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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올바른 신앙생활과 성경에서 보는 본보기
2023-05-31.
1. 여러분은 견진성사를 준비하면서, 무엇이나 어떤 것이 각자의 삶에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개인이 원하는 것과 교회공동체에서 원하는 것을 어떻게 연결하겠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선물이라고 표현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삶에 실현될 선물이 아니라, 내 욕심일 때가 많습니다. 바라는 것이 충족되면 다른 것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을 생각하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는 일은 아니라고 해도, 개인의 만족이나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바란다고 해도, 우리가 갖는 생각은 중요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로 세번째 순서로 말씀드릴 내용은 성경에서 신앙생활의 본보기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본보기를 말할 수 없기에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범위를 구별하여, 성경의 내용을 살피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올바른 본보기를 배운다면, 우리는 언젠가 예수님에게서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마태 25,21) 놀라운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4. 신앙인으로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 자세와 모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본보기를 말하거나 찾기 전에,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스스로 대답을 정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바른 대답을 찾는 것은 우리가 사는 동양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교육의 환경을 찾아서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을 이사했다는 것이지만, 우리가 바른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다음에 좋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세상의 삶에서 신앙인이 드러내는 신앙생활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신앙(信仰)’에 관한 설명은, ‘어떤 대상을 절대시하여 그를 받드는 일’이라고 풀이합니다. 신앙이라는 낱말을 이렇게 해석하면, 그 일에 생활이라는 말을 더할 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과 일치하며 잘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면, 그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더불어 삶의 무게에 눌려 사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6.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자세도 신앙인으로 잘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인의 군사’로서 거침없이 내 신앙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힘을 청하고 하느님께서 그 힘을 주시는 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견진성사를 청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실제 생활과의 관련도 생각하고 실천하는 다짐이 내 삶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애쓰는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7. 신앙인으로서 삶의 본보기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오늘의 시간에서, 세상의 모습을 살피면서 우리가 도움이 되는 요소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친숙하다고 말할 이웃이나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본보기를 배우려고 한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다 알만큼 내가 전체로 보지 못한다는 일과 전체를 볼 만큼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일이 가장 큰 원인이고,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소설을 통해서 그 내용을 배우려고 한다면 작가의 능력(!)과 그가 기록한 내용에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만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도 어떤 사람의 기록이고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성경의 내용은 신앙을 담은 기록이고 삶의 자세가 하느님의 뜻을 대하면서 만든 것이니, 우리가 보는 자세가 달라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8.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외국말로 쓰였는데, 여러 지역으로 하느님에 관한 신앙이 전달되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 지방에서 쓰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자가 번역된 것이라고 하니, 우리가 그 글에서 사람의 감정까지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담아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해석했으니, 그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9.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을 인간이 옆에서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뜻을 담아 인간에게 알려주셨고, 그 말씀을 만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삶에서 실천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량이나 표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시기와 배경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는 손해가 피해가 된 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중요한 일입니다. 자녀가 나의 삶에 귀중하다는 뜻으로 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어떤 뜻인지 다 안다고 하겠지만, 같은 감정의 바탕이 아니면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10. 그렇다면, 성경이 알려주는 삶의 지침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알아들어야 할 내용들은 무엇인지를 잠시 생각할 시간입니다. 사람이 항상 고민하거나 또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변화나 발전은 현재의 삶에 고민하고 더 나은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달라집니다. 있는 세상을 그대로 즐기기만 한다면 발전과 발명은 꿈같은 일입니다.
11. 우리가 물에 물을 타거나, 술에 술을 탄 듯이 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벗어나서 세상의 일이라면 그 사정은 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아무런 생각이 없이 세상을 즐기는 사람들일 뿐이고, 삶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의 지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바오로 사도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런 말씀을 썼습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2디모테오 3,16-17)”라고 썼습니다. 이러한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볼 시간입니다.
13.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이 자기들의 삶에 관련이 있다면서, 살았던 일을 적습니다. 역사적인 표현을 빌려서 쓴 일기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기에 보통 슬픈 일, 기쁜 일, 남들에게 보여서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일들도 기록하고 또한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으나 내 삶의 모습을 바꾸게 한 사건들을 때로는 아주 길게 적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서라고 할 수도 있는 성경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활동하신 일, 사람이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의 작은 머리를 들어 반발하고 덤비다가 호되게 벌을 받는 일, 너무나 창피해서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든 일,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실천했던 일,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경고의 성격을 담아 지침을 주고자 한 일, 지금의 삶은 어렵지만 어려움을 이겨낸 욥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일들을 성경은 적습니다.
14.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에서 삶의 본보기를 찾자는 내용을 말한 것도 이러한 의도입니다. 그러한 기록인 성경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 모습을 살피자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하는 내용이 우리의 현실에 관한 기록도 아니고, 우리의 삶에 관한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고, 기록된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과연 성경이 기록한 정신대로 길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얼마나 멀리에 떨어져 사는지, 다시 돌아갈 방법으로 제시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한지를 듣고, 우리의 삶의 한 부분 부분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15. 이러한 삶의 본보기를 보인 성경의 인물들을 볼 차례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는 다르지만, 성경에 적힌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라보게 될 인물들 가운데는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고, 하느님의 눈의 밖에 나서 죽음의 길을 재촉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한 번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은총을 당장 거두시지는 않지만, 인간이 하느님의 축복이 과분하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못한 일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6. 아담과 하와 (창세기 1-2장) : 구약성경의 가장 처음에는 창세기가 있습니다. 이 창세기의 1장-2장은 인간과 세상의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일을 마치도 옆에 앉아서 누군가가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형식으로 적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최초의 인간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셨고, 그들이 살 장소로 완벽한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 안에서 아담과 하와는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성경에는 뱀으로 등장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한 연약한 인간으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사람이 가진 선한 의지를 잘 살리고 죄를 짓지 않을 방법을 다짐하는 것보다 최초 인간의 범죄인 원죄(原罪)로 우리가 엉뚱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데에, 생각이 머물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욕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때,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누리도록 내 앞에 마련된 완전한 축복도 차버리는 것이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삶은 말하고 있습니다.
17. 노아 (창세기 6장-9장) :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악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인간에 관한 하느님의 첫 번째 심판이 창세기 6장--9장에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와 세상의 정화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상이 악하고 비뚤어졌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내가 가진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푸념입니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뜻대로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세상을 향해서 삿대질하거나 푸념하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하느님을 향하여도 아무런 기도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8. 그러나 창세기 6장--9장에는 비뚤어진 세상에서도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으로 노아를 말합니다. 노아도 이 세상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을 테지만, 그는 세상을 탓하지 않고, 굳건한 삶의 심지를 하느님께 두고 삽니다. 삶의 기준을 확실하게 세우고 산 것입니다. 그 덕분으로 하느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는 순간에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납니다. 세상을 탓하기에 앞서서 사람이 갖는 삶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는 성경을 쓴 사람의 마음 씀씀이와 하느님의 연민을 느끼게 해주는 내용이 바로 이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19. 아브라함 (창세기 12장 이하) : 엇나가기 시작한 인류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하느님께서 사람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활이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걸음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의 행보(行步)에 사람의 의지로 동참한 이가 바로 아브람, 또는 아브라함입니다. 이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창세기 12장 이후에 있습니다. 고향과 가족과 친척을 떠나서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곳,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무모한 발걸음을 옮긴 사람이 바로 아브람입니다. 세상의 나이로 젊지도 않은 75세가 되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20. 한편으로 생각하면, 무모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말하면서 사람을 부른 하느님의 초대에 아무런 이의(異意)도 달지 않고 움직였다고 하여, 아브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을 하느님이 받아들이셨기에, 또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했기에 그의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아브람처럼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례 때에 이름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서양식의 개념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붙인 이름을 본명(本名-Spiritual name/First name)이라고 합니다만,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인 우리는 적어도 아브라함이 드러냈던 삶의 본보기를 기억하고 생활의 한 부분에서 드러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21. 사울과 다윗 (사무엘 상권) : 이제는 시대를 건너뛰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의 구심점으로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자세를 버리고 인간을 으뜸으로 삼았던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사람들이 역사에서 하느님을 밀어내고 왕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이제 삶의 중심에서 하느님을 밀어내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 인간은 자기의 모습을 볼 줄 모르고 모든 것을 사람의 뜻대로 하려고 애씁니다.
22. 그중에 대조되는 사람이 첫째 임금 사울과 둘째 임금 다윗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의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첫째 왕으로 추대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으로 보기에 그만큼 키가 크고 훤칠한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의 체격을 갖춘 사람(1사무 10,23)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삶에 관한 표현에 ‘사람은 얼굴값을 한다’는 소리가 있듯이, 그는 하느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불레셋(=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하던 전투에 앞서 하느님에게서 떠납니다. 자기는 하느님을 기다리며 기도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하느님은 자기에게 응답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는데, 얼마나 정당한 소리이겠습니까?
23. 이때부터 그의 삶에는 풍전등화의 풍파가 들이닥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삶에서 불안을 느낄 때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재물에 눈을 돌리고 그것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생각하는 일보다는 인간의 편리에 따라 적당히 하느님의 계명을 해석합니다. 결국에 사울은 무당을 찾습니다. 그렇게 지낸 사울임금에 비교해서 다윗은 삶의 자세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24. 행동으로 비교하면, 다윗도 사울만큼이나 잘못된 일을 하려고 애를 쓴 사람이기는 합니다. 색욕이나 정욕에 눈이 멀어, 부하의 아내까지도 자기의 부인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한 행동이 하느님의 진노를 사는 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하느님께로 돌아섭니다. 같이 동고동락하던 부하장수들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성군(聖君)으로 기억됩니다. 이 두 명의 임금을 비교하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택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기 바랍니다.
25. 하느님을 충실하게 따랐던 여인, - 유딧......
어느 종교에나 공통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신앙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성 신자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남자의 품격을 떨어뜨리겠다는 의도는 아니지만, 현실도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유딧이라는 여인’은 유다왕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브갓네살)가 홀로페르네스라는 장수를 시켜 유다를 침략했을 때 등장하는 여인입니다.
26. 하느님을 모독하며 유다를 점령하러 온 장수와 군대를 여인의 혼자 몸으로 위기를 극복한 여인입니다. 군대의 군인들과 남자들은 무서움에 떨었고 꼼짝달싹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인 일과 비교하면, 용감한 여인의 표상으로 드러낼 만한 분입니다. 언제 어느 날까지, 우리가 정한 시각까지, 하느님이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침략하러 온 장수와 군대를 찾아가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계획을 지도자들은 세웠습니다. 이때 유딧은 백성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도록 권고합니다.
27. “베툴리아 성(城)민의 지도자이신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주께서 우리를 며칠 안으로 도우시지 않는다면, 이 도시를 우리 원수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하느님 앞에서 맹세한 말은 옳지 않습니다. 도대체 여러분이 무엇인데, 오늘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여러분은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까? 지금 여러분은 전능하신 주님을 시험하지만, 결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깊은 곳을 알아내거나 그 생각을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을 만드신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그분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분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적의 장수에게 거짓 항복하는 모습으로 왔다가, 적의 장수를 없애는 전과를 올려 유대민족과 백성을 구해냅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28.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통하여 신앙인들에게 권고하십니다(마태21장).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 산을 향하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여인의 본보기가 바로 유딧의 이야기입니다.
29, 그러면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이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할 차례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몇몇 사람들을 예로 살핀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앞에서 내 삶에 점수를 매긴다면 과연 몇 점이나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30. 주일에는 미사에 참여하여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은총을 청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친구들과의 교분을 핑계로 삼아 ‘하느님은 이따가 산에 다녀와서 시간이 나면 찾아뵙지 뭐(!) 하느님은 너그러우신 분이니 화는 내시지 않을 거야!’ 하며 하느님을 뒷자리로 돌리고 사람의 일에 우선권을 두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또는 만난 사람들과 함께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긋는 성호를 누가 볼까 봐 무섭게 후딱 해치우거나 배꼽의 주변에서 하는지 하지 않는지 모르게 하며 신앙을 드러내기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31. 본인과 자녀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기를 싫어하거나 성당에 갈 때도 마치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가 가기 싫어서 뒷발로 버티는 짓을 하는 자세와 비슷하게 가거나 이다음에 열심히 모아놨다가 죽을 때, 한 번에 회개하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32.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을 후회하거나 어떻게 하면 그것을 뒤로 물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 신앙심의 증가를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의무로 생각하여 주일에 한 번씩 성당에 왔다가 가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전혀 합당한 본보기를 보이지 않거나, 자녀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서도 그 자녀들의 신앙심의 증진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생각이 없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끝으로 집에 성경은 있지만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록 그 성경에 손조차 대지 않아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말씀드린 우려와 걱정보다는 남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제대로 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모습에서 어느 쪽에 더 큰 중요성이 있는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33. 결론을 대신하여 (에제키엘 36,17-18. 21) :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결론을 대신하여 에제키엘예언서 36장에 나오는 하느님을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고국에 살고 있을 때, 고약한 짓들을 해서 그 땅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땅에 피를 흘리고 우상을 섬기느라고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 나의 울화를 터뜨렸다. 그래서 그들을 뭇 민족들의 가운데 흐트러뜨려 여러 나라에 쫓았다. 못된 짓을 한 만큼 그들을 벌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명예를 회복하고야 말리라. 나는 너희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내 이름 때문에 행동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하게 씻으리라. 너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으리라.”
34. 에제키엘서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효과는 충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이 말을 알아듣고 신앙생활을 하며, 견진성사를 준비하고 받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가까이하고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샘물을 퍼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