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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남소설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현우
단편소설 돌확에 핀 꽃 박래녀
나뭇가지 사이로 나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내 얼굴을 관통한다. 이 푸른빛이 도는 따뜻한 빛 한 줄기가 추억의 강을 건너게 한다. 먼 옛날 철없이 행복했던 시절의 아기자기했던 삶이 바로 저 햇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한 생의 종착역에서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다. 바로 어린 시절이다. 가난해도 가난을 몰랐고,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던 순수했던 한 때, 내게도 사심 없이 행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호박샘 곁에서 살 때였다. 햇살처럼 오롯이 나만을 위해 간직된 곳, 희미해지는 기억의 파편을 주워 땜질을 해서라도 완성하고 싶은 그 시절, 나는 절실했다. 뭔가 써야 한다. 써야 한다. 내 속에서 솟구치는 열망을 풀어내야 한다. 나는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 끝날 때가 됐는데. 지금 풀어놓지 않으면 안 돼.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것은 세상에 없다. 무슨 일이건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고, 나는 그 때와 장소를 봉합해서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뭉쳐 두었던 것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일기 중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 * 마음속이 뜨거울 때 글을 써라. 농부가 소의 멍에에 구멍을 뚫으려면 화로에 달군 쇠로 재빨리 멍에로 쓸 나무를 지져야 한다. 일각이라도 지체하면 쇠로 나무를 뚫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달궈진 쇠는 즉각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생각을 기록하는 일을 뒤로 미루는 작가는 식은 쇠로 멍에에 구멍을 내려는 사람과 같다. 그런 작가는 독자의 마음을 태울 수 없다.
맞는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호박샘을 다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솔직히 내 안에 든 두려움을 꺼내 세상에 펴 보이는 것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늦기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쏟아내고 싶은데 용기가 없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죄스러워서 금세라도 눈 딱 감아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저지른 죄질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된 것도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같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아이, 상금이를 생각하면 숨이 턱 멎는다. 한 순간의 실수라고 하기엔 그때 나는 참으로 용의주도했다. 내가 무슨 침묵을 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사자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그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상금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낮잠이 들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뿐이라고 했다. 어머니 역시 우리 아들은 잠이 한 번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고 역성을 들었다. 사건이 종결되고 어머니가 ‘니 진짜 암 것도 본 거 없나?’라고 물었을 때 시침 뚝 떼고, ‘진짜 나는 아무것도 몰라. 책보다 잤어.’ 그렇게 대답했었지만 나는 안다. 내 양심의 한 쪽이 예리한 칼날에 찔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진주 촉석루 너머 북장대 아래 호박샘 곁에 살았었다. 호박샘은 아직 그 곳에 있을까. 파란 이끼가 끼고, 은빛 돌 꽃이 화사했던 호박샘, 돌확을 땅에 파묻은 것 같았던 작은 샘, 누군가가 쌓았을, 아니면 원래 그렇게 생겨났을 수도 있는 돌담 사이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깎이고 파여 깊은 절구통을 박아놓은 것 같았던 호박샘, 늘 맑은 물이 흐르는 호박샘 곁에서 그 물을 먹고 사는 성 밖의 빈민가 산동네 사람들, 가파른 바위벽에 붙은 작은 게딱지같은 집에서 주인으로 혹은 세 들어 살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따사롭고 풍요로웠던 사람들, 그 사람들 목을 축여주던 샘, 호박샘은 내 기억에서 한자도 더 자라지 않고 퇴색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의 호박샘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흐르고, 새벽부터 크고 작은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 있던 사람들, 그들이 보내던 정겹던 인사와 환한 웃음, 물 한 바가지를 떠 뒷사람에게 돌리며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목 먼저 축이라고 하던 사람들, 바가지로 퍼내는 물만큼 금세 채워지던 샘, 샘에서 흘러나온 물은 돌담으로 만들어진 좁은 도랑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빨래터에 모여 수런수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다시 아래로 흘러 남강에 다다랐다. 북장대 아래 깎아지른 절벽을 휘돌아 남강의 품에 안기는 호박샘의 물줄기는 내 심장을 관통하는 줄기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날 아침 어머니는 문간방 여자를 불러 손을 잡고 지렛대를 받쳐 만든 난간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의 손에는 따뜻하게 감싼 달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 달걀로 여자의 눈 주위를 둥글게 문질러 주었다. 퉁퉁 부어 푸르게 멍든 꽃위에 둥근 달걀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봉창 구멍 사이로 어머니와 여자의 행동거지를 조용히 관망했다. 지난밤의 광란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칠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싶었다. 남자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새벽 댓바람을 마시며 진주 역전으로 청소 리어카를 밀고 나갔을 테니까. 남자는 이슥한 밤에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동네 개들의 잠을 몽땅 깨워 놓고 귀가를 하면 밤새도록 여자를 쥐어뜯고 두들겨 패다가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숨죽인 여자의 흐느낌과 비명도 서서히 잦아들고 세상이 고요하게 가라앉으면 그제야 나도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어머니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혀를 찼다. 어떤 때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아무래도 새댁을 내보내야겠는데. 불쌍해서 어쩌누. 셋방살이 면할 처지도 아니고, 저 화상이 변할 리 만무하고, 오다가다 만난 인연이라는데. 저러다 저 참한 새댁이 도망질이라도 하면 그 사단을 우짤꼬. 그 불똥이 우리한테 튈까 무섭다. 저런, 저런, 꼴에 저건 또 뭔 짓인고. 실컷 두들겨 패 놓고. 어머니가 혀를 찰 때는 문간방에서 여자의 신음소리가 요상하게 들렸다. 끙끙 앓거나, 잉잉 쥐어짜는 여자의 신음소리거나 헉헉거리는 남자의 신음소리거나. 신기한 것은 그렇게 남의 잠을 방해해 놓고 남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며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저 남자 얼굴을 꼭 봐야지. 벼르다가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신기하게도 남자는 첫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대문을 나선다는 것이었다. 더 신기한 것은 남자가 잠이 들면 도둑고양이처럼 일어나 해장국을 끓이고, 아침 밥상을 준비한다는 여자였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저렇게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여자를 북어 패듯이 패도 새벽에 일어나는 남자나, 밤새도록 남자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여자가 밥상을 차려 내는 것이나 다 젊은 혈기라고, 젊음이 좋긴 참 좋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런 어머니도 서른 중반의 한창 농익은 나인데 꼭 진액 다 빨린 쪼글쪼글 늙은 뒷방 할머니 같았다. 아침이면 푸른 멍 꽃을 달고 남자가 먹고 간 밥상을 들고 나와 살그머니 부엌에 들어가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여자를 불러 쪽마루에 나란히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주고 받고는 했다. 언니가 동생에게, 친정어머니가 딸에게 하듯이 여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어쩌겠냐?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 캤는데. 이것도 다 전생의 업이다. 새댁이 참고 살아야제. 애가 생기면 또 달라지는 것이 남자란다. 아직 애가 없으니 팔자 고칠 수도 있다만 전생의 업으로 만난 인연은 도망간다고 풀리지 않는단다. 한 남자 구제해 주는 셈치고 살아보면 후제 옛날이야기하며 웃을 때도 있을게다. 죄송해예. 진짜 죄송합니더. 여자는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며 기어든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사람살이가 별 건가. 우리 집이니까. 내가 괜찮으면 괜찮은데. 옆방 아가씨하고 뒷방 총각에게 미안해서 그렇지. 다행인것은 옆방 아가씨가 참해서 새댁 마음을 이해해 주기 때문에 고마운 거라.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데 말없이 참아주는 걸 보면 참 괜찮은 아가씨야. 뒷방 총각은 한 성깔 하는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잔업이 잦아 자네들 난리 치는걸 자주 안 본다는 거지. 욱 하는 성질에 쌈이라도 붙어 봐. 칼부림 나지. 술만 깨모 저이가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하는데. 그 술이 웬수라예. 워낙 일이 더럽고 고되다보니 술 안 먹고는 못한다 카네예. 한 잔 두 잔 하다보면 필름이 끊긴다고. 죄송합니더. 참 자네도 착한 사람일세. 그렇게 당하고도 남편이라고 감싸안는 걸 보니. 어머니는 웃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여자가 부러웠을지 모른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밤이면 슬그머니 베개를 안고 내 옆에 와서 눕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았다. 숨이 막히게 나를 껴안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어머니와 분리 되었다. 내 방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허접한 것들을 쟁여 놨던 옆방을 치워 내 공부방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드디어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어머니로부터 독립이 유일한 꿈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들 한 명을 의지하고 사는 어머니는 누가 봐도 아직은 탱탱한 삼십 중반의 과부였다. 내가 일곱 살 때, 국수 공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지은 지 오래된 기와집 한 채와 국수 공장에서 준 얼마간의 위로금이었다. 우리 집은 진주성 서쪽 성벽 아래 호국사 앞의 산비탈에 살았다. 지금 진주성 서문이 있는 곳이다. 남강을 등지고 판자촌이 들어선 그 산비탈 집은 호박샘 바로 옆이었다. 문간방 앞의 좁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진주성 서문이 나오고, 그 위에 호국사가 있었다. 지금도 호국사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 집 쪽에서 보면 호국사 서북쪽 가장 높은 곳에는 북장대가, 호국사 서쪽으로는 서장대가, 호국사 뒤쪽으로는 촉석루가 있었다. 호박샘과 우리 집을 중심으로 아래위 계단식 판자촌이 들어선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오래전 일이라고 했다. 성안 사람이 아니라 성 밖 사람으로 분류되어 살던 비루먹은 동네에서 그나마 내 집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위로금으로 먹고 살 방법을 찾았다. 방을 여러 개 들여 세를 놓는 방법이었다. 우리 집은 마당이 꽤 넓은 집이었는데 어머니는 안채를 중심으로 대문간부터 빙 둘러 크고 작은 쪽방을 넣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댓돌 위에 작은 쪽마루 하나를 달아내 세를 놓았다. 셋방 식구를 거느린 주인댁이 된 어머니는 아주머니가 아니라 주인아씨나 주인마님이었다. 노부부는 깎듯이 어머니를 주인마님이라 불렀다. 우리 집 마당은 자꾸 작아져 둥근 것도 타원형도 아닌 하늘을 집 가운데 들여놓았지만 다행인 것은 화단이 있다는 거였다. 애초에 어머니는 화단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도 방을 넣을 생각이었지만 내가 싫다고 했다. 화단에는 아버지가 심은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나는 그 석류나무를 아버지 보듯 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우리 집에 세 든 사람과 공동으로 쓰는 장독간과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장독간 옆에는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자외(재래종 오이)도 올리고, 나팔꽃도 올렸다. 방 두 개와 네 모 반듯한 마루와 부엌이 있는 안채는 어머니와 내가 기거하는 곳이고, 나머지 안쪽의 집은 공장에 다니는 총각 한 명이 세 들어 살고, 그 옆방에는 일수놀이 하는 노인 부부가 살고, 문간방에는 새댁이 살고, 문간방 옆의 가장 작은 방 하나에 부엌 하나는 시청에 다니는 아가씨가 세 들어 살았다. 어머니는 월세를 받아 생활을 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과외공부를 시킬 정도는 되었다. 나는 주말이면 공무원 누나에게 영어와 수학을 배웠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월세 대신 과외 선생으로 그 누나를 들였던 것 같다. 문제는 내 공부방에서 문간방이 빤히 보이는 쪽으로 봉창 하나가 달려 있다는 거였다. 나는 밤마다 문간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 봉창의 창호 문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놓고 살펴본다는 거였다. 아들, 깼으면 퍼떡 일어나 학교 갈 준비 해야지. 밥 차려 놨으니 빨리 밥 무라. 까딱 하다간 지각하것다. 시내버스 올 때가 다 돼 간다. 도시락 까묵지 말고 잘 챙겨라. 문간방 쪽마루에 앉은 어머니에게는 투시경이 달린 모양인지 안채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모조리 보고 있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면서 어머니와 여자가 나누는 대화에 당나귀 귀가 되어 있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곤 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1970년대는 진주성안에 사람이 살았다. 하루에 몇 번씩 시내버스도 다녔다. 촉석루와 호국사를 빙 둘러 내려가는 시내버스는 자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 일곱 시 사십 분에 있는 통학버스를 놓치면 지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통학버스를 놓친 날은 북장대에서 서장대까지 달리기를 했다. 진주성은 온통 푸른 숲이었다. 책가방을 들고 호젓한 가로수 길을 달리는 맛도 꽤 괜찮았지만 숲길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훈육주임 선생의 사랑의 매가 더 무서웠으니까. 지각생은 무조건 운동장에서 토끼뜀 열 바퀴에 엉덩이에 피멍이 들도록 사랑의 매 다섯 대를 맞아야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고, 그 매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 *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와서 살게 된 것이 언제였더라.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여자 애가 문간방 여자 집에 들어왔다. 뜻밖에 내게도 장난감이 생긴 것이다. 우리 집 셋방 식구 중에 나 외에 어린애가 없었는데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한 명 생긴 것이다. 나를 오빠야! 라고 불러주는 아이, 나만 보면 배시시 웃는 다섯살짜리 꼬마.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꼬마는 소리 소문도 없이 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남자의 아이라고도 하고, 여자의 아이라고도 했는데 누구 아이인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고 대충 그 방에 식구 한 명이 늘었다는 것만 알았다. 상금이라는 여자애는 양쪽 볼에 보조개가 폭 파인 귀여운 아이였다. 잘 웃고, 잘 울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진 할머니가 그 아이 손을 잡고 물어물어 우리 집을 찾아왔다고 했단다. 할머니는 아랫방 여자랑 장시간 밀담을 나누더니 아이를 재워놓고 할머니 혼자 돌아가더란다. 아들, 여동생 하나 만들어 달라더니 잘 됐지? 앞으로 니가 오빠 노릇 톡톡히 해야겠다. 불쌍한 아이니까 잘 데리고 놀아야해. 공부 하라매? 공부를 하루 종일 하냐? 주말에 집에 있을 때 같이 놀아주라는 거지. 아이가 어린애답지 않게 붙임성이 좋아.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애 어른 같어. 그 때가 시월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었지 싶다. 주말인데도 공무원 누나에게 붙잡혀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다. 과외 시간은 보통 밤이었다. 누나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내 방에 와서 한두 시간 같이 공부하는 것이 일과였는데. 밑바닥을 기는 수학을 좀 끌어올려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누나는 황금 같은 주말 오전을 내게 할애한 것이라고 했다. 그 날은 누나 방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는 누나의 냄새가 좋았다. 화장을 하지 않지만 누나 방에 가면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내 방은 아무리 닦아도 꼼꼼한 노린내가 나는데. 누나 방에는 꽃향기가 났다. 누나는 세숫비누 냄새라고 했다. 누나에게서 여자 냄새를 처음 맡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이유도 모르고 사타구니가 뻣뻣해지는 것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기도 하는. 누나는 연애도 안 해? 주말인데. 집에도 안 가? 나의 까탈에 누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 때문에 누나 데이트도 포기했다. 각오해. 이번에 성적 안 오르면 나도 너 포기 할 거다. 너의 어머니께 면목이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 열심히 해 보자.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는 호박샘 아래에 있는 빨래터에 가서 꽂혔다. 동네 아주머니들 몇이 둘러앉아 빨래를 하는 모양이었다. 탁 탁 탁 방망이질 소리와 빨래 헹구는 물소리 장단도 예술이지만 그 사이 여자들 뚝배기 깨지는 소리와 소곤소곤 귀엣말 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가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대충 끼어 맞추어 보면 이런 내용이었다. 상금이를 두고 가면서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한 말은 이랬다. 철없는 저 어린 것 좀 잘 봐 주이소. 내가 인자 키울 심이 없어서 지 애비한테 매끼고 가는 기라예. 우리 큰 아가 저 아만 데리다주고 오모 저거랑 같이 살자 캐서 늙은 기 자슥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우리 상금이, 불쌍한 우리 상금이. 이람서 우는데. 내가 딱 억장이 무너지더라. 새댁이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거는 아이라 카데. 그 집이 요새 며칠 조용해서 밤에 잠을 잘 잔다 싶더마 다 이유가 있었네. 하모, 새댁 남편이 요새는 술을 입에 안 댄다쿠네. 새댁이는 그 아가 이뻐 죽것다 카고. 참 오랜만에 새댁이가 웃는 소리를 듣는다 카이. 그 아가 아부지, 옴마 함서 까르르 까르르 웃는데. 듣기만 해도 좋더라. 또 이야기가 있다. 새댁이가 입덧을 하는 기라. 새댁이가 올매나 좋아하는지. 그 아가 복덩이라서 저거한테 복을 싸 온 기라카네. 애 안 들어선다고 그리 애를 태우더마. 그 아가 오고 올매 안 있어 들어선 기라 안 하나. 삼시랑이 시샘을 하모 애를 점지 한다카더이 그 말이 참말인 갑더라. 우야든둥 좋은 일이제. 문간방에도 단풍이 곱게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단풍잎이 다 떨어지면 또 삭막한 겨울이 오겠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단풍이 곱게 들수록 사람들 마음이 더 행복감으로 출렁인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 1975년 우리 집에도 흑백텔레비전이 들어왔다. 산동네 판자촌에서 흑백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몇 집 되지 않았다. 과수댁인데다 세든 사람이 많은 우리 집 텔레비전은 우리 것이 아니라 동네 할머니들 장난감이 되었다. 밤이면 이 집 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러 우리 집 안방으로 모였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이자 동네 소문도 따라와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공부에 방해 된다는 이유로 심심찮게 문간방 누나 방에 가서 죽쳤다. 동네 사람들은 아홉시 뉴스가 끝나면 모두 돌아갔지만 그들이 남긴 소문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우리 집 마당에 갇혀 뱅뱅 돌았다. 주로 이런 숙덕거림이었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 강제로 내쫓는 담서? 국유지라고 나가라칸다는데. 돈도 없는 사람들이 오데로 가노. 큰일이다. 소문에 박물관 짓는다 카기도 하고,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라 카기도 하고.쥐꼬리만한 보상금을 준다카기는 하더라. 단체로 독거촌을 지어 이사 시키 줄기라고도 하고. 나라에서 하는 일 누가 막것노. 대통령이 하라쿠모 해야 한다는데. 안 그랬다간 잽히 가서 뼈도 몬 추린단다. 삼청교육댄가 오데 갔다오모 병신 안 되모 정신병자 된다 카더라. 말도 함부로 몬 하는 세상이라 카이. 우리는 성 밖에 산깨네 괜찮을라나. 그러다가 이야기 끝에 꼭 후렴처럼 붙는 것이 문간방 여자와 상금이의 근황이었다. 문간방 새댁이는 와, 뗄레비 보로 안 오노? 뗄레비 보는 것보다 머스마 보고 있는 기 더 좋은갑다. 그 머스마 땜세 상금이 아부지가 술주정뱅이를 면했다 아이가. 술 딱 끊고 일만 한다 카드라. 집에도 일찍 오고, 상금이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 겉애가꼬 맘을 몬 부치는 것이 안 됐제. 아가 듣고 있다. 말 좀 단디 해라. 여섯 살이 된 상금이는 안방구석에 앉아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다. 누가 자기 이야기를 하든 말든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무심한 자세였다. 상금이는 아예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고 살다시피 했다. 밥도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먹을 때가 많았고, 잠도 어머니 옆에서 자는 횟수가 많았다. 상금이는 눈썰미가 있었다. 한번 본 춤은 금세 익혔다.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이 춤을 추면 신기하게도 금세 배워서 할머니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했다. 할머니들이 아무리 귀여워하고 어머니가 친 손녀처럼 챙겨도 상금이 얼굴에 피는 마른버짐은 갈수록 많아졌고, 보조개 들어간 볼은 호박샘보다 더 깊어졌다. 어머니는 혼자 독차지하던 사랑을 동생과 나누려니 힘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문제는 문간방 여자가 아들을 낳고나서 기세가 등등해졌다는 거다. 상금이를 바리데기처럼 부렸다. 참 조신하고 인정스럽고 얌전하다고 소문났던 여자가 어쩌면 그렇게 돌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여자의 마음 같았다. 상금이는 제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수시로 여자에게 맞았다. 밥을 굶기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것도 예사고, 설거지를 하고 걸레질을 하는 것도, 호박샘에 가서 양동이에 물을 떠다 독을 채우는 것도 상금이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여자에게 조곤조곤 이르기도 했다. 어린애를 그리 모질게 부리면 안 된다고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고, 처음 먹은 마음이 끝까지 가야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무라도 여자의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상금이 꼴이 딱보기 싫다는 거였다. 여자도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해 괴롭다고 했다. 반면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함박꽃이 피었다. 아들이 벌써 뿔뿔 기어 다닌다고 겨우 다섯 달 됐는데 올되는 것 같다고 입이 귀에 걸렸다. 대신 상금이는 오뉴월 땡볕에 보릿대 말라가듯 말라갔다. 쌍꺼풀 진 큰 눈은 더 움푹 들어가고, 보조개 진 볼 역시 더 깊어졌다. 웃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상금은 어린애답지 않게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상금이는 수시로 아이를 등에 업었다. 여자가 푼돈을 벌기 위해 남의 집 빨래를 해 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예 부엌데기에 애보기 하녀로 전락했다. 상금이는 겉늙어버린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였다. 여자는 주로 오전에 한두 시간 성안에 들어가 일을 한다고 했다. 부잣집 청소를 해 주고, 이불 같은 큰 빨랫감을 맡아 빨아 주는 허드렛일이라 했다. 진주성을 감싸고 흐르는 남강천변은 천혜의 놀이터였다. 삼복 더위를 피해 몰려온 점잖은 어른들은 시원한 촉석루에서 더위를 식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빨래를 한다는 명목으로 물가에서 더위를 식혔다. 진주성에는 누각이 여럿 있었다. 누각 아래에서 남강천변으로 내려가는 샛길은 어디에나 있었다. 샛길을 따라 강에 다다르면 어디든지 앉아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이 주로 빨래터로 이용하는 곳은 진주 촉석루 아래였다. 의암 바위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서면 온통 너럭바위였다.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 바위는 의기 논개의 전설이 서린 바위다. 진주 사람이면 누구나 익히 알듯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현감이 었던 최경회 장군의 부실이었던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내려 죽은 자리에 있는 바위다. 최경회 장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자 논개는 기생으로 변장해서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장의 승전잔치에 잠입한다. 왜장 게야무라 노구스케의 환심을 산 논개는 그를 유인해 열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끼고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한다. 의암 바위 밑에는 지금도 왜장의 넋인 구렁이와 논개의 넋인 거북이가 싸우고 있기 때문에 깊은 물속에 있던 의암 바위가 조금씩 움직여 촉석루 아래 강가에까지 다다랐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장골이 훌쩍 뛰어 건너기만 하면 의암 바위에 올라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의암바위와 촉석루 사이에는 푸른 강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렀고, 그 사이로 작은 배가 다녔다는 설이 있다. 그 곳은 너럭바위가 물밑까지 너르게 깔려 있어 빨래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굳이 빨래 돌을 구할 필요가 없는 천연의 빨래터라 성안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수시로 그 곳에 모여 빨래도 하고, 멱도 감았다. 그 곳은 여름이면 온통 물 놀이터가 되곤 했다. 가끔 수영 사고가 나곤 했지만 늘 여자와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문간방 여자는 그녀의 남편이 출근한 후면 아이를 상금이 등에 업혀주었다. 아이가 잠들면 방에 뉘어 놓고 기저귀랑 옷가지를 빨아 널라고 했다. 아이를 울리기만 하면 점심도 저녁밥도 없다고 윽박지르며 총총히 사라졌다. 상금이는 칭얼대는 어린 동생을 업고 여자가 사라진 성 쪽을 바라보며 골목을 오르내리다가 아이가 잠이 들면 집에 들어왔다. 아이를 방안에 뉘어 놓고 빨랫감을 가지고 호박샘 아래 빨래터로 갔다. 눈물 콧물 찍어내며 조막손으로 빨래를 했다. 마음씨 좋은 동네 아주머니라도 만나면 빨래가 환하게 웃었다. 상금이 대신 아주머니가 빨래를 빨아 대야에 담아주기 때문이었다. 그 때가 한여름이었다. 나는 방학을 했고, 방학은 무료했다. 무료를 달래기 위해 출근하고 없는 누나의 방을 애용했다. 내 방이 덥다는 이유로, 호박샘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도랑물 소리가 들리는,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그 방을 아지트 삼아 무료를 달랬다. 주로 누나의 냄새가 밴 베개를 껴안거나 누나의 옷장을 열어 냄새 맡기였다. 한 번은 누나의 속옷을 뒤적였다가 출입금지 딱지를 받았었다. 문에 자물통을 걸어 잠가버린 것이다. 누나에게 싹싹 빌었다. ‘어디 갈 때는 꼭 문 잠글 것. 책 외에 내 물건에 손대지 말 것.’ 다시는 누나 물건에 손대지 않겠다고 각서를 쓴 후에야 누나에게서 자물통의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방학을 하면 선행학습을 하느라 몇 개의 학원을 몰아치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쁘지만 그때만 해도 방학은 신나게 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성 밖에 있는 중안초등학교(내 모교다.)에 가서 선배후배 뒤섞여 공을 차거나 만화방에 가서 죽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만화책을 한 보따리 빌려 와 누나 방에서 시시덕거렸다. 만화책을 다 보고 심심하면 누나의 서재에 꽂힌 삼성문고판 소설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명작이란 것이 어찌나 까다롭고 어려운지 몇 장 읽다가 팽개치기 일쑤였지만 그 때 읽은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제인 에어, 테스, 유리알 유희, 부활, 대지, 왕비열전 등등 꽤 화려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그 날, 어머니는 서장대나 북장대로 바람을 쐬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동네조차 텅 빈 듯 개짓는 소리조차 없는 날이었다. 나는 누나 방에서 창문이랑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엎드려서 책에 푹 빠져 있던 중이었다. 내가 읽던 책은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주인공 네홀류도프가 카츄사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는 대목이 아니었나 싶다. 절정에 이르는 소설 속에 푹 빠져있는데 문 밖에서 상금이의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야, 책 보나? 내 좀 보래이. 우리 상옥이 깨는지 좀 봐 조라. 기저귀 빨로 가야 되는데. 나는 고개를 들고 축담에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상금이의 눈과 마주쳤다. 상금이의 눈이 금세 축축하게 젖을 것 같았다. 어린애 같지 않은 눈, 처연한 눈, 노천명 시인의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의 눈, 그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았어. 상옥이 깨모 니 부를게. 다시 고개를 책에 박았다. 상금이가 빨래를 하러 호박샘 빨래터로 가고, 나는 책에 빠져 있는데 옆방 아이는 금세 깼다. 방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나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호박 샘 쪽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상금아, 상옥이 깼다아. 상금이는 힐끗 내 쪽을 돌아봤지만 다시 빨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이는 더 까칠하게 울고 나는 화가 났다. ‘저 가시나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해? 칵 쥑이 삐끼다.’ 성질이 버럭난 나는 방에서 나와 옆방으로 갔다. 마침 눈물콧물 범벅이 된 아이가 방바닥을 발발 기어 문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이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아채 옆구리에 끼고 그 길로 대문 밖으로 나갔다. 호박샘 아래 빨래터로 갔던 것이다. 런닝구에 기저귀만 낀 5개월짜리 아이는 자지러졌다. 상금이는 하얀 기저귀를 물에 헹구다말고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나를 봤다. 나는 상금이의 가슴에 상옥이를 콱 안겼다. 상금이는 상옥이를 두 팔로 안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빨래터에 주저앉았다. 가시나 이기, 니 내 말이 말 같잖나? 니 동생이 깼다 안 캤나? 퍼떡 와야지 머 하는 기고? 니 동생인께 니가 알아서 해라 임마, 가시나가 째려보모 니가 우짜낀데? 다 빨았는데. 쪼맨만 봐 주모 되는데. 오빠가 쪼맨만 봐 주모 되는데. 내가 니 동생을 와 봐 주노? 내가 니맹키로 애 보는 가시나가? 엉덩방아를 찧고 퍼질러 앉은 제 누나의 품에 안긴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나와 제 누나를 요모조모 살피다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울지 마, 인자 누야가 있응께 울지 마, 착하지 우리 상옥이’ 하면서 상금이는 엄마처럼 아이를 달랬다. 나는 돌아섰다. 집으로 오다가 돌아보니 상금이는 아이가 차고 있던 기저귀를 뽑아내 씻고 있었다. 상금이 옆에서 아이는 대야에 들어앉아 물장구를 치며 까르르 까르르 웃고 있었다. 상금이는 빨래를 하면서 물을 아이에게 끼얹었고, 두 아이는 마주보며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집으로 온 나는 다시 누나 방에 엎드려 책을 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창밖이 너무 조용했다. 꼭 태풍 오기 전의 착 가라앉은 하늘처럼 세상이 갑자기 고요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자지러지게 울던 매미조차 숨을 죽인 듯 매미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호박샘 아래 빨래터를 봤다. 상금이가 도랑에 들어가 서있었다. 옷이 흠뻑 젖은 채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아랫도리가 벗겨진 아이는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아이가 앉아 놀던 대야가 저만치 떠내려가 있었다. 상금이는 아이를 물가에 눕혔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금이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이옆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가지 않았다. 내가 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해가 바짝 하늘 중앙에 붙었다. 눈을 감고 누웠지만 등에는 줄줄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비몽사몽간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상옥아!’ 갑자기 귀청을 찢는 문간방 여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년이 우리 아들을 죽였어. 이 년아, 우리 아들 살려 내.’ 나는 살그머니 누나의 방을 빠져나와 내 방으로 들어가 잠든 척했다. 한동안 골목이 시끌시끌하더니 호루라기 소리도 나고,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 1975년 8월 15일, 텔레비전에서는 광복절 행사가 진행 중이었고, 중간에 문세광이 쏜 총탄에 한 나라의 국모였던 육영수 여사가 순직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흑백텔레비전이 빨아들였던 날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5개월 된 한 남자애의 죽음은 별것도 아닌 사건이 되었다. 다만 여섯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는 그 날, 표정도 말도 잃어버렸다. 다음 날, 죽음이란 것도 살인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상금이는 제 아버지의 손에 끌려 고아원으로 갔을 뿐이었다. * 진주성은 정비 사업에 들어갔다. 1976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성안(안골)과 성 밖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처럼 집과 땅을 가진 사람은 보상금을 받았지만 문간방 여자처럼 세 들어 살던 사람은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떠나야 했다. 한꺼번에 딸과 아들을 잃어버린 문간방 남자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문간방 여자는 집을 나갔다. 우리도 신안면 의 한 농촌 마을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나는 늘 그녀를 생각한다. 돌확에 핀 꽃 같았던 어린 상금이, 호박샘 같았던 보조개를 지녔던 여자아이,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것 때문에 오십 평생을 행복과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면 거짓이 아니다. 어머니께도 말하지 못한 사실, 상금이 동생의 죽음에는 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끝내 말할 수 없었던. 그때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남강 천에 빨래를 가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려고 하면 어머니는 회초리를 들고 나를 못따라오게 닦달하곤 했었다. 어린애는 절대로 물가에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던 어머니 말씀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어린 상금이, 표정도 말도 잃어버리고 두려움만 가득한 눈망울로 제 아버지 손에 끌려 나가던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래녀 MBC 전원생활체험수기 공모 대상 수상 <농민신문>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제8회 여수해양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 현대시문학 시 등단 수필집 『푸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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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옮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이 많은 작품을 옮긴다는 게 쉽지 않으실 텐데.
꾸준한 노력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