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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무능한 임금 선조는 반전의 종결자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재위 1567~1608)는 전례 없는 대환란인 임진왜란을 자초해 무능한 임금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여러 고전에서 선조의 뜻밖의 면모를 보여주는 숨은 일화들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선조의 시대만큼 인재가 넘쳐났던 때도 드물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남명 조식,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월사 이정구, 서애 류성룡 등 대학자들이 그의 치세에 쏟아졌다.
선조는 인재를 아꼈다. 실수를 하더라도 내치지 않고 보듬었다. 심노숭(1762~1837) 의 <자저실기>에 따르면, 명나라에서 ‘동방문사(東方文士)’라고 칭송받던 차천로(1556~1615)는 과거에 시험 감독을 하면서 자신의 고향 사람에게 대신 답안을 써줬다가 들통이 났다.
더구나 차천로의 답안을 베껴 쓴 사람이 장원으로 뽑혀 상황이 심각했다. 임금이 크게 노해 차천로를 함경도 변방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뒤에 선조는 북병사(함경도 경성의 북병영에 두었던 병마절도사)에게 “차천로의 죄는 무겁지만 재주가 아까우니 잘 대우하라”고 명했다.
북병사는 날마다 연회를 베풀면서 차천로를 융숭히 대접했다. 차천로가 이상하게 여겨 사양하자 “정승, 판서의 부탁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이것이 어떤 명령인가”라며 그 까닭을 털어놓았다. 차천로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목 놓아 통곡했다고 <자저실기>는 전한다.
영남 우도의 명현, 남명 조식(1501~1572)은 끝내 선조의 부름을 거부했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선조가 그의 병이 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와 약을 보내 간호하게 했으며 얼마 후 조식이 세상을 뜨자 특별히 대사간(정3품 당상관직)에 추증했다”고 서술했다.
석봉 한호(1543~1605)도 선조가 없었으면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석봉은 양반이기는 했으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25세 되던 선조 1년(1567) 진사시는 통과했지만 대과에는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생애 대부분을 글씨를 쓰는 사자관(寫字官)에 머물렀다.
그는 오히려 중국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온 명나라 이여송, 마귀, 등계달과 유구국 사신 양찬 등이 앞 다퉈 석봉의 글씨를 구해 갔다. 명나라 문인 왕세정은 “동국에 한석봉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의 글씨는 성난 사자가 돌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명나라 서화가 주지번도 “그의 글씨는 왕희지(진나라 서예가), 안진경(당나라 서예가)과 우열을 다툰다”고 했을 정도로 높게 쳤다.
이에 선조는 한석봉이 최고의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가한 곳에서 서예를 익히게 특별히 가평군수에 제수한 것이다. 그러면서 교서를 통해 “게을리 하지도 말고 급하게 하지도 말라. 피곤할 때는 억지로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한호가 죽은 후 사대부들은 “조그만 기예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면서 그의 이름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나 <성호사설>은 “이는 이 나라 풍속이 재주 있는 자를 천하게 보기 때문”이라며 “석봉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채록해 기록한다”고 적었다.
이익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북돋워주고 보호하는 기술이 필요한데, 이제는 그러한 도가 멀어져 한미한 자는 벼슬에 오를 길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선조는 스스로도 늘 학문을 가까이했다. 율곡 이이(1536~1584)는 그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선조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외모가 깨끗하고 빼어나다”고 전했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선조는 학문을 즐겨 웬만한 학자들보다 학식이 높았다.
명종도 왕자시절의 선조를 볼 때면 “덕흥(선조의 친부, 명종의 이복형)은 복이 있도다”라며 부러워했다. 선조는 즉위 후에도 ‘도학군주’를 자처하면서 경연에 나오기를 즐겨 했다. 경연에서 던지는 질문이 날카롭고 깊이가 있어 강관들도 강의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박순(1523~1589)은 시강하고 나오면서 “임금은 정말 영명한 군주”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석담일기>는 서술했다.
선조는 도량도 넓었다. 왕조시대에는 신하를 왕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큰 불충이었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대규모 원병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자신을 맞으러 온 한음 이덕형(1561~1613)의 인품에 감동해 “용모가 왕의 상”이라고 치켜세웠다.
아무리 이여송이 농담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덕형은 내심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백사 이항복이 선조와의 경연 자리에서 이 일을 끄집어냈다. 이항복은 “근세에 웃기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덕형”이라며 그가 왕의 물망에 오른 자초지종을 선조에게 아뢰었다.
그러면서 “성상(왕)의 크고 깊은 덕이 아니면 제 놈(이덕형)이 어찌 감히 천지간에 용납 되오리까”라고 했다. 선조는 선뜻 “내 어찌 가슴속에 담아 두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이덕형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술을 가져오라 명하고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
백성 아끼는 마음도 남달랐다. <석담일기>는 선조 11년(1578) 8월 임금이 출행하다가 어린아이가 출행 행렬에 끼어있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군사라는 답이 올라왔다고 적고 있다.
선조는 “엄마 품이 그리울 나이인데 어찌하여 군역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이를 보고서는 심기가 불편해 밤잠을 못 잔다. 내가 불민한 사람으로 임금 자리에 있게 돼 이런 일이 생겼으니 한탄할 일”이라고 탄식했다.
선조는 “내가 수천 군사를 잃을지언정 어린아이를 복역시킬 수는 없다. 군사를 점검해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모두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명은 지켜지지 않았다. 고을에 돌아간 뒤 수령이 다시 고역을 겪을까 두려워 어린 군졸들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왕 중에서 누가 가장 검소했을까. 옷을 기워 입고 나물 반찬을 즐겼던 영조도 소박했지만 선조도 무척 검소했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선조는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수라에도 두 가지 고기반찬을 올리는 법이 없었다. 평소 물에 만 밥 한 그릇과 마른 생선, 생강 조린 것, 김치와 간장이 고작이었다.
선조는 3녀 정숙옹주(1587~1627·동양위 신익성의 부인)를 가난한 집에 시집보냈다. 정숙옹주가 “이웃집과 너무 가까워 말소리가 들리고 처마도 얕아 집 안이 외부로 다 드러난다”고 하소연하자 선조는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들여놓으면 된다”며 집 안을 가릴 수 있는 굵은 발 두 개만을 하사했다.
전란을 겪은 후에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 밥알 하나라도 땅에 흘리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나인들이 불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는 “농사짓는 소를 어찌하여 임의로 잡느냐”며 도살을 금하기도 했다.
그런반면 선조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 조선의 여러 왕들 중에서 성종과 연산군, 숙종이 여색을 밝혔던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8명의 부인과 14남 11녀의 자녀를 둔 선조도 여색을 가까이 했다.
금욕주의자였던 율곡 이이는 선조의 이런 성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이는 <석담일기> 1574년(선조 7) 3월자에 “임금이 의영고(궁중에서 쓰이는 기름, 꿀, 과일 등의 물품을 관리하던 관청)에 있는 황랍(밀납) 500근(300킬로그램)과 수은을 대궐 안으로 들이라 명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고 적었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선조가 후궁에게 불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황랍을 사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궐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물론 유학자를 자처하던 선조는 불교를 멀리했다. 선조는 이 즈음 귀인 김 씨를 여러 후궁 중 가장 총애했다.
귀인 김 씨는 훗날 인빈 김 씨에 책봉되며 의안군, 신성군, 정안군, 의창군 등 4남 7녀를 낳는다. 이들 중 정안군은 인조의 생부다. 따라서 귀인 김 씨는 인조의 할머니가 된다.
그 귀인 김 씨가 아들을 위해 불상을 만들겠다고 선조를 졸랐던 것이다. 선조는 자꾸 반대하면 국문을 열겠다고 협박했지만, 거듭되는 반대에 결국 황랍을 도로 돌려보내면서 사건도 마무리된다.
앞서 1574(선조 7) 2월의 <석담일기>는 “임금이 지나친 방사(房事)로 잔병치레가 잦았다"고 썼다. 여러 신하들이 ”여색을 경계하라“고 간했지만 임금은 들은 체 만 체했다.
선조는 오히려 ”마음을 닦고 기운을 길러 장수를 하는 것이 왕도라고 할 수만은 없다. 목숨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신하들을 타일렀다.
또 1580(선조 13)에는 하원군(선조의 맏형)이 역관의 딸 중 예쁜 사람이 있다고 천거하자 임금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석담일기>는 “(임금이 역관의 딸에 빠져) 이때부터 햇빛이 광채를 잃은 날이 여러 날 이어졌다”고 개탄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5.무능한 임금 선조는 반전의 종결자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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