시아로 오셨는데 이전에 많은 종교적인 정치적인 메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메시아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믿음 여러분과 제가 믿는 믿음은 반드시 바른 행동을 뒷받침하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따라와야 이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지 말라라고 야고보서다가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다음 주도 한 주간 이 말씀을 좀 더 전할 텐데요.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 행위를 한번 좀 점검해 보셔야 돼요. 믿음의 고백들이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지, 성도들에 대한 인사가 실제로 그들을 돕는 도움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물론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100% 만족한 삶을 살기는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러나 최소한 우리 속에는 이게 믿음의 본질이다.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 하나인 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고 참 믿음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고 교회는 언제 재미있어지냐 공부를 많이 할 때가 재미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행위가 나타날 때 교회가 재미있어져요. 우리가 가르치는 배운 것들을 행위로 나타날 때 교회는 재미있는 교회가 돼요.
여러분이 기대하는 교회는 여러분이 행동할 때 이게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대해서 아쉬운 것들이 되게 많죠. 뭐는 좀 이랬으면 좋겠고 뭐 이랬으면 좋겠고 얼마나 많아요. 이젠 여러분이 행하시면 여러분이 원하시는 교회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우리가 만드는 거죠. 누가 만들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게 아니에요 목장 교회는 우리가 함께 만드는 교회지 누가 만들어서 선물로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재미는 우리가 정말 우리가 배운 것들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우리가 인사나 교제하는 것들을 행위로 나타날 때 그때부터 교회가 재미있어지고 같이 있어져요.
우리 교회가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우리의 고백만큼 우리의 삶도 열심히 따라오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