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계당중건기사(俯溪堂重建記事)
부계당(俯溪堂)은 바로 우리 문중의 분암(墳庵)이다. 삼종증조인 진사(進士) 춘곡(春谷)의 기사(記事)에 대강 이르기를 동의 북록(北麓)이 천관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봉(鳳)이 높이 날고 란(鸞)이 빙 날아돌아서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돌려 주구봉에서 형제가 분파하여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 결후(結喉)하고 이마를 당겨 바로 내려와 서북간에 앉으니 위에 일영(一塋)은 7대조고 습독공(習讀公)의 배인 의인신씨(宜人申氏)의 묘요, 조금 낮게 조금 서쪽으로 쌍영(雙塋)은 6대조고 참봉공(叅奉公)과 의인최씨(宜人崔氏)의 묘요, 그 동쪽으로 일영(一塋)은 6대 본생조비(本生祖妣) 김씨(金氏) 묘다.
정봉(頂峯)이 비스듬히 동으로 뻗은 일절(一節)은 북을 등지고 가로 맺었으니 나의 증왕고(曾王考) 현감공(縣監公)과 숙인(淑人)정씨(丁氏) 쌍영(雙塋)이 있으니 바로 부계당의 뒷 조금 서쪽으로 개와처(開窩處)가 이곳이다. 대강 그 처음에는 당이 없었고 다만 초가집 수간일 뿐이었는데 왕고(王考)께서 항상 여기서 거처하면서 묘를 살피고 쓸고 하였다. 그 뒤에 조금 그 제도를 넓혀 기와를 덮었으며 숙종(肅宗) 을유(乙酉) 1705년 봄에 이르러 넓혀서 꾸미니 족부인 휘 세침(世琛)과 세기(世琦)께서 실로 주장했고 을유년(乙酉) 뒤 영조 갑진(甲辰) 1724년에 족부인 휘 세최(世最) 숙부인 휘 세린(世璘) 종형(從兄) 명성씨(命成氏) 족형 명익씨(命益氏)가 책임하여 그 규모를 거듭 새롭게 하였다.
아! 부계당을 세운지 일찍 백년이 못되었는데 인가(人家) 3대의 손때를 걸쳤으니 어찌 그리도 빠른고? 두렵고 근심하는 마음이 황폐해지니 특히 상로(霜露)를 밟으며 부모를 생각하는 슬픔뿐만 아니라 금고를 부앙(俯仰)함에 어찌 갱장(羹墻)의 사모함을 이기겠는가. 금년이 영조 정묘(丁卯) 1747년의 해다. 갑진년(甲辰)까지는 또 다시 24년이 되었으니 당의 무너짐도 또한 이상하지 아니하다. 이에 일문중의 부형이 자제들의 능히 주간(主幹)할 자를 선택하여 개보수할 일을 맡기니 종형 명래(命來)씨와 족형 명호(命虎)씨와 종질 상겸(相謙) 이분들이다. 문덕(文德)도 또한 이 일을 집행(執行)하는 말석을 더렵혔다고 하였다.
아! 이것이 그 대략(大略)이다. 금년에 부계당을 개건하게 되자 집을 헐은 날에 이 문드러진 문서를 들보 속에서 얻으니 좀이 침식하고 먼지가 끼어 자형(字形)을 거의 판독(瓣讀)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옛날을 보니 눈물이 가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봉독(奉讀)하였으며 그 실적(實蹟)을 채록(採錄)하여 후손들이 지금을 보는 자료(資料)를 삼게 하노라.
歲癸酉 1873년 지월(至月) 10일 위영복(魏榮馥) 근기(謹記)
아! 부계당의 중건한 전말이 이 춘곡공 기사문을 보니 가히 요연(瞭然)하다. 을유년(乙酉)으로부터 계유년(癸酉)까지 무릇 4차례나 중수하였으니 몇 백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는데도 장대(壯大)하고 아름다움이 하루와 같으니 진실로 당시에 일을 맡은 제공들의 고심과 혈성이 아니겠으며 선조의 자취를 추모함에 누군들 흥감(興感)하지 아니하리오.
하물며 나의 6대조고 옥호부군(玉湖府君) 휘 명성(命成)께서도 또한 현로(賢勞)의 대열에 참여하였는데도 돌아보건대 이 불초는 매연(昧然)하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계유년(癸酉) 낙성 후 61년 만에 비로소 이 글을 다암공(茶嵒公) 가장 중에서 얻으니 슬퍼하나 이미 늦은지라 한번 기뻐하고 한번 눈물을 흘림이 보배처럼 중한 줄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혹시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까 두려워하여 현판(懸板)에 새겨 걸어놓으니 사치스럽다고 이르지 말지어다.
乙亥 1935년 동지월(冬至月) 옥호공(玉湖公) 6대손 계창(啓昌)