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 –제36차 법성게 – 중생수기득이익 (衆生隨機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 뭇 생명들 근기 따라 제 이익을 얻는다네.
‘우보익생만허공’ 뒤에 이어지는 구절이다.
긴 가뭄 끝에 보배구슬 같은 단비(우보)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익생) 허공 가득 내리는데 (만허공)..
중생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릇만큼 빗물을 받아갈 수 있듯이 온 우주에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과 능력과 바램의 한도 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비유다.
이런 비유의 원천은 <화엄경> “세간정안품”의 게송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법계도기총수록>에서 찾아 보면 ‘법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생수기득이익 이란 다음과 같다.
이 여의(如意)의 가르침이 삼승과 오승과 무량승 등 모든 중생 가운데 갖가지로 불리는 근기에게 이익을 얻게 해 주기 때문이다.
묻는다. 만일 그렇다면, 이 화엄에서는 삼승과는 다른 결과를 얻는 것인가?
답한다. 그런 일은 없다. 말하자면 이 ‘화엄경’에 무량승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에 갖추어진 무량승 가운데 <대품반야경>에서 별도의 결과를 얻을 뿐이다.
화엄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의 온갖 근기에게 이익을 준다.
근기를 성문성,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으로 나누든 불승, 벽지불승, 성문승, 천승,인승의 오승으로 나누든 또는 그 이상의 무량한 승(乘)으로 나누든 각 근기의 필요에 맞추어 이익을 준다.
(성문,연각,보살에 대한 설명은 수없이 반복되어 추가 설명은 생략키로한다.)
성문과, 연각과 보살은 그 그릇이 다르다.
복락을 추구하게 되면 복락은 반드시 고통으로 변하는 법이다. 삼법인에서 가르치듯이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아주 맛있는 음식도 계속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이치와 같다.
그 어떤 락도 오래 지속되면 반드시 고로 변한다.
쾌락이 고통으로 변하는 것은 인간계에서 복락에 궁극점이 없는 이유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복락을 추구하는 천승과 인승이 허망한 이유다.
그렇더라도 화엄의 가르침에서는 이를 모두 포용한다. 그 사람의 그릇이 인승이든, 천승이든, 성문승이든, 벽지불승이든, 보살승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가르침의 빗물을 받아간다.
그래서 ‘중생수기득이익’이다.
그러나 이것도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없이 반복했지만, 원하는대로 극락을 갔다고 하자!
마찬가지다. 오래 못간다. 이 마음 그대로 극락에 가도 곧 사바세계로 변하게 된다. 어려운 것 아니지 않나!!
밖을 향해 좋은데 아무리 찾아도 ‘잠시’다.
또 더 좋은데 찾게 되고, 또 잠시.. 잠시...
그러니 ‘고(苦)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왜? 그 도리를 알고 나면, 그럼 그게 극락이다.
고의 원인을 알고 나면 ‘집(集)’이다. 그 원인이 갈애다 집착하고, 탐하고..
이걸 알면 바로 ‘멸(滅)’이다.
멸하는 방법이 뭐냐? ‘도(道)’다. 팔정도다. 계정혜다.
어려운게 있나?
호흡도 마찬가지다.
호흡을 보라! 하는데 .. 호흡을 어떻게 보라고?
들이쉬고, 들이쉬고.. 계속 들이쉬어 !! 내쉬지 않고 계속 들이쉬기만 해봐 고통스럽다. 내 쉬고 싶어!
항상한 게 있나?.. 무상하다. 무상하고 고고, 무아다.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적 복락은 끝이 없다. 만족이 없다는 말이다.
만족이 없으니 계속 탐하고, 집착하고, 화가 난다.
하늘, 사람으로 태어나길 추구하는 사람은 뭘 해야 하나?
보시와 지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난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그게 뭐냐? ‘법의 비’다. ‘중생수기득이익’한다.
성문승은 사성제를, 연각승은 12연기를, 보살승은 보살행을 추구하는 대로 받아간다. 법의비는 평등하다 차별이 없다.
근기따라 받는다는데, 그렇다면 ‘근기’는 뭘 얘기 하는 것 같은가?
뭘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이라는 거다.
근기는 정해진 게 없다. 그릇의 크기는 정해질 수가 없다. 정해져 있다면 말이 안된다.
원하는 것이 크면 상근기, 작으면 하근기...
복을 추구하면 복 밖에 받을 수 없는 하근기다. 아무리 많아도 결국 떨어진다.
크고 작은 것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떨어진다.
처음 절에 올 때 떠 올려보라,
물질적 복락을 추구하기 위해 왔다.
거기다가 무상,고,무아를 얘기하면 이해하고 받아 들일까?
그릇이 안 맞다
조그만 그릇에 많이 받으려면 되나? .. 하근기다. 구하는 것과 틀린다.
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근기! 간장종지다. 성문,연각승은 자기 성불을 추구하니 중근기, 보살은 중생구제까지 하겠다는 대승으로 나아가는 상근기다.
‘근기’는 결국 내가 원하는 만큼이다. 그래서 ‘중생수기득이익’이다.
내려주는 것은 적게, 많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받는다.
근기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행정진하라!’
아무리 부처님이 보배비를 가득채워도 내 그릇이 크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수행없이 저절로 커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성제!! 팔정도!! 계정혜!! 그 속에다 들어 있어 있다.
알아야 수행을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인연을 짓는가? 다
복의 인연, 성불의 인연, ~~
결국 어떤 인연을 짓는가? 다
지금까지 인연으로 내가 여기 있는 ‘나’ 다.
그러니 내가 어떤 인연을 지었느냐?에 따라 그릇이 달라진다.
복의인연은 끊임없이 ‘윤회’요
중생의 인연을 지으면 인간으로, 축생의 인연을 지으면 축생으로..
누가 그릇을 주는게 아니다. 수행자체가 내 그릇을 바꾸는 것이다.
내 뿌리로 돌아가려는 것이 ‘참회’라 하지 않았나!
그러니 공부하는 것도 근기따라 한다.
수기설법이라 하지 않았나!
부처님도 근기따라 가르친다.
가르침이 잘 들릴 때 그때는 ‘감흥’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내가 감흥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내 마음이 일치하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나! 따로 없다. ‘중생수기득이익’ 이다.
중생이라는 자성이 없다. 공성이다. ‘제법공상’
오온이 모여서 사람 ‘중생’이다. 분리하면 없다. ‘무아’다.
인연에 따라 모였다. 그러니 ‘나’라고 할 만한게 있나! 없다.
인연따라 또 흩어진다. 다 자성이 없다.
“공성”이다.
본래적멸,
있는 그대로 적멸이다.
이 몸 없어져도 있는 그대로 적멸이다. 모든 법이 다 그렇다.
‘법’, 세상을 이루는 구성요소, 모두 우주만물이 공성, 적멸이다.
그래서 중생이라 할 게 없고, 법이다.
법계다. 나도, 너도 다 인연따라 모인 세계, 법계다.
알고보면 ‘법’ 그것 뿐이다.
단지 우리는 법으로 존재 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다 ‘니’다 .. 분별을 일으킬 뿐이다.
산다, 죽는다... 망상이다.
그러니,
언어도단이다. 불가사의 하다.
이걸 깨달으면 부처다.
못 깨달으면 중생이다.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이 있겠지!
중생이라는 성품이 없다. 번뇌가 중생이다.
‘번뇌’라고 따로 없다.
밖에 나가면 별도로 ‘번뇌’가 있는 게 아니다.
번뇌가 왜 생기나?
지혜가 없으니 생기지!
어둠이 왜 생기나? 빛이 있으니 생기고, 어둠이라는 실체가 있나! 없다.
번뇌라는 본성이 없다. 실체가 본래 없다.
번뇌망상 일으키고 있을 때는 모른다. 깨닫고 나면 번뇌인줄 안다.
꿈속에서 꿈도 마찬가지다. 꿈을 왜 꾸나! 누워 자니까 꿈을 꾸는 거지.
깨어있으면 ‘꿈’도 없다.
번뇌를 일으키니 불성이 가려지지 실체가 없다.
꿈깨고 나니 꿈은 어디로 갔나! 실체가 없으니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다
인연으로 생겼으니 생긴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다.
불생불멸이다. 본래 생기지 않았다.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다 구제해도 구제한 게 없다고 한 이유다.
중생이라는 것도 한 생각이다.
일체중생이 어디서 나왔나? 불성에서 나왔다.
‘마음공부’ 마음공부 하는데 뭘 이루고 알아내는 것인가?
결국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거다.
‘응여시생청정심’이라고 금강경에 말하지 않았나!
청정심에 머문다, 구하고, 싫어하고, 밀어내고, 끓어 당기고.. 이런 마음이 없는 것이 ‘청정심’이다.
눈으로 보고 좋다, 싫다 일으키는 것 ‘분별망상’이다.
보는데, 듣는데, 맡는데... 보면서 안 봐야 하고, 들으면서 안들어야 하고, 맛보면서 맛보지 않고... 좋고, 싫고,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묵언’하나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연결지어 생각하라!
그렇게 수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