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비인부전 /2]
정경부인 방에서 십여 명 여인들의 체취와 진동하는 지분 냄새속에서,
허준이 가까스로 해방되어
안채 중문밖을 나서자,
허준을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와
임오근이가 이번에는,
성대감의 아들 형제와 그 항렬의 문중
선비들이 따로 술상을 마련해 놓았노라며 기어이 작은사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람 저 사람 권해오는 미주속에서
이날 허준은 대취했다.
보름 동안을 옥죄어 있던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형제가 솔선하여 반상을 파탈하여 스스럼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준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기 손으로 위중한 병자를 살려냈다는 자부심과 가슴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의원으로서의 보람 때문이었다.
해가 져서야 그 주연은 끝났고,
마련된 비단 이부자리 속에 쓰러진 뒤
허준은 자꾸만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임오근의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귓전에 속삭이는 그 얘기는 성대감댁의
작은댁 누군가가 노자라는 명색으로
두어 뼘이나 될 돈똬리를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동전이 아니고,
은전 같다는 소리였으나 잠속으로
떨어져가는 허준의 어렴풋한 의식에는
내일은 산청으로 달려,
스승 유의태를 만난다는 기대와 어머니와 아내와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리라는
기쁨뿐이었다.
허준은 꿈을 꾸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자꾸만 믿기지
않아서,
새삼 불안에 떨고 또 갑자기 기뻐 날뛰는 가족들과 함께 웃고있는 자기의 모습들이, 또,
제자들에게 냉담하기가 얼음장 같은
유의태에게선 더 이상 기대를 버리고
돈버는 길로 나서자 유혹해 마지않던
부산포의 얼굴들이 두서없이 그의 꿈속을 비껴가곤 했다.
그 비몽사몽 속에서 허준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뜨자,
그 머리맡에는 은제 쌍첩촛대가 켜지고
그 아래 뚜껑덮인 꿀물 한 사발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자기는 지금 꿈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깨어가는 허준의 머릿속은
스승 유의태가 이번에 왜 하필 자기를
이곳에 보내주었는지,
새삼 그것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모시러 왔던 성대감의 아들 형제에게
병자의 위중한 증세를 들은 그 유의태는
그때,
'믿어볼 만한 아이'
라는 한마디로 성대감 아들 형제에게
자기를 데려가도록 이르면서 분명히
자기에게도 수삼 일 후에 뒤따라가마
했었던 것이었다.
'한데도 임오근을 보내어 하회를 알아
오라며 스승님은 오지 않았어 ... 왤까?'
결과는 성공이다.
그러나 일이 실패했을 경우,
뒤따라오마 해놓고 아니 오는 유의태
또한,
문책을 못 벗어날 것은 자명한 일인데
유의태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냉랭한 사내는 이번일에
허준 자기의 침술이 성공할 것을 미리
꿰뚫어보고 있었단 얘기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수제자'
친아들인 도지를 젖혀놓을 수야
없을 테지만,
이번 일의 성공으로 허준 자기는 임오근을 젖혀놓고,
수제자의 상징인 병부잡이가 될지 모른다.
그건 그냥 병부의 정리가 아니다.
유의태가 출타할 때면,
도지와 함께 직접 병자들을 다루어도 되는 권한의 위임도 뜻하는 것이다.
순간,
허준의 귓속에서는 과거 유의태가 한
또 한마디가 왕왕 울리기 시작했다.
"비인부전이랄밖에!"
옛날,
부산포가 십여 년 허송세월을 억울해하여 이젠 자기도 나이로 보아서도,
더 이상 제자 노릇을 할 수 없으니
고약이 됐든 무엇이 됐든 의원으로서
한 가지 살길이 될 확실한 재주를 전수해주십사 애걸했을 때,
유의태는 이 말 한마디를 내뱉고
방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부산포도 다른 제자들도 처음 그 뜻을 몰라 쑥덕거리는데,
그 부산포를 달래러 술상을 차려낸
자리에서 도지가 그 말 뜻을 설명해줬던
것이다.
'비인부전'이란,
중국의 서성 왕희지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서
스승의 안목으로 사정하여 딱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예나 도를 전해줄 수 없다는
사제간의 냉엄한 도리를 일컫는 경구임을.
'그건 곧 그 적임자이면 수업 기간의
다과에 구애됨이 없이 수제자로 발탁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눈앞에 임오근의 처절한 눈빛이 다가들었으나,
그러나 허준은 스승의 허락하에 마음놓고 병자를 볼 수 있는 수제자의 자리를 뜨겁게 갈망하는 자기를 깨달았다.
'비인부전'
허준이 다시 그 말을 뇌는데,
방문밖에 인기척이 났고,
만석이라 불리는 안채늙은 하인이 들어와 정경부인께서 안채에 저녁 진지상을
차리시고 그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계시노라는 전갈이었다.
식욕은 당기지 않았으나,
거절할 수도없는 허준이 소세를 마쳤을 때 아직 술이 덜 깬 임오근이가 나타나,
가외로 자꾸짐이 늘어나 짐을새로
두 보따리로 쌌노라고,
묻지도 않은말을 했고,
그도 허준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밀양과 고령으로 출가해 있던 이십대 중반의 정경부인의 두 딸이
친정어머니의 쾌차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허준을 보자,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예를 표했고,
큰딸은 합장까지 해보이며,
감사와 은혜란 얘기를 거듭하여 오히려
허준이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이어 그 딸들이 스스로 움직여 들여오는 나주 호족반 위에 놓인 그릇들은,
흔히 쓰지 않는 새 그릇 새 접시인 듯했고, 그 맛깔스러운 찬과 안주에
술병도 하나 곁들여졌는데,
정경부인이 손수 허준에게 한잔을 따랐다.
저녁상이 끝나갈 때,
성대감과 작은아들이 건너와 화제가
다시 허준의 신상에 미쳤을 때였다.
정경부인은,
낮에 집 한 채를 마련해주마는 대감의
제의를 받아주면,
자기도 고맙게 여기겠노라며 새삼
허준에게 권했다.
허준이 다시 고사하자 정경부인은,
"그럼 대체 자네의 소원이 뭔가?
웬 고집이 그리 억센가."
하고,
사뭇 서운한 얼굴로 허준을 건너보았다.
"큰 소원 없사옵니다.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 의원으로 생업을
세우려 결심했사오니,
작심한 10년 수업 중 아직남은 3년을
더욱 정진하여 혹,
기회가 닿는다면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것이 큰 소원이옵고...."
"자넨 결코 미천한 심지가 아닐세.
나도 제법 사람 가릴 줄 알아."
하고,
정경부인이 얼른 부정했을 때
술잔을 들었던 성대감의 손이 멎었다.
"내의원이라니?
궐내에 있는 내의원 말인가?"
"그러합니다."
"한데 취재란 뭔가?"
하고,
생소한 말을 듣는듯이 허준을 건너보았다.
이에 말참견할 기회를 못 갖고 어깨가
처져 있던 임오근이,
자기들 의원으로 입신하려는 자들에게
내의원 취재야말로 양반가문의 자제들이
알성급제(왕이 임어한 자리에서의 과거 합격)만큼이나,
바라고 바라는 출세의 길이라는 것과
내년 3월에도 내의원 취재가 있다고
도지와 함께 진주에서 들어온 소식도
부연했다.)
그러자,
조용히 임오근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성대감이,
"그래 ..."
하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럼 자네 내년에라도 그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게 어떤고?"
했다.
"무슨 뜻이온지?"
"자네가 뜻만 세운다면,
내가 내의원 취재에 자네가 입격이 되도록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하이."
허준이 뻥해졌고 임오근의 눈이 화경처럼 떠졌다.
"대감께 이 사람을 도와줄 그럴 무슨
방도가 계시오니까?"
정경부인의 말이었고.
"내의원이라면,
내게 낯선 곳도 아니오.
내의원을 관장하는 것은 도제조인데
소재 그 사람이 혹 맡아 있는 게 아닌가
여기는데 ..."
"소재란 뉘시오니까?"
작은아들의 물음에,
"우의정 노대감의 호니라.
지난날 그 사람이 대사헌으로 있을 제
나와 교분이 두터웠느니라."
" ...!"
허준은 숨을 삼켰다.
"나하고는 임의로운 사이일뿐더러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재주없는 사람을 억지로 천거하는 것이
아니요!
마땅히 재주있는 사람을 천거한다함은,
어떤가 자네의 뜻은?"
허준의 입이 얼른 떨어지지 못했다.
시임 우의정이며 내의원을 총괄하는
도제조에의 소개장이라면 하늘의 별을
따는것과 같다는 내의원 취재 합격을
이미 반이나 따놓은 것이나
같을지 모른다.
아니 반이 아니라 합격이 보장되는
것인지도 ...
이때,
허준의 침묵을 답답하게 여긴 정경부인이,
"대감께선 말씀 함부로 하시는 분
아니시네.
또 평생을 환로에 계시며,
육조의 판서를 두루거친 분이시니
내 소견으로도 그 글월을 받아가면
큰 도움이 되리라 믿네."
했다.
임오근이가 여부가 있습니까.
도움뿐 아니라,
내의원 도제조께서 밀어 주시면
합격은 틀림없습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어 성대감을 향해 입을여는 허준의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대감마님께서 감히 그러한 소개의 글을 써주시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집 한 채를 주마해도,
외눈하나 꿈쩍도 않더니,
그까짓 글 몇 자 적어준다니 고개를 숙이는가."
하고,
성대감이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임오근이 무릎걸음으로 성대감에게 다가들며,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또한,
그 내의원 취재에 평생의 소망을 걸고 있는 자이오니 감히,
소인에게도 한 자 천거의 말씀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성대감의 시선은 그 임오근에게 가 있지않고 허준에게 말했다.
"자리가 파하거든 건너오게."
하더니,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임오근에게 말했다.
"자네의 의술은 내가 지켜본 바가 없으니 함부로 천거의 글을 써줄 수 없네."
그날 밤,
허준은 큰사랑으로 건너가
성대감이 초서로 적은 석 장짜리 소개의 글을 지켜보았고,
그 서찰의 말미에서 성대감의 호가 '온재' 라는 것을 알았다.
내일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