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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名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데......
김상달(생명공학과)
지금도 가끔 제 앞가림도 못하고 블민(不敏)하기 짝이 없던 제자이었던 저는 너무나도 경외(敬畏)스럽고 존경(尊敬)스러웠던 제 학창시절의 스승 서정훈(徐正塤) 교수님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사제동행 이야기 “내리사랑 치사랑” 원고를 몇 번의 고사(苦辭)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할 이야기도 없고 자랑할 내용도 없는데, 얼떨결에 청탁을 받고 말았다. 결국 저의 자랑할 것 조금도 없는 우매(愚妹)하기 그지없었던 지나간 대학, 대학원 시절의 연구실 생활을 곰곰이 떠 올려 보았다.
거대한 카리스마, 신생 미생학물연구소
서 교수님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20년이 가깝게 되어가지만 지금도 문득문득 학창 시절의 젊으신 서 교수님의 자신감 넘치고 혈기 왕성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교수님은 정년퇴직 무렵, 애석(哀惜)하게도 암(癌)으로 큰 병을 얻으시어 일본에서 긴 투병 생활하셨다. 그렇지만, 교수님은 그 와중에도 간간이 귀국하시어 우리 제자들과 만나는 회식 자리를 만들고, 지나간 교수재직 시절의 연구 열정과 제자들의 실험실 생활에 대해 많은 추억들을 회고하시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작고하고 아니 계시는 스승님을 이렇게 회상(回想)하는 글을 쓰고 있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리다.
제가 평생의 은사(恩師) 서정훈 교수님을 처음 뵈었던 운명의 시간은 1967년 대학 2학년생이 된 이른 봄날이었다. 향후 경북대학교 농화학과 미생물학연구실에서 대학, 대학원 10년간의 지도교수가 되실 분과의 설레고 두려웠던 첫 만남이 있었다. 제가 처음 뵈었던 서 교수님은 이미 30대 후반이셨고 6척 장신에 눈매도 부리부리하시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우렁찬 울림과 두려움이 있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감히 가깝게 다가가기 힘든 태산 같은 분이셨다.
1966년 제가 대학 입학했을 당시 미생물학연구실은 그즈음으로는 가장 첨단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신설연구실이었다. 즉, 교수님께서는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클리브렌드 클리닉 연구소에서 펩타이드합성 연구와 일본이화학연구소(日本理化學硏究所)에서 석유미생물 연구를 하시고, 이어서 바로 일본 토쿄대학(東京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셨다. 그런 새 박사님께서 처음 모교에서 개설하신, 문을 열어 연구를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그야말로 꿈이 넘치는 연구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제 연구실 생활을 희미하게나마 반추해보면, 학부 2학년생이었던 저로서는 활발히 돌아가던 그 연구들의 의미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연구실의 훌륭한 선배들의 심야까지 이어지는 열성적 실험을 맡겨진 큰 임무 없이 옆에서 그저 도와주고 보조해 주며 수년간의 시간을 보냈다. 교수님과 연구실 선배들이 수행과제의 실험에 대한 방법과 결과해석 등을 토론하는 랩미팅을 어깨너머로 보고 들으면서 생화학 실험과 미생물 연구에 대한 학문적 의미와 실험의 전개 프로세스를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또 중요한 실험에서는 하얀 와이샤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무균상 앞에서 시험균주를 접종(接種)하기도 하시고 반응액을 손수 피펫으로 분주(分注) 혼합, 반응시키시는 스승님의 열정적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아 오면서 실험과 연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저 단편적이지만 어렴풋이 짐작하곤 하였다.
차츰차츰 미생물 배양실험과 미생물 효소(酵素) 반응실험의 흐름을 어렴풋이 알아가기 시작하다가, 대학원 진학 후에는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단독의 연구 테마를 부여(附與)받아 실험에 착수하였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석사과정 중에도 서 교수님으로부터 실험에 대한 태도나 연구방법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이런저런 지도를 받아 왔지만, 특히 일년에 두 번씩이나 개최되던 전국단위 학회에 참가하기 위한 발표논문의 준비회의나, 미생물학 분야 전문학회지에 투고할 논문 작성의 준비회의에서는 심도있는 총합적 토론과 실험결과의 고찰이 연구실 전체 실원과 교수님 사이에 기탄없이 이루어지며 논문의 완성도가 진전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배워 왔던 경험이 훗날 저의 연구생활이나 교육자로서의 일생에서 큰 밑거름과 학문적 자원이 된 것 같다.
그 무렵 서 교수님이 계획하고 진두지휘한 미생물생산 사독저해물질(venom inhibiter,蛇毒沮害劑) 연구, 고혈압 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억제제 연구, 쥐복강암 육종암(sarcoma) 저해물질 연구 등을 위시해서 실크세리신 분해효소(sericinase), 포도당 이성화효소(glucose isomerase), 내산성 내염기성 고온성의 각종 단백질 분해효소(protease), 방선균 생산 트립신 저해제(trypsin inhibitor), 항효모성 물질(抗酵母性 物質) 연구, 미생물성 살어물질(殺魚物質), 페놀자화 효모균(phenol 資化酵母菌), 내열성 효모의 발효 연구 등 각종 생리활성물질(生理活性物質)과 미생물효소 관련 여러 연구과제로 미생물학 연구실을 열성적으로 이끄시며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셨다. 서 교수님의 학문적 영향과 심도있는 교육을 받은 수 십명의 제자들이 서울, 부산, 대구, 진주 등 경향 각지의 유수한 대학에 교수로 진출하여 우리나라 미생물학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 서 교수님은 폭넓은 연구와 제자 양성뿐만 아니라 미생물학이 독자적 연구영역으로 성장할 기반도 조성하셨다. 즉, 교수님께서는 1973년 서울의 몇몇 대학 교수와 관련 학자들과 합심하여 이전의 학회를 탈피하고 한국산업미생물학회(현재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를 새로이 창립하여 우리나라의 미생물학의 응용, 이론, 산업, 유전공학에 관련한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서 교수님은 경북대학교 미생물학과를 기존의 학과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미생물학과로 우리나라 대학 교육 과정 중에서 아주 초창기에 창립하여 미생물학과라고 하는 별도의 학과 명칭으로 한국의 미생물학 교육에 중요한 첨단과학의 학과제도로 출발시킨 공로도 있었다.
이렇듯 큰 산과 같은 서정훈 교수님 휘하의 훌륭한 문도(門徒) 문하생들 중에 아주 취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말석(末席)에서 겨우 공부를 했었던 변변치 못한 둔재(鈍才)였던 제가 끝까지 낙오되지 않고 훌륭한 선배님들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큰 바다와 같았던 스승의 명성과 학문적 유산에 힘입어서 제 평생 교육자로서 연구자로서의 운명으로 무탈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으며, 서 교수님의 큰 은혜와 음덕(蔭德)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의 방황과 성장을 무언으로 지도하시고
그러나 저에겐 씻지 못할 창피한 흑역사의 시간도 있었다. 석사과정 1학년이던 당시에 저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집안의 사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만 하고 있다는 게 큰 사치라고 생각한 나머지 빨리 취업을 해야겠다는 현실적 고민과 정신적 방황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다.
경제적 자립과 집안 형편을 위해서는 학교 교사로 취업해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수소문 끝에 시골에 있는 한 사립고등학교에 화학교사로 발령받기로 결정하고 그 학교 교무실에서 인사까지 하였다. 그러나 홀로 계시는 어머니께서 한사코 만류하셨고 출근 막판에 저도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 다시 실험실로 터벅터벅 마음 무겁게 고개 떨구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땐 이미 실험실을 한 달이나 훌쩍 넘긴 기간을 아무 말도 없이 게다가 연구과제를 받아 수행해 오던 실험까지 팽개쳐 놓고 교수님의 아무런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결석을 하며 우왕좌왕 이럴까 저럴까 괴로운 시간만 보냈던,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통한(痛恨)의 시간이 었다.
분명 매사 분명하시던 서 교수님께서 크게 호통치시며 실험실을 당장 쫒아내실 거라고 잔뜩 겁을 먹고 무거운 죄책감으로 돌아온 지지리도 못난 제자를 결코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이전과 같이 태연히 대해주셨다.
잠시의 빈틈과 쉴 여유 없이 바삐 돌아가던 연구실 시스템에서 목표 높으신 철통같이 완벽하신 서 교수님의 눈에는 제가 석사과정 중에 보인 나약하고 근면치 못했던 모습을 무척 불안하고 미흡하고 불만족스럽게 여기시었을 텐데도 끝까지 퇴출당하지 않고 교수님의 문하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새록새록 더 피어오르는 고마움이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똥거름 흙담은 흙손질도 할 수 없다고 낮잠 잔 제자 제여(宰予)의 나태함을 크게 나무라며 쫓아냈던 공자의 엄격함을 생각해보면(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不可杇也 於予與誅), 또 징세정치를 잘못한 제자 염구의 과오를 우리 문도(門徒)가 아니니 북을 울려 크게 성토하라고 배척한 공자의 추상같은 질책을(冉求非吾徒 鳴鼓而攻) 생각해보면 그때 교수님께서 이 못난 제자를 너그럽게 용서하셨던 일은 두고두고 고마울 뿐이다.
대학원 졸업 후 어렵게 취업한 전문대학 교수재직 시기에도, 서울로 대전으로 떠돌아다니던 연구소 재직시절에도, 늦게나마 옮길 수 있었던 대학교수 시절에도, 서 교수님의 이런 자립적 교육관과 연구에 대한 열정의 단련이 평생토록 저를 쓰러지지 않게 굳건히 유지시켜 주었다. 비록 신임과 총애는 받지 못했었지만 그 문하(門下)의 제자라는 이력(履歷) 하나로 은사님의 훌륭한 연구업적과 학계의 명성이 큰 그늘과 보호막이 되어서 항상 보우(保佑)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고 과분한 행운이었던 것 같다.
국가사태까지 염려해 주신 Spizizen 교수님
또 한 분의 잊지 못할 스승으로는 Post-Docter 시절 지도교수이셨던 아리조나대학교 의과대학(University of Arizona College of Medicine), 미생물, 면역학과(Department of Microbiology and Immunology)의 John Spizizen 교수님이다. 스피자이젠(Spizizen) 교수님은 그 옛날인 1958년 세계 최초로 유전자 조작으로 Bacillus subtilis의 Gene Cloning 기술을 미생물학 분야에 사상 처음으로 보고함으로써 학계에 명성이 아주 높은 유전공학계 원로교수이셨다.
Spizizen 교수님은 1942년 미국 Cal Tech(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Ph.D를 하시고 Western Reserve University 의과대학과, Minnesota 대학교 미생물학과장, Scripps Clinic and Research Foundation 미생물학과 창립학과장을 거치며 세균과 바이러스의 유전공학을 연구, 교육하시다가 1979년 Arizona대학 의과대학 미생물학과장으로 발탁되어 오셔서 많은 연구와 강의를 하고 계셨다.
Spizizen 교수님은 1983년 제가 Post-Doc 갔을 무렵엔 이미 연세가 많으셨지만, 지난 긴 세월의 높은 명성과 학계의 큰 영향력으로 인해 훗날 저의 학문적 위치와 학계의 인지도에도 작지 않은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또한 큰 은혜이었다고 생각된다.
Spizizen 교수님은 학문적 역량과 명성은 물론이고 제자인 저를 언제나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고 매사에 친절하시고 후덕한 지도교수이셨다. 제 Post-Doc 시기인 1983년에 발생한, 269명이나 사망한 소련전투기에 의한 KAL 007기 격추사건이나 전두환 정권의 각료들 17명이 사망한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 때, 제가 실험하고 있던 옆방의 제 실험벤치까지 직접 찾아오셔서 그 해 연이어 터진 고국의 비극과 충격과 불안에 대해 따뜻한 위로와 다독임을 주시며 저를 안심시켜주셨다. 또 제자인 저의 생일까지 기억하시고 댁에 초대하여 사모님과 함께 챙겨주시고, 크고 작은 학과 파티나 회의에도 늘 동행해서 참석시켜 주시던 인품 또한 너그럽고 자상하고 친절하신 분이셨다.
또 하나의 감사한 일은 그 당시엔 현직교사인 공무원 신분으로는 미국 방문비자가 나오지 않던 시절이라 미국입국에 어려움을 겪던 제 처(妻)에게 초청비자를 준비해 주심으로써 그 복잡한 절차의 입국비자 문제도 해결해 주신 바도 있었다.
제가 영남대학교에 임용 서류를 제출할 때 미국에서 호의적이고 자세한 추천서까지 보내주시고, 임용 한참 후에는 어떻게 전화번호를 아셨는지 학교 연구실로 근무 잘하고 있냐며 안부 전화까지 해주셨다. 그분의 다정하시고 따뜻하시던 배려에 지금도 고맙고, 그리고 그 감사함에서 제 삶의 에너지를 찾는다.
그럼에도 그 감사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음이 안타깝다. 내가 교수가 된 뒤 몇 해 후 우리나라 대우그룹 제철화학에서 유전자 제한효소(restriction enzyme)를 생산 하려고 하는 유전공학 신사업의 시설투자, 기획자문을 위해 대우그룹에 잠깐 초빙되어 오시는 길에 회사 인편으로 연락을 주시어 서울에서 한 번 만나 뵈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Arizona대학교 Post-Doc 시절의 큰 은혜도 마땅히 변변히 보답해 드리지 못했던 것이 무척 아쉽다.
세월이 흘러 한참 후에 어떤 자료를 보고 뒤늦게서야 교수님께서 Arizona 대학을 퇴임하신 후에도 투산(Tucson) 땅 학교 부근마을에 계속 머물러 계시다 애석하게도 2010년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한번 Spizizen 교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재직시절 몇 번이나 다녀온 미국 학회출장 (American Society for Microbiology) 중에라도, 와싱턴주나 미시간주에 몇번씩 몇달씩이나 방문교수로 나가 있었을 때도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던 저의 무심함과 매정했음이 너무나 송구(悚懼)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남아 지금도 크게 반성하곤 한다.
명장(名將) 밑에서 싹튼 약졸(弱卒)일까?
이와 같이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저의 이 모자라는 학문적 역량과 미흡했던 자질을 그나마 보완되고 별탈없이 커버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 세계에 명성이 높은 태산과 같은 스승님들의 크나큰 그늘과 두터운 보호막과 따뜻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수양산(首陽山) 그늘이 강동(江東) 팔십리를 간다”는 속담과 같이 높으신 그 그늘과 음덕이 없었다면 제 혼자 힘으로는 일생 동안의 무사한 연구생활과 무탈한 교수경력이 불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하니 정말 다행하고 행운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오래된 옛 기억이지만 서울에서 연구소 생활을 할 무렵, 영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개설하여 교수로 계시다 한양대학교로 옮기신 학계에도 저명하신 이성우 교수님을 우연히 서울의 어느 회의 석상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 경북대 서정훈 교수님 제자라고 제 소개를 드리니 바로 대뜸 직설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명장(名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 라고 하시며 저를 성원인지 독려인지 편달(鞭撻)인지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큰 충격으로 들렸었다.
그 이성우 교수님의 충고 말씀에 그때 제가 우리 스승님의 후광과 명성에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며 제구실을 하였는지, 천분의 하나라도 그 명성과 평판에 누(累)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백분의 하나라도 그 제자로서의 걸맞는 활동과 결과를 보여드렸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면 지금도 제 부족함과 나태함과 미흡했음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너무나 황송(惶悚)할 뿐이다.
이렇듯이 부모와 같은 큰 스승님들의 음덕과 은혜를 입고 무탈하게 대학교수로 살아 올 수 있었던 저를 되돌아 볼 때, 제 학문적 취약함과 교육적 미흡함으로 인해 지난 교수시절 지도했던 석사, 박사 제자들에게 저의 영향과 지도력이 그들에게 큰 울타리와 두터운 그늘이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제 연구실을 거쳐 간 많은 제자들에겐 늘 미안하고 아쉬운 감정이 일어나곤 한다.
저의 학문적 업적과 교육적 역량이 모자라서 결국 제자들의 장래와 앞날에 큰 보탬과 지렛대와 보호막이 되어 주지 못 했었던 것은 아닌지 하고 스스로 반성해 보니, 또 그들의 사회진출과 취업에도 수혜(授惠)와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었다는 아쉬움이 들고, 참으로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명장(名將)이나 맹장(猛將)이 되지 못하고 그저 졸장(拙將) 수준에 머물렀던 나의 학문적 지도력과 교육적 역량으로 인해 그동안 제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고 학위(學位)를 했던 많은 제자들에게 제가 제 스승님들께 물려받은 학문적 유산의 백분의 일도 물려주지 못했던 재직시절 과거가 그저 미안하고 아쉬운 회한(悔恨)만이 남을 따름이다.
특히 스승의 날 즈음에 제자들로부터 문안 전화나 명절 인사라도 올 때는 더더욱 내가 그 제자들에게 무엇을 물려 주었었고 무슨 은혜를 베풀어 주었었는가, 어떤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고 거듭 성찰(省察)하고 반성하고 뉘우쳐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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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고맙습니다! 후속 사제동행의 첫번째 원고로 주셨고, 이 난에 불을 다시 지펴주신 원고입니다. 교수님께서 얼마나 겸손하신지, 원고에도 '저'로 계속 이어나가시는 점이 정말 특색이고, 그래서 이것저것 '주절'거리기도 조심스럽습니다. 섬세한 마음을 담음 옥고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숙제를 벗으셨다는 해방감으로 행복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