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용어 중에 학습된 무력감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1967년 미국 심리학자인 마티 셀리그만이란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밀폐된 유리 상자에 개를 넣고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개가 탈출할 구멍이 없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또 전기 충격을 가합니다. 개는 여전히 펄펄 뜁니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나중엔 뛰지 않습니다. 뛰어도 소용없다는 게 학습된 것입니다. 이제 전기 충격을 가해도 찔끔하고 말아버립니다. 심지어는 뚜껑을 열었어요. 펄쩍 뛰면 이제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어요. 그런데도 움찔하고 말아요. 나는 뛰어도 안된다, 여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이게 학습되어 버린 겁니다. 이제 뛰면 되는데, 방법이 있는데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력감이 몸에 젖어 버렸어요, 생각 속에 젖어 버렸어요. 이건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학습된 것이라는 겁니다.
병든 아들의 문제를 갖고 한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간구하는 것이 묘합니다. 뭘 좀 하실 수 있으면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무력감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 다녀도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력감이 학습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학습된 무력감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진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무력감에 빠지면정말 중요한 일에 대해서 의미를 갖지 못
합니다. 그러니 내가 정말 해야 할 중요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나중엔 감각도 사라져버립니다. 이걸 깨뜨려야 싱싱해집니다. 신앙도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감에 빠지는 이유는 일부분으로 전체를 결정해 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내가 실패한 것 그것을 갖고 내 인생 전체가 실패했다고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안되고 저기서도 안되니 이제는 어디서도 될 수가 없다? 이렇게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여자가 목사님을 찾아 봐서 ‘세상의 남자들은 다 도둑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 분이 몇 사람의 남자를 만나고 하는 말일까요? 상담하는 목사님도 남자인데요?
조심할 것입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부분입니다. 그 체험으로 전체를 결정해 버리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십니다. 자기의 눈으로 보지 말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사건을 만나면 내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볼 것입니다. 내 실력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력으로 보면 가능합니다. 믿음이란 내 눈으로 보던 것을 바꿔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싱싱해지는 비결은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무력감에 빠지면 기도가 게을러집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우리의 삶과 신앙이 무력감을 깨뜨림으로 늘 싱싱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