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개나리 동산 응봉산이다.
서울 성동구 응봉동과 금호동에 걸쳐 있는 응봉산은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의 명소다.
개나리 꽃말은 희망이다. 개나리꽃이 피면 마음도 따라 밝아진다.노란 빛깔도 그렇고 귀여운 모양새도 그렇다.
지금 완연한 봄이다.화려한 옷을 입고 찾아온 봄이다.
이제 응봉산은 그 봄을 맞아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개나리 명산이 되었다.
만개한 개나리가 바윗덩이로 이뤄진 암팡진 봉우리를 휘감고 있다.
그 절경이 중랑천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물빛조차 노랑 물결로 일렁인다.
여기에 간간히 산 밑으로 지나가는 기차가 어우러진 모습은 바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한강 자락을 굽어보고 있는 응봉산은 중앙선 전철인 응봉역에서 내려 걸어가면 된다.
응봉역 1번 출구로 내려와 왼쪽에 자리한 응봉빗물펌프장과 주택가를 지나면 응봉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응봉역에서 응봉산 정상까지는 1.2km 정도다.응봉역에서 바로 보이는 빗물펌프장을 지나면 갈래길이 나온다.
펌프장을 끼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10m가량 지나면 왼쪽에 오르막길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주택가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암벽등반공원도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노랗게 피어난 개나리 행렬이 이어진다. 화사한 꽃이 만발한 길을 만난다.
응봉산에 개나리를 심은 것은 1980년대 개발 이후 산자락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울시는 1987년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조림사업의 일환으로 1만 그루의 개나리를 심었다.
응봉산은 암반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이어서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몹시 메마르다.
개나리는 이런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서 심은 것이다.
응봉산 동쪽에는 석재(石材)를 채취하던 바위절벽이 있다.이곳을 손질하여 인공암반등반시설을 설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등반 훈련을 하면서 체력 증진에 힘쓴다.
응봉산은 해발 9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산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매의 머리 모양을 닮았으므로, ‘매봉’ 또는 ‘응봉(鷹峯)’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산 이름을 매봉 또는 응봉이라고 했다.
조선 태조는 즉위 4년(1395년)에 이곳에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매사냥에 쓸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태종․세종도 이곳에 와서 매사냥을 즐겼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이곳을 찾아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작은매봉 동쪽 기슭에 있는 한강 일대를 이르는 입석포(立石浦)다.
매봉 밑의 바위가 한강을 향하여 깎아지른 듯이 서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선돌개라고도 하였다. 이 바위 밑에는 동쪽에서 오는 한강과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이 합하여
천연적으로 낚시터를 이루었다.‘입석조어(立石釣魚)'라 하여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인 명승지로서
유명하였다.
응방(鷹坊)이 있던 응봉산 꼭대기에서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중량천을 만난다. 살곶이 벌이 장관을 이룬다.
살곶이,응방에서 꿩사냥을 하면서 화살을 쏘면 그 화살은 뚝섬 내 도요연에 떨어졌다.화살이 꽂힌 곳, 살곶이벌이다.
살곶이 벌은 살곶이 목장이 있었다. 상왕 태종이 중량천을 건너는 것을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살곶이다리다.
응봉산 동남쪽 언덕부터 입석포의 절경은 펼쳐진다. 입석포 끝자락에는 성수대교가 자리를 자리하고 있다.
경강(京江) 구간에는 3대 백사장이 있었다.광나루 뚝섬 용산강가의 백사장이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뚝섬백사장은 뚝섬나루에 있었다. 그 뚝섬에는 국립 말목장이 있었다. 남북으로는 자양동에서 청량리 배봉산까지
동서로는 아차산에서 마장동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뚝섬 말목장이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다.옛날에 그 자리에 저자도(楮子島)가 있었다.
저자도는 금호동과 옥수동 남쪽 한강에 있었던 모래섬이다. 이 섬은 고려시대부터 명승지로 주목을 받았다.
저자도는 조선 초기부터 왕실 소유였다.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로 불리웠다. 이 섬은 멀리서 보면 아이가 춤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무동도라고도 하였다. 경관은 아름다웠고 토질은 비옥했다.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해 예부터 많은 문인이 이 곳을 찾아 노래하였다..
고려 말 한종유의 소유였으나 조선개국과 함께 왕실 재산으로 귀속되었다.
이 섬에는 닥나무가 많아서 닥점이라는 마을도 있었던 곳이다
"홑적삼에 짧은 모자로 염못가에 앉으니
언덕너머 수양버들 서늘한 바람 불어보내네
산책하고 돌아오니 저 산에 달떠오르는데
지팡이 머리에는 아직도 연꽃 향기 남았구나"
고려때 저자도에 별장을 두었던 한종유 시이다.
세종은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저자도를 하사했다.
공주의 아들 안빈세가 정자를 지어 세도가와 시인묵객을 불러들였다.
저자도에 초대받은 한명회가 그 풍광에 매료되어 자신은 압구정을 지었다.
훗날 지어진 황화정과 함께 동호3경으로 불렸다.
숙종(1672~1720)때 사람으로 산수승경을 좋아하던 문인 삼연 김창흡은
이 저자도에 정자를 지어놓고 남한산을 오가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근세에는 개화파의 거두 금릉위 박영효가 이 섬에 정자를 지어 동지들과 자주 의담하였다고 했다.
역대의 명소요, 승지며 실록의 장이기도 했던 저자도가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풍경은 잃어버린채 모래와 자갈만 쌓이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강남지역의 무분별한 개발로 모래와 자갈마저 건설업자들에게 빼앗겨
흔적마저 사라져 버렸다.시간이 지나면서 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 옛날 온조성이 있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