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놀
알님 : 나도 알아요.
그리고 나도 화를 낼 줄 안다구요.
하지만 난 세상을 향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지는 않아요.
차라리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게 낫지, 그렇지 않나요 ?
난 세상 사람 모 다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으면 좋겠어요.
자기 자신은 뭘 그리 잘했고, 뭐가 그리 깨끗하다고 ...
모두가 다 더럽게 썩어가는데 혼자서만 잘난 척, 남을 공격해서는 안 되잖아요 ?
최소한 사회가 그런 식으로 굴러가도록 하게 한 무책임의 죄는 있으니까요. (사이)
뭐라 말했나요 ?
지기 : 아니예요. (사이)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알님 : 극단적인 게 나쁜 건가요 ?
지기 : 그런 건 아니지만, 알님의 말 속에서 뭐랄까
커다란 분노 같은 감정을 느껴서요.
말은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말하지만 ...
알님 : 난 그런 감정 몰라요. (사이)
자 이제 됐죠?
내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제 지기님이 이야기 해볼래요?
지기님은 고민이 있죠 ? 뭐죠 ?
지기 : 고민은 있지요.
알님 : 이야기 해보세요.
혹시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
지기 :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알님이 아닌데, 알님이 되겠다고 자원하지도 않았고
알님 : 아하, 그러니까 끝까지 지기만 하시겠다 이거군요.
지기 : 그런 건 아니지만, (사이) 좋아요.
지금 이 순간 내 고민을 이야기 하죠.
가장 큰 고민은 알님을 더 깊이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염려입니다.
알님 : 그건 지기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지기 : 저에게 지금, 이 문제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고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알님 : ...... ?
지기 :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알님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잘못하다가는 서로 말꼬리만 물고 늘어지는 지루한 싸움이 될 여지도 있고,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힘든 과거로 알님을 되돌려 들어가게 할 수도 없고,
또한 여기서 그만 둘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는 겁니다.
알님 : 제가 생명굿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찾아왔나 봐요.
지기 :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생명굿 마당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예요.
알님과 내가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최선으로 진실한 만남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훨씬 더 중요하니까요.
알님 : 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속이는 건 없었다구요.
지기 : 압니다, 알아요. 솔직하고 진실했다는 것
그러나 감정은 증발해버린 몇가지 사실들만,
그것도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 하셨죠.
그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저도 좀 용기를 가지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
예컨테 직격탄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지기로서 마지막 카드라고나 할까,
말하고 나서 후회할런지 모르겠지만 ... 말을 해야겠습니다.
(술을 한 잔 따라 마시고 나서) 깜깜한 밤에 산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사람들이
많은 걱정과 염려의 말을 쏟아 놓지만,
정작 무서워하고 있는 귀신이나 유령이야기는 언급을 회피하는 것처럼
우리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어떤 한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꺼려하고 있다는 걸 아시겠어요 ?
알님 : 그게 뭔데요 ?
지기 : 그놈 ! 아버지 !
알님 : 그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네요.
지기 : 그것 보세요. 호칭 자체를 피하잖아요.
알님 : 그 누가 마음에서 이미 지워버린, 존재하지 않은 문제를 말하고 싶겠어요.
지기 :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죠.
아니 오히려 더욱 빈번하게 떠올라서 ...
알님 : 그만두라니까요.
지기 : 말도 못 꺼내게 한다는 건 그만큼 말의 의미가 크다는 걸 모르겠어요 ?
그 만큼 그 어떤 감정이 ...
알님 : 아니,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예요.
단지 상대를 안하고 싶을 뿐이라구요.
난 그 놈과 다르니까요.
지기 : 그래요, 아마도 그 놈은 감정과잉에 걸린 놈일테구,
따라서 알님은 감저 차단, 아니 감정 불감증에 빠져들었겠죠.
알님 : 지금 날 약 올리는 거예요 ?
네 ? 도대체 요점이 뭐죠 ?
뭘 말하려고 하는 거지요 ?
지기 : 그 만큼 그 놈이 알님에게 미친 영향이 엄청나다는 것이지요.
바람이 쎄게 불수록 나뭇잎도 크게 흔들리듯
그 놈의 매질이 강할 수록 , 그에 대한 반응
화가 크게 치밀어 올라와야 하는데
당신은 거꾸로 정반대로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변했어요.
아무 일 없는 듯 ...
그 놈과 다른 길, 그 놈에 대한 분노가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차갑게 식어버린 ...
알님 : (목소리를 높여서)
당신이 나에게 지금 하는 태도가 어떤지 알아요 ?
당신은 지금 날, 전부 알고 있는 듯, 날 단정 짓고,
당신 마음대로 규정짓고, 감정이 어떻고 냉정하고 차갑고 ...
당신 뭐예요 ? 그러고도 뭐 ? 날 돕는다고요 ?
지기 :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어둠의 공포는 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예요.
오히려 더욱 무섭기만 할 뿐이죠.
차라리 그럴 바에는 어둠 안에서 그걸 직시하고 견뎌내면,
어둠은 하나 둘 씩 사라지고 ...
알님 : (큰 소리로)
당신이 어둠을 알아 ?
그 어둠, 그 공포를 알기나 하냐구.
지기 : (북을 치며 창을 하듯이 천천히)
어둠의 공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
그건 어린시절을 겪은 모든 사람에겐 근원적 공포지.
알님 : (장구를 집어 세차게 두드리며 지기에게)
와, 그러고 보니 지기, 당신이야말로 편견 덩어리, 왕고집일세.
여보세요, 어둠에 대한 공포를 그딴 식으로 일반화시키는 아니라구,
깜깜한 우물에 빠져 본 적이 있어 ?
아님,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골방에 갇혀서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 ?
아니면 좁은 궤짝 안에 갇혀 숨이 헐떡이는 공포를 네가 안다고 ?
지기 : (여전히 목소리를 높여서 노래하듯이)
그러니까 내 말인즉슨, 그걸 드러내야 된다는 거지요.
숨기고 덮고 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
알님 : 어떻게 ?
생각하기조차 싫은데,
꿈에라도 나타날까봐 두려운데 ...
그래... 두렵다 ...
그래서... 기억에서 지우려고 ... 했다. (사이)
누가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다시 떠올리겠냔 말이야.
(장구를 더욱 세게친다)
지기 : 안 된 말이지만 그럴수록 세상 만천하에 드러내야지,
밝은 빛 속에서 당장은 불필요한 고통을 다시 맛볼지언정,
당장은 미칠듯이 괴롭고 도망가고 싶지만 ... 그럴수록 ... 드러내야지 ...
그럴수록 그걸 폭로하고 ...
그 곳으로부터 벗어나야지. (북을 더욱 거칠게 쳐댄다)
알님 : (장구를 더욱 세게 두들기면서)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미 부러진 다리, 병신이 다 된 몸을 햇빛 속에 내놓는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뿐 ...
지기 : 그래요.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그건 겉만 보고 속은 못 보는 우매한 짓이예요.
다리가 부서졌다는 나의 현상, 나에게 일어난 고통만 보면 그렇지만
그 고통을 일으킨 자는 누구요 ?
왜 그자를 감싸안는거요 ?
왜 자신의 고통에만 ...
이건 단순히 고통받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르겠소 ?
내가 나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가해자는 거꾸로 활개를 치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
알님 : 그만, 그만하세요.
(사정없이 장구를 두드리고 나서 장구채를 내던진다)
지기 : (알님에게 급히 다가가서)
알님, 힘들더라도 단 한번만 관심을 바꿔봐요. 네 ?
(의자 하나를 알님 앞에 가져다 놓고)
이게 알님이라고 해요.
그런데 (다른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알님 의자 위에 올려 놓으며)
이자가 알님을 수없이 밟고 때려요.
(두번째 의자를 가지고 알님 의자를 두드린다)
그리고 알님은 자신만의 세계,
그 고통 속에 갇히어서 오랜 세월 이 자에 대한 생각을 지워왔어요.
알님 : 제발 그만하라니까요. (사이, 작은 목소리로)
내 입이 더러워져요.
지기 : 알아요, 하지만 말해야 돼요.
한번 더 더러워져야만 해요.
안 그러고서는 영원히 못 벗어나요.
두 번째 경험은 첫 번째 경험을 치유한다는 말이 있어요.
아니, 답답한, 말 못한 심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한결 가벼워진다는 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예요.
알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